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허(呑虛) 스님
좋은 질문이십니다.
종교를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인데, 그것을 부정하면 결국 자기 부정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東洋思想(동양사상)의 견지에서 볼 때 종교는 종교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主體性(주체성)인, 다시 말하면 우주와 인생의 핵심인 그 밑바탕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本旨(본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기타의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문제는 '유치원 학생을 지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우주의 주체가 무엇인지 세상 사람들은 모릅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가 아닙니다.
우주의 주체는 우주 아닌 자입니다.
즉 우리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時空(시공)이 끊어진 자리이지요.
왜 시공이 끊어졌느냐. 과거의 생각은 이미 滅(멸)했고 미래의 생각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의 생각은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공이 끊어진 이 정신(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간밤 꿈에 一點(일점)도 안 되는 공간 위에 누워있는 肉身(육신)이 10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수만 리를 거닐면서 70~80년을 살았습니다.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현실과 다른 것이겠습니까.
여전히 산은 높고 물은 깊습니다. 불은 뜨겁고 물은 찹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보는 우주가 眞(진)이라면 꿈속에서 보는 우주도 眞(진)일 것이고 꿈속에서 보는 우주가 헛것이라면, 현실에서 보는 우주도 헛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꿈속에서 보는 우주만을 眞(진)으로 여기기 때문에 1백 년도 못 사는 몸으로 한없는 妄想(망상)을 좇아 내일 공동묘지에 갈지라도 오늘 富貴功名(부귀공명)을 한다면 집착하고 매달리는 것이 凡夫(범부)가 아닙니까.
꿈에 관련된 古事(고사)를 비유하여 말씀드려 보지요.
1천 5백 년 전 漢(한) 帝(훤제) 때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국내에서 해몽을 제일 잘 하는 자를 불러 시험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꿈을 날조하여 말하기를 "내가 간밤 꿈에 궁전 처마 끝의 기왓장이 鸞鳥〔(난조; 鳳凰(봉황)의 별명〕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무슨 꿈인가?"고 했습니다.
해몽자의 답변이 "큰일 났습니다. 폐하. 궁전에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아뢰는 말이 "폐하, 궁중에서 싸우다 한 놈이 죽었습니다."고 했습니다. 황제가 하도 기특하여 "얘야, 나는 네가 하도 해몽을 잘한다고 하기에 시험 삼아 꿈을 하나 날조(捏造 :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양 거짓으로 꾸밈)해 말했는데 어찌 그렇게 잘 맞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해몽자가 대답하기를 '夢是神遊(몽시신유)라고 했습니다.
즉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폐하가 한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 벌써 하나의 꿈이 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꿈이 있고 꿈이 있으므로 우주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聖人(성인)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面目(면목)을 각파했기 때문에 꿈도 우주도 없는 別天地〔별천지; 時空(시공)이 끊어진 세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聖父(성부)', 儒敎(유교)에서는 '中(중: 불성의 다른 이름)', 불교에서는 '佛(불)'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聖人(성인)은 우리의 현실을 간밤 꿈으로 覺破(각파: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난 자취가 없음을 아는 것)한 것입니다. 佛(불)이란 覺(각)이란 말인데, 覺(각)이란 것은 현실 우주가 간밤 꿈으로 보아 환상으로 있는 것이요, 實有(실유)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보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성인)은 우주라는 苦海(고해)를 완전히 건넌 것입니다.
중생은 苦海(고해)를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此岸(차안)이라 하는 동시에 中流(중류)에서 허덕이고 있고, 聖人(성인)은 완전히 건넜기 때문에 彼岸(피안)이라고 합니다. 苦海(고해)의 씨앗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을 타파하는 것은 苦海(고해)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한 생각의 씨앗을 타파하는 방법은 道(도)를 보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凡夫(범부)는 일초 일분도 생각이 머물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라 하는 것이요,
哲人(철인)은 道(도)자리를 보아 원래 생각이 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聖者(성자) 또는 覺者(각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파리가 곳곳에 가서 붙지만 불꽃 위에는 붙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중생의 망상이 어디든지 다 가서 붙지만 道(도)자리에는 붙지 못하는 것입니다. 道(도)자리를 보면 苦(고)의 씨앗은 송두리째 빠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道(도)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연구하느니, 종교를 믿느니 하는 것은 철학이나 종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이 苦海(고해)를 벗어나느냐? 主觀的(주관적)인 견지에서 연구하고 믿어보는 것입니다. 철학과 종교를 떠나서 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다면 철학과 종교는 하나의 갈포 (옛날 제사지낼 때 쓰는 위패인데 짚으로 개 모양을 만들어 쓰고 내버리고 마는 것)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서양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칸트도 철학적으로 思索(사색; 여러 갈래로 찾는 것) 冥想(명상; 연구할 한길을 얻은 것) 침묵[三昧(삼매)와 같은 物我兩忘(물아양망)의 경지] 冥想[명상; 三昧(삼매)속에서 홀연히 알아지는 것]을 거쳐 우주 萬有(만유)의 認識主體(인식주체)를 純粹理性(순수이성)이라고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칸트철학의 결론은 認識境界(인식경계)와 認識主體(인식주체)의 절대적인 相反性(상반성)이 一體(일체)위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학의 입장에서 볼 때 칸트의 최종적인 결론은 미흡한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모체인 순수이성을 파악할 때에 우주만유가 순수이성화(化)되어야 하는데 칸트는 그런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동양학적인 견지에서는 우주만유의 모체를 파악할 때에 그 모체에서 일어난 우주만유의 모체화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一本萬殊(일본만수) 萬殊一本(만수일본)'(한 근본이 만 가지 다른 것이 되고, 만 가지 다른 것이 한 근본이다.)이라 하며, '物物(물물)이 名具一太極(명구일태극) 統體一太極(통체일태극)'(우주만물 하나하나가 각각 太極(태극; 우주의 핵심체)의 진리를 갖추었고 우주전체를 통합해보면 太極(태극)의 진리일 따름인 것이다) 이라고 했습니다.
동양의 三敎聖人(삼교성인)들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자기의 인품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사람 사람의 마음속에 본래 갖추어 있는 우주의 핵심체인 '太極(태극)의 眞理(時空이 끊어진 자리)를 소개해 주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천당 지옥의 유치원 학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천당에 가느니, 지옥에 가느니 하는 문제는 因果法則(인과법칙)의 사실이지만 三敎 聖人(삼교 성인)이 인류에게 가르친 교리는 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요.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깨달아 이 세계가 그대로 極樂化(극락화)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聖人(성인)의 가르침이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이겠습니까?
오직 자기가 자기 주체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다면 자기의 주체를 부정하여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탄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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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탄허 스님 대담(선우 휘 : 소설가)
▶탄허 스님(呑虛·1913∼1983)은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불승으로는 유일하게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사상을 종합하고, 회통한 장본인이다. 생전 그는 유학자로서 불교에 해박했고, 불승으로서 유가와 도가의 철학에 통달했다.
무엇보다 탄허가 남긴 대표적인 업적은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이하 화엄경)을 우리말로 간행한 일이다. 1956년 시작해 9년 반만인 1966년 탈고했다. 하루 14시간씩 200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적어가며 번역 작업에 매달렸다. 이렇게 남긴 원고지 분량만 약 6만2천500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