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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오늘 잘 살게 하는 종교
▶'나’라는 자신감, 오늘이 중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용기를 불어 넣어줘야 한다.
나 대신 그것을 해 줄 사람은 없다.
부처는 어렵게 전달하는 것이 진리라고 한 적이 없다.
진리는 내 주변에 널려있다.
진리와 한 몸이 될 수 없는 것은 집착의 소유욕을 버리지 못해서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다.
같은 이치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나’다.
오늘이, 금생이 제일 중요하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다.
내가 죽으면 끝이다.
우울하다거나, 돈 없다고 불평하면 안 된다.
살아있다는 자체로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가정은 안 살피고 밖에만 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전모몽상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내 몸, 내 가족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부처님은 “네 마음을 게을리하지 말라. 네 마음의 스승이 최고의 스승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구하지 말라, 구할수록 마음이 어지럽다. 두드리지 말라. 언제나 문을 열려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훌륭한가?
▶경전에도 부처에게도 속아서는 안 돼
불교 텔레비전을 보니 누워있는 부처님상을 조성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광고가 있었다. 진리가 옆에 있고, 쉽게 만날 수 있음에도 신도들은 복을 뺏길까 봐 그 상을 향해 달려간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방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승려에게 의지할 일도 경전에 의지할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 커피 맛, 김치 맛을 언어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다.
먹고도 설명 못하는 것은 그것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경전에 속아서도 안 되지만 스님에게 의지해서도 안 된다.
내 스스로 마음을 열어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
▶ 12연기 순서에 집착 말아야!
12연기는 연기법칙의 큰 틀이다.
부처님은 연기를 순역(順逆)으로 꿰뚫어 깨달음을 얻었고, 나가르주나(용수보살)는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12연기를 역순(逆順)으로 풀었다.
성철 스님은 “12연기는 순관이든 역관이든 설명이 안 된다.
깨달아야 알지 그 이전까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12연기를 설명할 수 있다.
순서로 배열돼 있지 않고 흐트러져 있어도, 예를 들어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섞여도 노래가 완성되는 것처럼 순서로 설명해서도 안 되고, 역으로도 안 된다.
단지 그렇게 나열해 놓은 것 뿐이다.
인과를 설명하는 것 가운데 육도윤회는 불교와 관련 없다.
부처님이 탄생하기 500년 전부터 윤회설이 있었다.
육도윤회를 불교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교가 ‘내생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사는 동안, 마음이 열렸을 때나 닫혔을 때나 한 개체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뿐이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하나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생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깎은 사과를 책상 위에 두면 산화작용에 의해 순간순간마다 그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연기의 법칙에서는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전생ㆍ내생 모두 없어 오직 오늘이 있을 뿐
연기의 원리에서는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는 범천(브라흐만)을 인정할 수 없듯, 나를 주재한다는 ‘거짓 나’(아트만)도 인정될 수 없다.
영원불변한 내가 없는데 무엇이 주체가 돼 육도윤회를 한단 말인가?
불교는 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겼다 하면서 다른 종교를 나무란다. 하지만 ‘나’를 주재하는 것을 아트만으로 규정하는 우리가 더 웃긴다.
꽃나무가 있다.
그 꽃이 뿌리로부터 땅에서부터 받아들여서, 눈 귀 코 입이 작동할 때 꽃향기도 인식할 수 있다. 눈이 작동할 때 숫자를 헤아릴 수 있다. 박수 소리, 주먹 소리, 보면서 들으면서 분별하며 작동한다. 희로애락, 설렘, 실망의 감정이 올라온다.
살아있는 오늘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오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현대 불교신문 <🙏항봉 스님 글 중>
출처: 글쓴이: 🙏향상일로
https://cafe.daum.net/seojinam/Xdms/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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