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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스러운 가르침-청화스님

by 혜명(해인)스님 2021. 12. 21.



가장 행복스러운 가르침-청화스님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徹頭徹尾)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고, 또 진리 그대로 조금도 굴곡이 없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과학, 가장 궁극적인 철학, 가장 행복스러운 종교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고, 누구나가 다 그러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 자체 이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어떻게 하여야 행복스러울 것인가? 자기 마음의 본질도 훤히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또는 미워하는 사람이나 사람의 본질도 알고, 또는 우리가 현대인들이 그렇게 숭상하는 물질의 본질도 알고,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막힘없이 알아 버려야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야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자기 갈 길도 모르고, 가장 소중한 자기 존재 파악도 못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행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간적인 행복, 찰나 무상한 그런 행복, 이런 것은 모르거니와 이른바 적어도 불멸의 행복, 영생불멸한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물질적인 차원, 우리 중생이 보는 그런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 그러기에 부처님같이 투철한 본질적으로 보는 안목에서 볼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모두가 고생 바다밖에는 아닙니다.

    ​ 어느 종교든 근본적으로 신앙의 그 목표 의식이 모호할 때는 참다운 신앙이 못됩니다. ​

    이른바 불타관(佛陀觀)이라, 불자는 먼저 확실한 불타관을 확립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역시 그냥 방편적인 그런 가르침이 아니라 본질적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금생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고난을 뿌리부터서 구제할 수 있는 그런 일승법문(一乘法門) 대승법문(大乘法門), 이런 법문으로 해서 자기의 불교적 인생관을 확립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대와 같은 그러한 뿌리 깊은 문명의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현대병이 지금 얼마나 무겁습니까? 물질병 또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사상병 말입니다. ​

    현대는 종교, 철학, 과학, 예술 등 인간의 관념의 형태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가령 종교 하나만을 예를 들어본다 하더라도 어느 종교에서는 하나님은 저기가 있고 나는 여기가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나를 창조했을 하나님은 현재 저기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또 자기 남편은 저기 있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종교는 모두가 이와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합니다.

    ​ 하나님 따로 사탄 따로 있으므로 따라서 사탄은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사탄은 사탄인 것이지 악마나 마귀가 하나님은 될 수가 없다고 합니다. ​

    남을 사랑하라. 남을 위해서 봉사하라. 여러 가지 캠페인이 지금 성행하고 있습니다.
    또는 자연을 보호하자. 자연을 오염시키지 말자. 자연 파괴나 환경오염이 우리 인간 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세계적으로도 떠들썩하고 굉장한 큰 보호 운동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환경 운동에 같이 동참하여야 할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필수적 의무인 것입니다. ​

    그러나 그런 문제도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근본적인 해결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나 따로 있고, 남 따로 있고, 이런 인생관에서는 자기의 편의와 자기 이익을 먼저 앞세웁니다. 또 자연 따로 있고 나 따로 있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기 있는 산은 산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 잘 모르는 분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법문이 있으니까 우리 중생이 보는 산은 별도로 그렇게 산은 산일 따름이고, 물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런 물일 따름이다. 이렇게 잘 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

    그러나 연기법이라 하는 부처님의 근본도리, 이 도리는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으로 볼 때는 산 따로, 물 따로가 아닙니다.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닙니다. 동일한 생명입니다.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이니까 차이가 없어야 되겠지요. ​

    좋다, 궂다, 많다, 적다. 그러한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어떠한 것이나 완벽하게, 자비, 지혜, 능력, 행복, 어떠한 것이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 그 자리에서 그 자리의 기운 따라서 일어나는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 따라서 산도, 물도, 달도 거기서 왔습니다.
    아무리 표독한 사람도 아무리 선량한 사람도 모두가 거기서 왔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달도 나와 둘이 아닙니다.
    너와 나도 둘이 아닙니다.
    물과 나도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 그러기에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법성(法性) 자리에서 볼 때는 우주는 중중무진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모두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산을 함부로 하면 그만큼 우리가 보복을 받는 것이고 물을 함부로 해도 우리가 보복을 받습니다.

    ​ 오늘 여기 오신 불자님들께서는 다른 것은 미처 모르신다 하더라도 방편설이 아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진여연기(眞如緣起) 연기법의 도리를 항상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기도가 되고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 가사 우리가 "무(無)"라 하는 무자(無字) 화두를 든다고 생각하여 봅시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께서 무라고 하셨으니까 무 하고 나아가면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견성오도(見性悟道)가 되겠지. 오랜 세월동안 하다보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덮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 덮어놓고 나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전제로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나오셨으면 우리가 더듬고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해서 길을 발견하여야 하겠지요. 그러나 세존이 나오신 뒤에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낭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신(信) 하면 됩니다.

    ​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이라! 그러기에 믿은 이것이 모든 보배 가운데 제일이라 합니다.

    ​ 자기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생명자리, 이 자리는 우주에 충만한 자리요.
    완벽한 자리인데, 그 자리로 부터서 잠시간 자기가 있고 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 사람은 나한테 해코지해서 지독하게 밉다. 누가 안보면 당장 죽이고 싶다.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일이 허다히 많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도 미운 때는 죽이게 되고 말입니다. 중생이라 하는 것은 그런 조건만 되면 자기 부모도 죽입니다.

    ​ 조건이 조금 좋으면 친하게 사귀다가도 조건이 좀 사나워져서 자기한테 손해가 온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친구도 형제간도 배신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위대한 정객들을 봐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에 맞아 합당 할 때는 서로 껴안고 악수하고 하지만 감투를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잔인하게 배신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인 것입니다.

    ​ 그러나 설사 곧 죽일 듯이 밉다 하더라도 저 사람도 생명의 본질은 근본 마음 바탕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철학적으로 생각이 될 때는 그 사람을 끝까지 지독하게 지나치게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청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