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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의 첫 걸음

by 혜명(해인)스님 2018. 6. 29.


卍-신행의 첫 걸음-卍
    1. 인간은 선에 다가가야 한다.

    불교는 인간의 본성을 맑고 깨끗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무명에 싸여 있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오탁악세를 살아가면서 번뇌의 때가 묻고 탐, 진, 치 삼독으로 더렵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탐, 진, 치 삼독을 멀리하고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까요?
    불교에서는 그 첫 번째 단계로 삼보에 귀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삼보에게 귀의하는 것은 무명의 사슬을 끊고 지혜의 길로 다가서는 첫 번째 과정입니다.
    [붓다에게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율장대품)

    이 같은 삼귀의는 부처님께서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전도 선언을 하시면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지역에 가서 어떤 이를 교화 했을 때 그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바로 귀의삼보(歸依三寶)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믿음을 표현하고 불자가 되겠다는 종교적 약속이자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2.참된 귀의

    그릇된 귀의
    그렇다면 귀의란 무엇일까요?
    귀의는 'Namo'에 대한 한역으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엔가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에게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돈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권력에 의지하는 이도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한다면 참된 것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거나 가상적인 것에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과오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에 의해서 근심하며 소 있는 자는 소에 의해서 근심한다.
    진실로 의지함은 사람의 근심이다.
    의지(依)가 없는 자는 근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부경전-경집)

    여기서 '의지한다(依)'는 것은 'Upadhi'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번역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의 대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하지만 재산이나 자식, 또는 권력과 같은 것에 의지하는 것은 오히려 근심을 초래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 의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의(依) 가운데서 견실(堅實)을 보지 못하도다.](경집)

    *참다운 귀의

    인간이 무엇엔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 궁극적인 의지 처는 무엇일까요?
    붓다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진리(法-Dharma)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귀의](自歸依)

    "진실로 자기는 자기의 주인(主)이며 자기는 자기가 의지할 곳(依所)이다.
    그런고로 자기를 잘 다스려라.
    마치 상인이 양마를 길들이듯이." (법구경 380)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뿐이로다.
    다른 곳 어디에 의지할 곳이 있을 것인가.
    자기가 잘 조어되었을 때 사람들은 얻기 어려운 의지 처를 얻는 것이다." (법구경 23권.)

    여기서 '의지할 곳(依所)'이란
    나아타'Natha'라는 산스크리트의 번역입니다.
    나아타의 뜻은 '머물다', '수호자(守護者)'라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란 뜻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법에 귀의하라](自歸依 法歸依) 올바른 귀의처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기 아함부 경전에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눈앞에 두고도 이 가르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열반하시기 직전에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여기에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를 의지할 곳(依所)으로 삼아라.

    다른 사람을 의지할 곳으로 삼지 말며 법(法)을 주(洲)로 하며 法을 의지할 곳으로 삼아 다른 이를 의지하지 말라.](장부경전17. 대열반경 2, 26)

    여기에서 주(洲)는 Dipa의 번역어로 강변, 또는 뭍을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이 변해 가는 세상에서도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뭍은 언제나 그곳에 있듯이 변함없이 영원한 삶의 발판이 주(洲)인 것입니다.

    한역에서는 이러한 주(洲)를 '등을 밝히다'라는 의미인 등명(燈明)으로 의역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권력이나 돈에 의지하는 것은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혜의 밝은 빛을 얻게 되면 그와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또는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곳은 사람, 돈, 권력, 명예 같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 흐르는 강물 속에서도 흐르지 않는 주(洲)와 같이 자신과 진리에 머물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3.삼귀의

    그렇다면 의지처가 될 만한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일상적 모습의 자신에게 의지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방종한 자기에 대한 무조건적 의지는 더더군다나 아닙니다.
    [잘 통제된 자기, 마치 상인이 좋은 말을 조련하듯이 잘 조련된 자기만]이 귀의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을 의지할 만한 곳으로 조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法-Dharma)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대한 귀의를 구체적으로 체계화된 것이 다음과 같은 삼귀의인 것입니다.

    (1) 귀의불(歸依佛) :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삼귀의의 첫 번째 의지 대상은 바로 법의 구현자인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을 자신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삼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2) 귀의법(歸依法) :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존재의 참 모습을 깨달으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의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러러보며 그 가르침에 대해 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3)귀의승(歸依僧) :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법을 믿고 따르며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승가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서로 화합하고 실천에 힘쓰는 이들입니다.

    4. 진정한 귀의처는 자기 자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부처님께는 세상의 상식적인 의지 처를 부정합니다.
    사람들은 부모, 자손, 재물, 권력 등에 의지하고 그것만 있으면 뭐든지 되는 줄 알 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참된 귀의처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고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귀의는 오히려 근심을 초래하기 때문에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떠한 인격적인 존재도 궁극의 의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문이나 부처님 그 자신마저도 영원한 의지 처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나 사문들은 다만 우리들을 인도하는 스승(導師)일 뿐이지 그 자체가 궁극적 의지 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스스로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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