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시대 때, 무학 대사가 성불하고자 관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산신각에서 하루에 삼천배씩 지극정성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나는 산신령이지 부처가 아니다.
그대가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를 해야지.”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음전에 가서 아침에 천배, 낮에 천배, 저녁에 천배 해서 하루에 삼천배를 했습니다. 그렇게 삼천배를 하면 아침부터 시작해서 마칠 때는 해가 지고 깜깜합니다.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했는지 나중에는 이마에 혹이 생기고 무릎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3년 만에 절하다가 홀연히 깨달았어요.
깨치고 보니 아하, 내가 불상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었는데 깨닫고 보니까 내가 나를 보고 절하고 있었구나. 결국 따져보면 내 그림자라는 겁니다.
산도 따져보면 나의 그림자요,
소리도, 모든 불상도 나의 그림자라는 겁니다.
자기 그림자라고 한다면 바깥에 쫓아다닐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과거의 부처님, 지금의 부처님, 앞으로 어떤 부처님이든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맨 처음 깨치고 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니까 부처님과 똑같은 불심을 갖추고 있다는 걸 알았지요.
심지어 미물 곤충도, 바늘로 찔러서, 발로 밟아서, 느낄 수 있고 감각이 있는 자는 모두 다 불심이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각자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불심을 갖추고 있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이러쿵저러쿵 온갖 생각을 하다 보니 망상과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잊어버리고 헐떡거리고 있는 겁니다.
누구나 자기 속에 불심이기 때문에 남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잖아요.
시간이 많이 걸릴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영리한 사람은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닫습니다.
하지만 말 한마디를 듣고 깨닫기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으로는 그것이 어렵다 보니 욕심이라는 나쁜 병을 고치기 위해서 약을 먹어야 합니다. 욕심이 나게 되면 아, 내가 또 쓸데없는 욕심을 내고 있구나. 부지런히 남에게 주는 버릇을 하고 남을 도와주는 행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학 대사처럼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수행하다가 깨닫고 보니 자기가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장보살을 부르든,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보현보살을 부르든, 문수보살을 부르든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무엇을 불렀든 자기가 자기 마음속의 불심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불심이라는 것은 결코 관음 도량, 문수도량이라고 해서 남해나 오대산이나 특별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 서 있는 이곳, 밥 먹는 이곳, 일하는 이곳, 울고 있는 이 자리, 화내는 이 자리에 불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바라고 있는 소원은 너희들이 나와 같이 불심을 찾아봤느냐. 왜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헐떡거리고 있느냐. 불심만 찾았다면 권리고 명예고 재물이고 아무 관계 없이 그것을 초월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안으로 10년 동안 열심히 찾았는데 못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을 찾아가서 깨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물었습니다.
선지식이 “너는 절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전에는 바깥으로 향해서 구했는데 그것은 틀렸다 하고 지금은 안으로 향해서 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식이 빙긋이 웃습니다. “그렇게 하면 깨닫지 못하지.” 구하고 있기 때문에 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구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 버리라.” 그 소리에 홀연히 깨쳤다고 합니다.
중병(重病)에 걸려서 기도하는 도중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나타나 아픈 곳을 만지니 병이 다 나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그 관세음보살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의 관세음보살이 싹을 트고 나와 내 병을 고친 것이지, 어디 다른 바깥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불심은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생각이 복잡할 뿐입니다.
이 마음(불심)을 여러분들이 보게 된다면 기도 성취한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처님 두고 엉뚱한 곳에 부처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