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사상
불교만큼 마음을 심층 분석한 철학도 없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식사상은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중관 철학은 사물을 연기에 의지한 무자성으로 파악하고 실천적인 수행을 내세워 공(空)을 시현하는 것을 중도라고 하였다. 그러나 용수의 공사상이 후세에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대승불교에서 나타난 사상이 바로 유식사상(vijnavadin)이다. 공(空)이라는 의미가 복합적인 말이긴 하지만 공이라는 단어를 통해 허무론적 느낌을 갖게 됨은 일반적인 경향일 것이다. 유식사상에서는 이와 같은 허무론적 사고를 바로잡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보다 확실한 '근거'로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흔히 불교만큼 마음을 심층 분석한 철학은 없다고 하는데 그 중에 유식사상이 최고봉으로서, 먼저 이 유식사상이 지니고 있는 논리적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유식사상의 기본경전은 《해심밀경》으로 현장(玄 )스님이 번역하였다. 이 책은 기원후 5세기경 우리나라에 《심밀해탈경》으로 번역되었다. 《해심밀경》의 가장 큰 핵심은 일체종자심식(一切種子心識)이다. 이 세상 어떠한 사물이든 마음이 빚어낸 것이라고 하는 입장이다. 반야의 공사상은 여기에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된다. 유식에서는 모든 것을 유(有)의 입장으로 본다. 공은 참다운 있음이며 이것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결국 유식도 반야의 공관(空觀)에 토대를 같이하고 있다. 다만 공을 적멸로서 이해하기보다는 묘유(妙有)의 방편설로서 해석하려는 노력이다. 따라서 유식은 일체를 만드는 마음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나를 설명한다. 마음은 세 단계로 설명되고 있다. 육식(六識) 인간의 정신적 의지 처로서 6근을 분류하고 있는데 차례로 심식의 내용을 살펴보자. ① 안식(眼識) : 눈에 의해 색을 구별하는 마음 ② 이식(耳識) : 귀에 의해 인식의 소리를 듣는 마음 ③ 비식(鼻識) : 코에 의해 냄새 맡는 마음 ④ 설식(舌識) : 입에 의해 맛을 식별하는 마음 ⑤ 신식(身識) : 몸의 느낌에 의해 촉감을 식별하는 마음 ⑥ 의식(意識) : 마음에 의해 삼라만상을 구별하는 작용 여기서 의식은 현재의 상황을 헤아리고〔現量〕, 비교· 판단하고〔比量〕, 그릇되게 판단하는〔非量〕등 아주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 육식을 통괄하는 것으로 일곱 번째 식인 마나스식(manas-vijnana)을 상정하고 있다. 이 7식은 평등하고 지혜로운 무아의 심체를 착각하여 아집 등 근본번뇌를 발생시키고 있지만 이러한 근본번뇌는 선과 악의 상대적인 작용을 끊임없이 발생시켜 업력을 조성케 하며 윤회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 위에 제8 아뢰야식(alaya vijnana)을 상정하였다. 이 8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하면서 선악업력을 여타의 식에 공급하여 발동케 하며, 모든 선악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 제8 아뢰야식은 현재의 생명체로서 내외의 현실을 전개시키는 주체가 되며 동시에 윤회의 주체가 된다. 이 세 가지 단계가 우리 마음의 구조인 것이다. 안· 이· 비· 설· 신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우리의 주관과 우리 이외의 객관이 만나는 직접적인 입장이다. 즉, 외부상황을 입수·분석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눈· 귀· 코· 입· 몸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어 객관대상을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외부객관대상을 판단하는 능력은 근원적인 마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감각기관이 사물을 판단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 실증적 예로서 유식불교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의 비유를 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물을 보고 네 가지 상반된 견해가 나올 수 있다는 논리이다. 흐르는 물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마시는 것이며, 물고기의 입장에서는 사는 집이다. 아귀의 입장에서 보면 고름이며, 천상의 존재들은 외부객관상황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고 한다. 이처럼 똑같은 물을 보고 서로가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은 그 외부객관대상에 따른 마음의 변화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사물을 대하는 모든 시각은 다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보는 이의 마음의 태도에 따른 것이다. 결국 이 세상만사가 유식불교의 입장에서는 주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식사상은 직접적인 인간 내면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이기에 매우 섬세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최전방에 있는 척후병 역할이기에 전오식(前五識)이라고도 한다. 그 전오식을 좌우하는 육식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은 이기(利己)성향이다. 즉, 모든 것을 나의 이익과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은 집요한 에고의식이다. 일곱 번째 마나스식은 우리들 마음 밑바닥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육식을 좌우한다. 마나스식이란 본래 지니고 있던 마음바탕을 외부대상에 투영시켜 그를 다시 영원한 존재라고 믿게 된 이 세상의 주객을 전도시킨 입장이다. 이 제7식은 자신의 망령된 생각으로 외부대상에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그것이 정말 있게끔 되어버린 경지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마나스식을 잘 계발하기만 하면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매사를 마음먹기에 따라서'라고 할 때 이것이 바로 제7식 마나스식이다. 이 7식의 올바른 조정에 의해 우리들은 우리의 생애를 길게도 혹은 짧게도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도 이러한 이치인 것이다. 만약 무더운 여름철, 외투를 입고 난롯가에서 가장 싫은 사람과 한 시간을 보낸다고 가정하자. 반면에 그 한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시원한 해변가에서 보낸다고 하자. 그 경우 어느 한 시간이 더 길겠는가. 결국 한 시간이라는 객관적 시간의 길이는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에 충실한 것은 결국 마나스를 계발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제8 아뢰야식은 현대 심리학에서의 '집단무의식'이라는 용어와 동일하다. 불교는 '선(善)이다, 악(惡)이다'라고 말하는 이분법적 등식을 뛰어넘는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상태에서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다는 포용성을 지니고 있다. 아뢰야식은 바다와 같다고 비유한다. 바다에는 참으로 많은 보배들이 들어 있다. 산호, 진주 등이 감추어진 바다에 풍랑이 일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인간의 마음도 그와 같다. 평온한 상태일 때에는 무궁무진한 진실이 가득하지만 번뇌 속에 시달릴 때에는 결국 어두움만이 가득한 것이다. 이 제8식은 전생의 경험까지를 포괄한다.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라는 뜻에서 함장식(含藏識), 근본식(根本識)이라고도 한다. 무한한 바다인 제8식을 이해하고 깨달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반야공을 체득하는 의미이다. 3상(三相) 마음의 세계에 의해 현현되어진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세 가지의 모습을 3상이라고 한다. 이는 우주 속에 존재할 수 있는 세 가지 형식이다. ① 잘못된 견해로 집착하여 생긴 모습이다(遍計所執相). 본디는 없던 것인데 망령과 집착으로 인해 있다고 생각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경전에 토끼 뿔의 비유가 있다. 토끼에겐 뿔이 없지만 긴 귀를 뿔이라 착각하는 수가 있다. 또한 어떤 이가 어두운 밤길에서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 느껴 도망을 쳤다고 하자. 다른 길로 돌아서 가다가 도둑을 만나 소지품을 몽땅 잃었다. 그는 분명 그날은 재수가 없었던 날이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새끼줄을 뱀이라고 한 변계소집으로 실책을 범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로 변계소집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흔히 망상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헛된 꿈을 설정해 놓고 그에 부합되지 않는 현실을 한탄한다. 그 한 생각, 헛된 꿈결이 바로 변계소집이다. 인간은 그 그릇된 생각을 실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끝없는 번민 속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②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모습이다(依他起相). 이는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직접· 간접적인 요인에 의해 생성·소멸을 거듭함을 말한다. 우리는 눈앞의 모든 것을 의타기적으로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의 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의 인연이 잘 결합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인연인 것이다. 서로 의존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공무(空無)이다. 자연의 순환, 우주의 섭리, 질서 등은 모두 이 의타기의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③ 실답고 둥근 모습으로 반야공의 세계를 의미한다(圓成實相). 원성실상이란 우주의 근원으로, 삼라만상을 생성하는 본질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고요함 그 자체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사물에 내재되어 있다. 용수의 관점에서 표현한다면 진제(眞諦)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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