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중도 실상 바로 알면 부처님을 본다.

by 이初心 2024. 10. 24.

    🙏중도 실상 바로 알면 부처님을 본다.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았다고 선언한 이후 불교의 모든 사상은 중도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불교 2600년 역사에서 나타난 주요 사상을 중도로 회통시켜 보자.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져 정립된 천태종의 천태사상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를 핵심으로 한다. 이 쌍차쌍조가 바로 중도이다. 쌍차쌍조란 ‘양변을 차단하고(쌍차) 양변을 비춘다(쌍조)’는 뜻인데, 풀어 보면 나-너, 옳다-그르다 대립하는 양변에 집착을 떠나되 양변을 다 아우르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집착하고 나와 대립하는 상대는 그르다고 미워하고 욕한다. 이렇게 해서는 일시적인 승부만 있지 평화와 행복은 요원하다.

    평화와 행복으로 가려면 나와 상대의 입장을 다 버리면서도 상대와 내 입장을 다 아우르는 중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쌍차쌍조이니 바로 중도를 말한다.

    화엄종의 화엄사상에서는 중도를 ‘이사무애(理事無碍)’로 표현한다.
    물론 너무나 화려하고 방대한 화엄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사무애’라는 말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사무애란 ‘이치와 일이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理)와 사(事)란 말에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나왔다.
    즉, 이치를 추구하는 수행 분야와 일을 다루는 분야를 말하는데, 여기에 승(僧)을 붙이면, 이판승-사판승이 된다.

    흔히 불교계에는 이판과 사판으로 구분을 많이 한다.
    참선, 염불, 간경 등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을 이판승이라 하고 종무를 전문으로 하는 스님을 사판승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로 볼 때, 이런 구분은 옳지 않다.
    이판과 사판 어느 한 편에 치우침이 없이 서로 원융무애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도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길이다.

    화엄십찰로 개산하였다는 가야산 해인사의 법당이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적광전이라 하는데, 이 적광(寂光)도 중도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 마음에 양변의 집착을 비우면 고요한 적(寂)이 되어 지혜의 빛인 광(光)이 난다.
    적광이 바로 중도로 존재하는 우리 마음을 말한다.
    중도가 부처님 마음인데 그 마음을 적광이라고도 표현한다.

    선종에서도 가장 많은 도인을 배출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표 종단 조계종과 일본에까지 큰 법맥이 전해진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중도를 ‘살활(殺活)’로 표현한다.

    양변의 번뇌 망상은 죽이고(살), 지혜는 살린다(활)는 것이다.
    선도 중도이지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부처님이나 조사의 깨달은 마음은 하나다.
    중도의 마음이다.
    중도의 마음은 일체의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지혜로 밝은 마음이다.

    이런 중도의 마음을 조사들은 흔히 ‘운개일출(雲開日出)’로 표현한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번뇌라는 구름이 걷히면 지혜가 나온다.
    번뇌를 버리면 지혜가 저절로 나온다.
    우리 마음에 욕심과 화, 어리석음을 버리면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대자유인, 영원한 행복인 부처님이라 한다.
    우리 범부들은 흔히 ‘비워라’ 하니 무조건 남에게 양보하고 져주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더욱더 나와 내 것에 집착한다.
    그러는 한 행복할 수가 없다.
    마음에 집착하는 생각, 분별망상을 놓아버리면 지혜의 빛이 저절로 나온다.
    이와 같이 번뇌망상을 비우는 마음을 행하는 것이 참선(參禪)이다.

    🙏박희승(한국문화연수원 교수)

    출처: 🙏불교신문
    출처: 글쓴이: 🙏향상일로
    https://cafe.daum.net/seojinam/cYbw/203

중도 실상 바로 알면 부처님을 본다.mp3
9.6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