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다 수행은 가장 확실한 믿음의 수행이고, 가장 확실하게 아는 수행이고, 가장 확실한 실천 수행입니다. 믿고(信) 알고(解) 실천(行)한 다음에는 증득(證)을 해야 합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신해행증에 기초해서 화엄경에서는 4가지 진리의 차원인 4법계(四法界)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첫 번째인 사법계(事法界)는 현상계를 말합니다.
두 번째인 이법계(理法界)는 본질계입니다.
세 번째인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는 현상과 본질이 사실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세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는 차별 현상계에서 자유로워진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욕망에 찌들고, 성질에 사로잡히고, 어리석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괴로움을 만듭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것처럼 자업자득의 인생을 삽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자기의 고통을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사법계(事法界)입니다.
이런 걸 더 깊이 관찰해서 시류에 물들거나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은거를 하기도 합니다.
자연인처럼 살거나, 아니면 머리 깎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살기도 하죠. 그것이 이법계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문제가 해결될까요? 자기가 물들지 않는 건 좋은데, 세상은 그냥 흘러가죠. 그리고 자기는 갇혀 있습니다.
새가 새장에 갇혀 있듯이, 물고기가 연못에 갇혀 있듯이, 그 울타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서 배를 젓는 사람과 같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지는 일은 없지만, 그 배는 호수 밖을 나가지 못합니다. 크게 보면 새장의 새와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법계(理法界)입니다.
세상 속에서 걸림 없는 삶을 사는 길
이사무애법계라고 하는 세 번째 세계는 보살의 세계입니다.
보살의 세계는 원을 갖고 큰 배를 만들고, 풍랑을 이용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바람을 이용하는 돛을 만들어서 바다를 항해합니다.
호수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마음껏 항해합니다.
보살은 욕망의 세계 속에 살면서도, 욕망에 물들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유유자적(悠然自適)하게 세상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바른길로 이끄는 활동을 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세계입니다.
색(色)이 즉 공(空)이고, 공(空)이 곧 색(色)인 이사가 무애한 세계죠. 본질과 현상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절에 가면 일주문(一柱門)이 있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해서 불이문(不二門)이라고도 하고, ‘중생과 부처가 하나다.’ 해서 일주문(一柱門)이라는 말도 씁니다. 이것이 이사무애법계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반야심경에서는 이사(理事)가 무애(無礙)한 세계, 즉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엄경에 가면 ‘사사무애법계’가 나옵니다.
현상 속에 있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세계입니다.
삶이 그냥 이 세상 속에서 걸림 없이 이루어지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배를 갖고 바다를 항해한다 하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법계는 놀러 갔다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세계이고, 이법계는 물에 안 빠지려고 호수에 사는 세계이고, 이사무애법계는 바다에는 가고 싶고 물에는 안 빠지고 싶어서 큰 배를 갖고 바다에 나가는 세계입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물에 안 빠지는 것이 좋다는 거예요.
물에 안 빠지는 게 좋은데 첫 번째는 물에 빠져서 괴롭고, 두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울타리를 치고 살고, 세 번째는 물에 안 빠지려고 큰 배를 탑니다.
바다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고 그런데 사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물에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안 해요.
어차피 바다에 있는 진주조개를 줍기 위해서는 내 발로 물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빠지려고 했는데 빠지면 고통이지만, 이 사람은 내가 볼 일이 있어서 내 발로 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물에 빠졌지만 본인은 물에 빠진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지장보살의 원입니다.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지옥에 갔는데, 우리가 볼 때는 바보 같죠. 다른 사람은 지옥에 안 가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지장보살은 안 가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발로 가서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구제합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고 사사무애법계라는 경지는 이 세상에서 남이 울 때 같이 울고, 남이 웃을 때 같이 웃고, 남들과 똑같이 삽니다. 남이 울 때도 안 울고, 남이 웃을 때도 안 웃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물듦으로 해서 걸레처럼 다른 사람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법계는 깨끗하게 살고 싶은데 물드는 존재, 이법계는 깨끗하게 살려고 더러운 곳에 가까이 안 가는 존재, 이사무애법계는 가까이 가도 물 안 드는 존재인데, 마지막 단계인 사사무애법계는 내가 물 들고 상대를 살리는 존재입니다.
내가 지옥에 가고 상대를 지옥 밖으로 내보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보여요. 그런데 본인의 마음속에는 괴로움이 없습니다. 이것을 ‘현현(顯現)한다’, ‘천백억 화신(千百億 化身)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우리가 어떤 잣대로 ‘저 사람은 수행자이다’ 이렇게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는 ‘물에 빠졌나, 안 빠졌나’ 하는 잣대가 있는데, 사사무애법계는 기준이 없으니까 잣대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삶으로 해서 주위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느냐?’
‘본인은 괴로워하느냐?’
이런 걸 봐야 돼요.
운다고 다 괴로운 건 아니에요.
남이 슬퍼하니 함께 슬퍼해 주고, 남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니 같이 가서 들어주고, 남이 감옥에 갇히니 같이 가서 감옥에 갇혀도 주지만 본인은 괴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표시가 안 납니다.
그것을 화작(化作) 또는 화현(化現)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아직 부처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릅니다.
보살은 아직 부처가 못 된 단계로 설정되어 있는데, 화엄경의 사사무애법계에 가면 보살은 이미 부처가 됐지만 부처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보살행을 하는 모습까지 나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