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 이란 자신을 낮추어 남을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나를 낮추는 하심(下心)은 스스로를 비워
스스로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뿐 아니라,
남을 우러르고 존경하여 편안하게 해주는 일 입니다.
불교 경전 '금강경(金剛經)'에서 이르기를
'상이 없으면 부처요.
상이 있으면 중생이다(無相卽佛 有相卽衆生)'라고 합니다.
이는 무상(無相)은 즉 불(佛)이요
유상(有相)은 즉 중생(衆生)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은 늘 상에 얽매이고
아상(我相)이 강하기 때문에 하심(下心)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하지요.
아상이 강하면 남을 돌아볼 줄 모르고,
아상이 강하면 남에게 배려할 줄 모르게 됩니다.
복이란 두 손을 모아 비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사람에게로 오는 법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깔아뭉갤수록 아상(我相)은 점점 높아지기 마련이며,
'나는 똑똑하다.' '나는 잘났다' 고 하는 자만심이 아상을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부자다. 나는 높은 지위에 있다.
나는 너보다 낫다'고 하는 일상의 생각들이 바로 아상(我相)인 것이지요.
너에 대한 나의 상대적인 우월감이 아상(我相)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린 아상(我相)의 산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나의 고개를 숙이는 것이 하심(下心)입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아상은 무너지고 하심(下心)은 피어나지요.
내세울 것 없는 마음이 곧 하심이지요.
내세울 것 없는 것은 곧 주장할 것이 없는 것이고,
주장할 것 없는 것은 곧 아는 것이 없는 것이며.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곧 집착할 것이 없는 것이고,
집착할 것이 없으니 언제나 텅 비어서 걸릴 것이 없지요.
걸릴 것 없는 마음 그것이 곧 하심(下心)인 것입니다.
또 진리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한 것이 바로 하심(下心) 이지요.
아는 것이 있으면, 그 아는 것을 붙잡아 집착하고,
그 아는 것을 주장하여 내세우니 언제나 시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이런 마음을 아만심(我慢心)이라 하는데
아만심이 있으면 하심(下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또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은 반드시 하심(下心) 이어야 하지요.
바르게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본래 마음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마음이라는 법은 본래 분별할 만한 정해진 물건이 없으니
마음에 관해서는 알려고 하여도 알것이 없지요.
‘불가사의하다’ 느니, ‘이해가 안 간다.’ 느니 ‘언어에 장벽이 있다’ 느니
‘얻을 법이 없다’ 느니 ‘이름 붙일 법이 없다’ 느니
‘분별된 모습은 모두 허망하다.’ 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마음이라는 법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깨닫기 전에도 마음은 알 수가 없는 것이고,
마음을 깨닫고 난 뒤에도 마음에 대한 알음알이(지식)는 없는 것이지요.
마음을 깨닫기 전에는 분별망상에 사로잡혀
망상 속에서 마음과 경계를 여러 가지로 분별해 보지만
이것은 모두 망상 속에서 망상에 막혀 헤매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두고 중생이 미혹(속아서 헤맨다)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란? 문득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망상이 사라지고
막힘 없이 통하여 언제나 마음의 활동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깨달음에서는 어디에도 막힘 없이
언제나 생생하고 뚜렷하여 조금의 의심도 없을뿐더러
어떤 알음알이도, 정해진 지식도 내세울 견해도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깨닫기 전에 하심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있으므로 아는 것이 없는 하심이요.
깨달은 뒤의 하심은 막힘없는 밝음 속에 있을 뿐 아는 것이 없는 하심이지요.
그러니까? 깨닫기 전에는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하심(下心)할 수 밖에 없고,
깨달은 뒤에는 알 수 있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심(下心)할 수밖에 없다고 했어요.
올바른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심(下心)인 것이지요.
낮은 곳에 머무는 것이 하심(下心)이라 했어요.
모든 사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요.
그래서 낮은 것은 높은 것과 조화를 이루지요,
이것을 자연이라 하는데 자연은 높은 곳에서 낮아지려고 만 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만 하고,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지요.
자연의 원리를 배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뒤에 두면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며 남을 앞에 두고 자신을 뒤로하는 것은
대인군자의 마음이라 할 수 있어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자신을 남보다 앞에 두고 자신을 남보다 위에 두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하심(下心)의 마음이지요.
존경이란 말은 하심(下心)이라 할 수 있지요.
사람이 자신을 낮추지 않고 남을 존경하기란 어려운 법이지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뒤에 두고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마음은
스스로를 높이는 길 이지요.
그러므로 하심이란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귀중히 오래도록 보전하는 길인지도 몰라요.
하늘은 높아요. 그리고 땅은 낮지요. 사람은 본래 하늘과 같아요.
그래서 사람을 받드는 마음은 지고한 진리(眞理)라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을 잘 받드는 마음은 바로 하늘을 받드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을 극진히 받드는 마음이 하늘을 받드는 마음이고
이것이 즉 하심(下心)인 것이지요.
천지간에는 나보다 훌륭하고 나보다 도(道)와 덕(德)이 높은 사람들이 많아요. 나보다 도와 덕이 높으면 당연히 그를 존경(尊敬)해야 하지요.
그러나 설령 도와 덕을 이루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지극히 존중해야 하지요.
그래서 군자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이라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존귀(尊貴)한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는 사람이지요.
사람은 본래 신성(神聖)이라 했어요.
신성으로서 사람은 정말 귀중한 존재이지요.
허나 사람들은 사람이 본래 신성인 줄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있지요.
사람이 본래부터 존귀하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존경하게 되지요.
사람을 존경하는 지극한 마음이 곧 하심(下心)인 것이지요.
짐승들도 자신을 존중해주면 자신을 존중해주는 줄 아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 자신을 존경해주는 사람을 모를리가 없지요.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경해야 하지요.
그러면 평생동안 상대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원망을 받을 일이 없어요.
하심(下心)에 머물고 있으면 자신에게 모든 것이 흘러온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하심(下心)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함부로 업신여긴다는 말은 아니지요.
자기 자신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을 더욱 존중하라는 뜻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지요.
이렇듯 소중한 자신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 하지요.
자만심(自慢心)과 자존심(自尊心)이 있지요.
자만심(自慢心)은 스스로 차서 넘친다는 뜻이지요.
자존심(自尊心)은 스스로를 존경한다는 뜻이구요.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어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무엇이든 지나치면 아니함 만 못하다는 뜻이지요.
다시 말해 자만심(自慢心)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지요.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아직 교양이 부족한 까닭이지요.
그러므로 도리와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겸허히 낮추어야만 하지요.
또 자존심(自尊心)이란 스스로를 높이고 남에게 굽히지 않는 마음이지요.
자기 자신만 옳고 자기 자신만 내세워 스스로를 낮출 줄 모르기에
자존심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음이 꽉 차 비어있는 곳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지요.
그것은 어찌 보면 한없는 고난의 길이요.
외롭고 쓸쓸한 자멸의 길인지도 몰라요.
남을 잘 대접하는 것이나 남을 존경하는 것이나
남을 잘되게 하는 마음은 다 같은 하심(下心) 이지요.
남을 잘되게 하려는 마음은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했어요.
내게 소중한 것. 내게 귀중한 것을 남에게 조건 없이 주는 마음이
바로 하심(下心)이지요!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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