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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참선-청화 스님

by 혜명(해인)스님 2022. 4. 18.

염불참선-청화 스님


    우선 참선하는 것에 대해서 몇 말씀을 드립니다.
    보통은 참선은 조금 더 고도한 사람들, 차원이 높은 사람들이 참선하고 염불은 차원이 낮은 사람들이 염불한다. 이렇게 보통은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참선 가운데도 염불이 들어있고 또 염불 가운데도 참선이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 우리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로 우리 근본 성품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불심(佛心)이나 또는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나 또는 법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이나 똑같은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같은 뜻을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시기상응(時期相應)한 법문을 하시기 때문에 표현만 다른 것이지 의미는 똑 같습니다.

    ​ 즉 그와 같이 참선(參禪)한 법도 꼭 참선이 정도가 높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나의 본래가 바로 부처기 때문에 본래의 부처자리, 모든 것은 근본성품이 있고 또 상이 있고 하지 않습니까.

    ​ 모든 것은 근본본체(根本本體)가 있고 또는 활용할 용(用)이 있단 말입니다.
    이른바 체용성상(體用性相)이라. 본체와 용이 있고 본체와 또는 근본성품과 그런 상이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현상적(現象的)인 것은 이것은 하나의 상인 것이고 현상적으로는 안보이지만은 현상의 근본적인 성품은 이것은 본체(本體)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본래로 부처고 일체존재(一切存在)가 근원적인 자리에서는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아님이 없다는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모두가 다 참선입니다.

    ​ 염불을 하던 경을 외우든 또는 가만히 명상을 하고 있든 우리 마음이 이것저것 산란스러운 현상적인 것에 끌리지 않고서 우리 마음을 가다듬어서 꼭 그 불심(佛心)자리, 불심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참선(參禪)입니다. 참선하는 법이 큰스님들한테 화두(話頭)를 받아서 무슨 화두를 의심하고 그런 법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 가령 우리가 화두해서 없을 무(無)자, 무자 화두가 보통은 가장 많습니다.
    무자화두를 우리가 든다 하더라도 무자화두를 들면서 그 무(無)! 무! 무! 무! 이렇게 무자화두를 들고만 있지 그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본래의 자리, 마음의 근본성품(根本性品) 자리를 떠 나버리면 그때는 참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른바 불심(佛心)을 떠나버리면 참선이 아닙니다. 불심을 떠나지 않고서 불심에 입각해야 그래야 참선이란 말입니다.

    ​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염불을 하든 또는 주문을 외이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의 상(相)이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그 성품을 떠나는가 안 떠나는가 그것에 매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령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念佛)을 한다 합시다.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 하면서 불심자리,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마음을 불성자리에다 두고서 관세음보살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그때는 참선입니다. 염불참선(念佛參禪)이란 말입니다. ​

    염불도 하다보면 싫증이 나서 하기 싫을 때도 있겠지요.
    그런 때는 염불을 않고서 그냥 가만히 명상(瞑想)에 잠긴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서 자기한테 갖추고 있고 우주(宇宙)에 충만해 있는 불성자리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명상해도 그때는 바로 참선입니다. 그런 증거로 일본은 지금 묵조참선(黙照參禪)이 있고 말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묵조란 것은 잠자코 가만히 불성자리를 비춰본단 말입니다.

    ​ 그런 참선하는 조동종, 묵조하는 잠자코 비추어 보는 참선법이 있고 또 그런가 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화두를 큰스님들한테 화두를 타가지고서 화두에 다가 의심(疑心)을 품고 말입니다. 계속 의심하는 그런 법도 있단 말입니다. 그것은 임제종(臨濟宗)이라 하는 종파(宗派)에서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종파는 화두를 의심하는 화두가 아니라 모두가 다 부처니까 차라리 염불화두라.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염불을 화두로 해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하는 황벽종(黃檗宗)이란 종파도 있단 말입니다.

    ​ 그런데 우리한국은 그런저런 복잡한 것이 다 안 들어 왔단 말입니다.
    고려(高麗)때 중국(中國)서 한동안 들어오고 조선시대 때는 중국하고 교류가 끊어져 버리니까 고려 때 들어온 화두 하는, 화두 의심하는 법, 그것만 딱 남아서 이조오백년 동안에 딱 화석(化石) 되어 버려서 굳어버렸단 말입니다. 지금 한국선방은 어디가나 화두를 의심하는 그런 선법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참선법의 전부는 아닙니다.

    ​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세계적인 안목을 항시 가져야 씁니다.
    또는 역사적인 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역사의식이나 또는 세계적인 안목을 갖는다고 생각 할 때에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래 참선은 어떠한 것인가? 본래 참선이란 것은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이 이것이 참다운 참선이란 말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든 또는 화두를 의심하지 않든 또는 염불을 하든 염불을 않든 그런 것은 그런 상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공부하는 마음 자세가 불심 자리를 안 여의면 그때는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마음이 자유스럽고 공부하기가 쉽겠습니까.

    ​ 우리 인간의 대사(大事)라.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것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가장 큰 일을 위해서 나오셨습니다. 가장 큰 일이란 것은 무엇인가. 가장 큰 일은 우리가 부처님이 되는 일입니다. 부처님의 견해를 우리 견해로 하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일대사불출세(一大事佛出世),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신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중생들이 잘못 보고 무지무명에 가리어서 자기 스스로도 모르고 우주를 바로 볼 줄도 모른단 말입니다.

    ​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는 나라는 것이 원래 허망(虛妄)한 것인데 꼭 나만이 최고다. 그런 아상(我相)이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 번뇌(煩惱)가운데서 우리 무명 가운데서 무지무명 가운데서 가장 독스러운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나라는 것을 내 몸뚱이만을 나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러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즉시에 나한테 좋은 것은 탐심(貪心)을 내고 나한테 싫은 것은 진심(嗔心)을 내고 삼독심(三毒心)을 낸단 말입니다.

    ​ 삼독심을 못 끊으면 이것은 참다운 인간이 아닙니다.
    과거전생에 삼독심을 제대로 끊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 밖에는 못 됐습니다. 조금 많이 끊었더라면 천상(天上)으로 태어날 것이고 온전히 끊었으면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극락(極樂)에 태어날 것인데 우리가 조금 밖에 못 끊고 말아버렸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이라는 것은 참 쉬운 것입니다. 생긴대로 우리가 공부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게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두루 해 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관찰하면 되는 것이고 화두를 의심하고 싶으면 화두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하면 그때는 참선이 못됩니다.

    ​ 끝도 갓도 없는 마음의 본 바탕자리, 그 바탕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의심도 해야지 그냥 덮어놓고 의심하면 상기(上氣)만 되어 가지고서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활짝 열어서 마음이 본래 열리는 것인데 우리가 지금 닫고 있단 말입니다. 마음은 본래 열린 것입니다. 부처님공부 가운데서 제일 쉬운 공부를, 여러분도 기왕이면 제일 쉬운 방법으로 공부하고 싶으시겠지요.

    ​ 용수보살(龍壽菩薩), 용수 보살은 제2의 석가(釋迦)랄 정도로 위대한 분 아닙니까. 용수보살은 14대 조사입니다. 부처님 때부터서 정통(正統)14대 조사입니다. 그러면서도 대승불교(大乘佛敎), 대승불교는 마명(馬鳴)대사, 마명대사는 12대조사인데 주로 마명대사하고 용수보살 때 대승불교의 체계가 확립이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마명대사 용수보살을 정말로 제2의 부처님같이 숭상하는 것입니다. 그 용수보살이 성불(成佛)하기 제일 쉬운 것이 어떤 것인가.

    ​ 성불하는 공부 가운데 어려운 면과 쉬운 면을 말씀하는데 용수보살이 내놓으신 책 가운데서 대비바사론, 대비바사론 가운데 다섯째 품이 이행품(易行品) 이라. 쉬울이(易)자, 행할 행(行)자 이행품이란 말입니다. 이행품이라. 용수보살이 또 중생 (衆生)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든가 말입니다. 가지가지로 난행고행(難行苦行)해 가지고서 도(道)를 성취한 뒤에 어떻게 중생들이 빠르게 성불 할 것 인가. 어느 누구나가 다 조금도 저항이 없이 무리 없이 쉽게 공부할것인가. 그래서 쉬울 이(易)자, 행할 행(行)자 이행품(易行品)이란 말입니다.

    ​ 그래서 대비바사론 이행품에 보면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명호(名號)를 왼단 말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고 할지언정 너무나 업을 많이 지었단 말입니다. 전생도 많이 짓고 금생도 태어나서 부터서 별로 필요 없는 것을 많이 배우고 필요 있는 참다운 진리는 별로 배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놔서 우리 마음은 그런 업(業)의 습관성(習慣性)으로 해서 꽉 차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마음을 통일을 시켜라. 이렇게 해도 쉽지가 않습니다.

    ​ 참선 방에 앉아서 한 3개월 동안 또는 몇 년 동안 공부를 해본다 하더라도 그냥 쉽게 마음이 통일이 되고 마음이 이른바 정화(淨化)가 되고 이렇게 되기가 그렇게 어렵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3년 결사(結社)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몇 번했어도 지금도 부처님 공부할라면 천리만리입니다. 그 회한(悔恨)과 한탄(恨歎)만 남습니다. 부처님 공부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렵다고 생각한적 한 번도 없습니다. 제일 재미지고 제일 쉬운 것인데 내 스스로가 제대로 부지런히 공부를 못했단 말입니다.

    ​ 가장 쉬운 것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우리 자신의 주인공(主人公)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과 우리 자신과 불심(佛心)과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 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것이 셋이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됐습니다.
    그래놔서 어느 것이나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런 것이지 근본 성품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미운사람, 고운사람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하는, 공부 가운데 가장 쉬운 법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 생긴대로 내 본래 주인공 자리인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도 쓸데없는 것을 많이 배워놔서 마음을 통일을 시키기가 쉽지 않겠지요.

    ​ 그래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인다. 부처님 이름을 외입니다.
    정토경(淨土經)에 보면은 부처님 이름을 무생청정보주명호(無生淸淨寶珠名號)라. 무생청정보주명호라. 그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부처님 이름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다 같은 뜻입니다. 같은 뜻인데 부처님 이름은 무생청정(無生淸淨)이라. 무생은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그러면서 청정(淸淨)하고 또는 우주에 다시없는 보배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정말로 영원한, 그 빛나고 보배 같은 그런 이름이란 말입니다.

    ​ 우리 인간 이름은 그때그때 부모라든가 작명가가 이름을 짓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명호, 부처님 이름은 명호라고 합니다. 부처님 이름은 우리 사람이 아무렇게나 적당히 그때그때 지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도 끝도 없는 영생(永生)하고 영원히 모든 성품공덕(性品功德)을 다 갖춘 보배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이름은 우리가 한 번 외이면 외인만치 우리 본래면목으로 돌아갑니다. 무생청정보주명호라. 영생의 보배 같은 청정한 이름이란 말입니다.

    ​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로 부처가 아니면 모르거니와 본래가 부처인지라 본래 부처의 자리, 우주의 근본 생명자리, 그런 자리를 우리가 그런 이름을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마음이 한 번 듣고서도 업장이 가벼우면 그냥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 하더라도 그렁저렁 살다가 어언간에 임종에 다다를 수가 있겠지요. 어언간에 죽음이 온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언제 올지를 모릅니다.

    ​ 헌데 죽음에 다다라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정말로 지옥(地獄)이 있고 극락(極樂)이 있는가는 우리가 모르겠지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닌 바에는 틀림없이 극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극락에 가야지 않겠는가. 이런 사무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 가지만 불러도 좋습니다. 그 사무친 마음으로 절실한 마음으로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한 생각, 한 생각으로 해서 능히 우리 모든 업장이 녹아져서 생명(生命)의 본고향(本故鄕)인 극락세계(極樂世界)로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우리 불자님들, 아까 용수보살, 제2의 석가란 용수보살이 말씀한 가장 쉬운 법문이 무엇인가. 가장 쉽고도 빨리 성불할 수 있는 그런 법이 무엇인가. 이것이 이른바 염불(念佛) 공부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