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것을 수트라(sūtra), 경전이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는 크게 소승 경전과 대승 경전이 있습니다.
소승 경전을 ‘아함부’라고 부릅니다.
대승 경전은 그 양이 많아서 반야부 계통의 경전과 법화‧열반부 계통의 경전, 화엄부 계통의 경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소소한 대승 경전을 전부 합해서 방등부라고 부릅니다.
즉, 대승 경전은 방등부, 반야부, 법화‧열반부, 화엄부 이렇게 4부로 나누어집니다. 소승 경전인 아함부는 다시 네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중아함(中阿含), 장아함(長阿含), 증일아함(增一阿含), 잡아함(雜阿含)이 그것입니다. 아함부 경전은 팔리어로 되어 있습니다. 팔리어로 된 경전을 ‘니까야(Nikāya)’라고 합니다.
한글로 번역된 아함경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팔리어를 우리나라 말로 직접 번역한 것이 있고,
둘째, 옛날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했다가 그것을 근래 들어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 있습니다.
두 경전의 내용이 크게는 비슷하지만 한역 아함부는 중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옛 중국의 봉건적 문화나 남녀 차별적 문화, 신분 차별적 문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다소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반야심경은 대승 경전 가운데 반야부 계통의 경전입니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은 약 600권이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연구를 종합해 보면 이 경전은 대략 서기 1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금강경은 기원전 1세기경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이 먼저 출현하고 반야심경은 그보다는 뒤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승 불교의 대표적인 사상은 공(空)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은 공사상을 얘기하고 있지만 공(空)이라는 용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는 용어가 핵심적으로 등장합니다.
▶반야심경이 설해진 배경과 장소
“법문이 설해진 장소는 마가다국 왕사성의 영축산(靈鷲山)입니다.
모인 대중은 비구와 보살입니다.
즉 소승 수행자와 대승 수행자가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깊은 삼매에 들어 계셨습니다.
그때 관자재보살이 삼매에 들었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바로 '제법이 공하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자 모든 번뇌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리불 존자가 소승 불교 수행자들을 대표해서 관자재보살에게 대승 사상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관자재보살이 사리불 존자에게 반야바라밀다를 행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했습니다. 설법이 끝나자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깨어나셔서 관자재보살에게 '네가 말한 것이 다 사실이다.' 하고 칭찬을 하십니다.
그러자 법문을 들은 사리불 존자도 기뻐하고, 법문을 한 관자재보살도 기뻐하고, 그 자리에서 법문을 듣던 스님들, 보살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아수라, 건달바, 가루라, 긴나라 등 하늘의 온갖 신들도 다 기뻐하며 이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반야심경의 광본은 이러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늘 독송하는 반야심경 약본은 이 중에서 관자재보살이 사리불에게 반야바라밀다를 행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설법한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경전의 제목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여기서 '마하'는 무한히 크다는 의미입니다.
'반야'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합니다.
'바라밀다'는 번뇌에서 해탈하여 도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심경’은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란 ‘무한히 큰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가장 핵심이 되는 부처님 말씀을 추려 놓았기 때문에 글이 길지 않습니다.
총 260자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반야바라밀다'입니다.
깨달음의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수행자는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내가 원하던 것을 얻어서 벗어나는 거예요?
아니면 이 모든 괴로움이 나의 무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무지를 깨우쳐서 벗어나는 거예요? 수행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사람입니다. 즉, 법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즈냐 파라미타얌(Prajnā-pāramitāyāṃ)'이라고 합니다.
내가 털끝만큼도 욕심 없이 무엇이든 베푸는 마음을 내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베푸는 마음을 내면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 보시의 마음을 내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다나바라밀다(dana paramita)라고도 부릅니다.
이와 달리, 내가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대승 불교의 핵심은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반야바라밀다’입니다. 바라밀다에는 총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가 그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대승보살이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수행법이라고 해서 ‘육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좁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이 여섯 개 중 하나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이 여섯 가지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할 때 단순히 보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라밀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법이 공한 줄 알고 베풀어야 바라밀이 될 수 있습니다.
▶제법이 공한 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네 것, 내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실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베푼다’는 용어를 썼을 뿐이지, 실제로는 내가 너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한 사람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무주상보시가 되어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단순히 베푸는 것만으로는 바라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남을 도와주고 나서 섭섭할 때가 있죠. 베풀었는데 오히려 괴로움이 더 생겼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보시라고 할 수는 있어도 보시바라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이 물건이 내 것이라는 생각,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즉, 제법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그때 비로소 바라밀이 되는 거예요.
인욕바라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참는다고 할 때, 참는 데는 한도가 있어요.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면 인욕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에요. 물론 착한 사람인 것은 맞아요.
아무리 화가 나도 꾹 참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니까 착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내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바라밀이란 내가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욕바라밀이 되려면 참을 것이 없는 경지가 되어야 해요. 남들은 나를 보고 '그 사람 참 잘 참는다.' 이렇게 얘기하겠지만 스스로는 참을 것이 아예 없어야 합니다.
참을 것이 없어지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면 참을 것이 없어집니다.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내가 완전히 이해하면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해서 기분이 나빠졌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10년 전에 내가 그 사람에게 돈을 빌린 것이 생각났어요.
그는 나한테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러면 내가 돈을 주면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생색을 내야 할까요?
고맙다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확연히 알면 참을 것이 없어져요.
그래서 바라밀이 되려면 모두 그 앞에 반야의 요소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선행될 때 베푸는 것이 바라밀다가 되고, 참는 것이 바라밀다가 되고, 정진이 바라밀다가 되고, 선정이 바라밀다가 되고, 계를 지키는 게 바라밀다가 되는 거예요.
깨달음이 없다면 그것은 비록 누군가에게 좋은 일은 될 수 있어도 나의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뒤끝이 남게 됩니다. 괜히 보시했다가 뒤통수 맞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기껏 좋은 일을 하고서는 기분이 나빠질 때가 많잖아요. 수행이란 뒤끝이 없어야 합니다. 흔적이 없고, 남음이 없는 것이 수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