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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상락아정(常樂我淨)-청화스님

by 혜명(해인)스님 2022. 5. 16.

상락아정(常樂我淨)-청화스님

그리고 진여불성 이것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공(空)이 아닙니다.
허두에서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진여불성 이 자리는 다만 물질이 아니고, 텅 비어 있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진여불성 자리는 상덕(常德)이라. 영생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순수한 생명 이것은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또는 락덕(樂德)이라. 안락무우(安樂無憂)라. 조금도 불행이 없습니다. 변치 않고 일체 공덕을 다 갖추었거늘 그 자리에 불행이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는 고통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안락만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덕(我德)이라. 나 아(我)자, 큰 덕(德)자, 아덕 이것은, 우리 중생 이것은 망아(妄我)고 이것은 이른바 소아(小我)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잘 못 본 것이 사람들은 이것이 나란 말입니다. 견성오도를 미처 못한 사람들은 항시 자기라 해도 망령된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참다운 자기, 우주의 진여 불성과 온전히 하나된 자기, 이런 자리에서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위시해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불자님들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덕, 이것이 그냥 흐지부지한 보통 덕이 아니라 아는 것도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부리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육조 혜능(慧能) 스님이 유식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닦아서 마음 깨달아서 마음이 온전히 본래면목 자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은 신통 부사의(不思議)해서 일체 것을 다 알 수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제한을 말으십시오.

​그런데 하물며 나는 어디가 아프다. 부처님 법은 그런 아프고 조금 어디가 거북하고 이런 것을 치유할 수 없는 그런 시원찮은 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완벽한 법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금생에 내가 설사 잘못 살아서 허물을 많이 범했다 하더라도 내 불성만은 내 본 성품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흠절이 없다. 완벽하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그 즉시에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동시에 우리 잔병은 다 떨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 똑같은 불성이거니,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 사람도 꼭 자기를 좋게 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 같이 60kg, 50kg 그런 무게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공인데 공이 무슨 무게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대류권 내에서 우리 중생들이 업장으로 무명심에 가려서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육조 혜능 대사의 게송(偈誦)아닙니까.
본래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 어느 곳에 번뇌(煩惱)가 있고 티끌이 있을 것인가. 우리 중생이 억울하게도 무명심 때문에 잘못 봐서 밉고 곱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퇴폐(頹廢)하고 반목(反目)하고 분열(分裂)하고 이대로 사실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바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조금도 오염이 안 되었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본래로 극락세계인 것을 본래 부처인 것을 중생들이 잘 못 보고 스스로 자기를 구속하고 고생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안타까워서 중생 제도 할려고 도인들이 교시하는 것이지 바른 차원에서는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오늘 죽어도 극락세계 내일 죽어도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자기 몸 허망 무상한 본래로 있다고 할 수 없는 가상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운문 스님한테 가서 어려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렇게 문법을 하니까,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요, 시시시호시(時時是好時)라.
날마다 좋은 날이요, 때때로 좋은 때라.
어려운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날마다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좋고, 궂고 여러 가지 고난이 많겠지요. 그러나 진여불성 자리, 반야 바라밀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의 견해인 반야 바라밀의 경계에서는 항시 좋단 말입니다.

​언제나 제 말씀이 너무나 길어지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될수록 제 마음을 제 말씀을 간출서 줄여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