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고 의지하라
그럼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불성은 전자력보다도 더 근원적인 본질입니다.
이른바 가장 근원적인 물자체(物自體), 어떤 것이나 다 불성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불성은 어디에나 충만해 있습니다.
불성이 어디에나 충만해 있다고 생각할 때, 불성 그것은 물질이 아니고 공간성이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미운 사람과 자기 사이에도 불성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런 도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미운 사람, 곧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자기하고도 불성으로 딱 닿아 있단 말입니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떻게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고, 자기가 국회의원 되고자 해서 다른 사람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짓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무슨 생명 운동, 무슨 운동, 여러 가지 운동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다 좋은 것이지만,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운동을 해야 합니다.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해도 철학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말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을 본래 불성자리에다 두고 사랑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 아들한테나 딸한테만 집착할 수가 없습니다.
습기(習氣)가 있어서 단박에는 제대로 안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 지나친 집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그냥 반성하게 됩니다.
옛날에 한 장자(長者)가 있었는데, 장자니까 부자 아니겠습니까?
부자인데 내외간에도 참 잘 만나서 부부간 금슬도 화락(和樂)하고 아들도 출중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부자니까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이나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 사람이 너무 부자이니까 임금도 시기를 하고 대신들도 시기 질투를 했습니다.
‘저놈 재산을 어떻게든 몰수해야 할 것인데’ 하고 말입니다.
옛날에야 그냥 전제주의 시대인지라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역모를 했다는 중상모략을 해가 지고 무슨 올가미를 씌워서 잡아들였단 말입니다.
반역을 해 가지고 역적질했다는 것으로 해서 잡아들였는데 워낙 그런 근거가 없으니까 차마 죽이기가 곤란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장자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여기에서 한 천리쯤 가면 한 성(城)이 있는데, 그대가 이레 안에 여기까지 돌아온다면 그대와 그대 자식이나 종들이나 재산이나 모두를 다 그대로 돌려주고 용서하겠다고 분부했습니다.
천리 길을 도보로 이레 안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간다고 할 때는 자기도 죽고 자기 가족도 다 죽고 재산도 몽땅 빼앗기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갔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힘을 절대로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내 머리는 이 정도 밖에는 아니다.’라고 스스로 힘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힘이란, 본래가 부처이기 때문에 정말로 용쓰고 발휘하고 자기 스스로 편달(鞭撻)하면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꼭 내는 것입니다.
저도 6.25 전쟁 때 어떻게 이상한 일이 생겨 가지고 쫓겼습니다.
밤인데, 제집에서 저 바닷가로 나가 배를 타고 도망갈 판인데, 제집에서 바닷가로 가려면 한 사십 리나 됩니다.
그런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닿는 곳 까지 가는 길에는 언덕도 많이 있고 아주 험준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함부로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십 리 길을 그야말로 밤에 자빠지고 넘어지며 가도 어디 상처 하나도 나지 않고 갔습니다.
제가 보기엔 삼십 분 안에 거기까지 가버렸습니다.
참 그걸 생각할 때에 죽을힘을 다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부사의한 힘을 냅니다.
그 장자도 그야말로 이레 안에 당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다시 또 이레 만에 이쪽 임금님 있는 데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도 할 수 없이 그가 미웠지만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석방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장자가 용쓴, 용맹정진한 힘은 굉장히 가상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법을 위해서 보살행을 한다고 생각할 때에 ‘내 몸뚱이 산다. 내 자식 살린다. 내 재산을 몽땅 그대로 보전한다.’
그렇게 용쓰고 하는 것과 일반 중생들한테 베푸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베풂이 무엇인가?
그것은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게 하는 공덕이 어째서 클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문제 아닙니까?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는다고 생각할 때는 금생(今生)에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불자님들을 가끔 만날 때에 이따금은 제 마음으로 서글플 때가 있습니다.
어째 그런가 하면, 아무런 필요 없이 소모한단 말입니다.
아무런 필요 없이 자기 이웃을 미워하고 서로 불화스럽게 지낸단 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남하고 불화할 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뭣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우리 스님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태안사에 살고 있다고 다른 스님네가 들어오면 “같이 사십시다. 제가 있는 것이 거북하면 저는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남하고 다툴만한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나 자기 재산 남한테 다 줘버린다 하더라도 사실은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공덕만 남습니다.
금생은 참 꿈 같이 허망합니다.
좋은 사람이나 궂은 사람이나 미운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얼마 가지 않아 흔적도 없이 갈 사람들입니다.
오늘 일을 모르고 내일 일을 모르는 것이 인생 아니겠습니까?
정말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허망한 인생 가운데 남한테 좋은 공덕을 짓는 것은 죽어서도 공덕으로 남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학교에 못 들어간다 하더라도, 조금도 손해가 아닙니다.
지금은 못 들어갔기 때문에 그것이 인(因)이 되어서 더 잘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잘 된 것이 도리어 나중에 그것 때문에 잘못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만사(人生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잘 된 것이 도리어 나중에 재앙의 근본이 될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되어서 더 잘되고 하는 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어떤 경우든지, 사업에 실패하거나 남이 배신하거나 자기 배우자가 지금 눈앞에서 곧 돌아가시거나 부처님 법으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학적으로 보면 아무 손해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운문(雲門)선사가 말씀하신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 - 날마다 좋은 날이라, 이런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무엇이 잘 되어서 좋은 날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본바탕에서, 자기 본 성품자리에서 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금년이나 내년이나 모두가 다 좋은 날이요 좋은 해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른바 참선 공부를 한다하더라도 무시선(無時禪)이라, 때 없이 참선이 됩니다. 선방(禪房) 죽치고 앉아서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걸어가나 누우나 모두 선(禪)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 성품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언제나 참선입니다.
그러나 선방에서 비록 위의(威儀)를 가지고 앉아 있다 하더라도,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염불(念佛)하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 성품을 여윈다면 참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이듯이 부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도, 특히 재가불자님들께서는 바쁜 몸이시고 복잡하고 인생고해(人生苦海)인지라 여러 가지로 고액(苦厄)이 많으므로 꼭 마음에 의지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그래서 대의호(大依怙)라 -
의지할 의(依)자, 믿을 호(怙)자 - 우리가 믿고 의지할 데입니다.
사람 사람끼리야 기분 사납고 자기한테 해로우면 배신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배신하시겠습니까?
부처님은 분명히 필경의(畢竟依)입니다.
대의호라, 믿고 의지할 데입니다.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출처: Mail 글쓴이: 🙏참마음
https://cafe.daum.net/pokyodang/7O58/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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