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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三法印), 사법인(四法印), 제법무아(諸法無我)

by 혜명(해인)스님 2019. 3. 17.


卍-삼법인(三法印), 사법인(四法印), 제법무아(諸法無我)-卍

      이상이 무상하다는 것은 인도의 다른 종교와 철학에서도 설(說)하지만,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명제는 다른 가르침에는 없는 불교의 독특한 것이다.

      여기서 제법(諸法)이라함은 일체법(一切法)이며,
      그것은 「무아(無我)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에서는 세계와 인생의 존재로서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에 의해 나타낸 것처럼 상식적인 현상세계만을 지칭한 것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제법(諸法)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제행(諸行)과 내용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란 모든 것에 실체(實體)와 본체(本體)를 보지 않는 것이다.
      무아(無我)라는 말은 주로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에서 쓰고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공(空)」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 반야경」에서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던가 「오온개공(五蘊皆空)」으로 설(說)해지고 있는 것은 원시불교의 제법무아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와 공은 같은 의미 내용이며 중국의 선종 등에서는 이것을 「무(無)」라는 말로도 표현하였다.

      공(空)이나 무(無)가 아무것도 없는 허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중국의 대승불교에서는 무아(無我)나 공(空)을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인공(人空)[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 하는 「인(人)과 법(法)」의 이종(二種)의 무아(無我)와 공(空)으로서 설(說)했으나 원시불교에서는 이러한 구별을 세우지 않고 양쪽의 뜻을 포함시켰다.

      만약 굳이 그 구별을 짓는다면 일방적으로는 「색(色)은 무아(無我)인 것이다.」「오온(五蘊)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같은 법무아(法無我)를 설하고 가옥과 차량 등의 비유로 무아를 설명하는 경우처럼 비유적 통속적인 입장에서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등의 인무아(人無我)를 설하였다.

      그리하여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일체개공(一切皆空)이 설해진 이유로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경우와 같이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이 있는 것이다.

      무아(無我)와 공(空)을 「무자성(無自性)」이라 하여 설명하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며 「무소득(無所得)」이라던가 「무가애」라 하는 것들은 실천적인 면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먼저 무아(無我)와 공(空)은 이론적으로는 무자성(無自性)으로 설명된다. 무자성(無自性)이란 자성(自性) 이라는 그 자체의 일정한 성질이 없다는 것이며, 고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적 존재는 영구불멸(永久不滅)이 아니고 고정된 성질이나 상태가 아니다.
      영구불멸(永久不滅)의 실체(實體)나 본체(本體)라면 고정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그와 같은 실체(實體)나 본체(本體)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성(自性)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정된 실체(實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의 의미이지만 다시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현상의 움직임에도 고정된 것이 없다고 하는 것도 무자성(無自性)의 의미인 것이다.
      세상에는 현상(現象)의 움직임이 일정하다고 말하는 학설이 있다

      예컨대 헤겔의 정신변증법은 우리의 정신이 변증법(辨證法)에 의해 움직이는데, 그것은 반드시 절대정신을 향해 움직이며, 그 진로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에 있어서도 사회는 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반드시 일정한 진로를 밟으며, 수렵시대, 농노시대, 봉건시대, 수공업시대, 자본주의시대, 사회주의시대(社會主義時代), 공산주의시대(共産主義時代)의 발전단계를 밟는다고 하지만, 실재의 사회의 전개는 이대로 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형식론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믿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의 사상도 불교가 불멸 후 천년 또는 오백년 동안에는 교법(敎法)도 수행(修行)도 증과(證果)도 바르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정법(正法)의 시대이며 그 후 천년동안은 교법(敎法)과 수행(修行)은 정법의 시대와 같다.

      그리고 증과(證果)를 얻는 사람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법(像法)[외형적으로 정법과 비슷한]의 시대이며, 그 후 一萬年 동안은 교법(敎法)만 남고 수행(修行)도 증과(證果)도 없어지기 때문에 말법(末法)시대로 하는 것이다.

      이 삼시(三時)의 설(說)은 불교의 움직임을 고정한 것으로 보며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의 불교 본래의 입장과 다른 것이며, 석가세존의 교설(敎說)이라 할 수 없다.

      사회와 인생의 움직임은 이와 같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緣)을 가하는 방법여하에 따라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움직이는 무자성(無自性)이다. 불교가 외교에서 설하던 갖가지 숙명론을 배제한 것은 그것이 佛敎의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의 입장과 반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무아(無我)와 공(空)의 이론적 의미를 고찰하였으나 다음에는 무아(無我)와 공(空)의 실천적 입장으로서의 「무소득(無所得)」「무가애(無가碍)」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어떻게 있는가?」에 답한 것인데 대해 실천적으로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에 답하는 것이다. 무소득(無所得)이란 무아(無我)와 공(空)의 실천적 입장이며, 집착(執着)이 없고 이해손득(利害損得)의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떠나는 것이다.

      집착을 없앤다는 것은 모든 것은 자기도 자기의 소유물도 무상하고 무아(無我)이며 영원불변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 변화하고 쇠멸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영원한 것으로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집착이 있기 때문에 제삼자적인 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그릇된 태도와 행동을 취하여 실패와 고뇌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공정한 판단이나 태도를 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집착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집착이 있으면 이해손득(利害損得)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게 된다.
      바른 이치와 정의보다 이해를 중시한다면 결코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이를테면 타인에게 시여자선(施輿慈善)을 하는 경우 시여(施輿)함으로써 많은 과보(果報)를 기대한다거나 시여(施輿)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재해를 두려워하여 시여 한다거나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시여 한다거나 지금 시여(施輿)해 두면 장래 자기가 빈궁할 때 그것을 되찾게 된다고 생각하거나, 내세에 생천(生天)을 구하기 위하여 시여 한다거나 명예나 지위를 구하기 위해 자선가라는 평판을 얻기 위해 시여 한다거나 하는 것은 시여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모두 대가(代價)를 원하는 유소득(有所得)의 시여 이며, 무아무소득(無我無所得)이라 할 수 없다.

      무아무소득(無我無所得)의 시여(施輿)란
      삼륜공적(三輪空寂)의 시(施)[또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시(施)]라 불리는 것이며 시여(施輿)하는 경우에 시자(施者), 수자(受者), 시물(施物)의 삼륜(三輪)을 공적(空寂)하게 하고 청정하게 시여(施輿)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누구에게 이만큼의 가치 있는 것을 보시한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이며 더구나 이해소득의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다만 자비연민의 정에 이끌리어 자연적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상대가 잘 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보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아무소득(無我無所得)의 보시가 이상적인 최고의 것으로 되어있다.
      불교에서 설하는 공무아(空無我)의 실천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무소득(無所得)의 태도가 다시 진보되어 완성하게 되면 「무가애」의 상태가 된다.
      무가애란 무애(無碍)라고도 하며 자유자재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마음대로 행하는 방일이 아니다.

      세상일에도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무책임한 행동은 결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자유란 반드시 법에 따른 자유이며 주위에 폐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소득(無所得)은 집착이 없는 것이며 무애(無碍)는 집착이 없는 행위가 자유자재이고 또한 법에 맞는 것이다.

      이것을 가까운 예로 말한다면 서도(書道)의 연습을 한다고 하자,
      서도(書道)의 연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글씨본으로 필법을 배우는 것인데, 글씨본대로 주의하여 쓸 때는 잘 쓰려고 하는 의식이 있으며 형태는 조정되어 있어도 글씨가 자유롭지 않고 힘이 없으며 위축된 것이 된다.

      이것은 유소득(有所得)의 집착이 있는 글씨이다.
      그러나 좋은 글씨를 쓰려고 생각하지 않고 쓴 어린이의 글씨에는 간혹 놀랄 만큼 잘 써진 글씨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필법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어색한 곳이 없이 활달한 글씨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글씨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명인(名人)이라 불리는 서도의 대가는 좋은 글씨를 쓰려고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거침없이 쓴 것이 자유롭고 힘이 들어 있으며, 지도(枝道)가 들어있는 자연필법에 부합되는 글씨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글씨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예일능(一藝一能)에 뛰어난 명인이라 불리는 사람은 적어도 그 예능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며, 그와 같은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예능이 아니면 진실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는 것이다.

      불교가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일예일능(一藝一能)이 아니다.
      전인격을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이상경(理想境)에 도달시키는 데 있다.
      유교에 있어서도 공자가 「나이 70에 이르러 마음이 원하는 바에 따라 규범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바로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경지를 가리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불타라 불리는 분도 이상적인 이해와 실천적인 행동이 모두 완성되어 그것이 일체가 되고 무애자재(無碍自在)한 활동이 되어 사회구제의 大慈悲의 움직임도 무위자연으로 행해지도록 된 이상적 인격을 지칭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