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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佛陀)와 불전(佛傳)-석가족의 나라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3.


-석가족의 나라-
    1. 석가국의 실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에 의해 창시된 종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인도 동북부에서 기원전 6세기 혹은 5세기 경에 활약했던 분입니다. 그는 북인도에서 네팔에 이르는 지방에 있던 석가국에서 태어났지만, 출가하여 중인도 갠지스강 남쪽의 마가다(Magadha)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한 여러 지방에서 수행을 하여 35세가 되던 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는 붓다의 조국인 나라 이름[國家名]을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를 국왕, 즉 슛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라고 칭하고, 그의 어머니를 마야(Maya, 摩耶) 왕비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의 어린 시절을 말할 때 태자(太子)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붓다가 속했던 나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붓다의 고국인 석가국이 큰 나라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가능한 석가국에 대해 좋게 묘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석가국은 붓다 당시 정치적으로 주권을 가진 독립적인 국가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미 붓다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꼬살라국에 예속된 작은 영토의 자치주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으로 엄격히 말해서 석가국이라 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다만 편의상 석가국이라 지칭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고향, 사캬족(석가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오직 불교도의 저작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인도의 정치사에서 석가국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석가족의 나라는 바흐라이치(Bahraich)와 고라크뿌르(Gorakhpur) 사이 네팔의 접경에 인접해 있는 여러 주들의 동북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경전들의 서두에 나옵니다. 경전들에서는 수도 까삘라밧투(Kapilavatthu, Skt. Kapilavastu, 迦毘羅城)와 석가족의 여러 마을 혹은 군구(郡區), 그리고 꼬살라(Kosala)국의 수도 사왓티(Savatth , Skt. Sravasti, 舍衛城)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것만으로는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대한 정보는 세 가지 자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석서와 그 주석서에 기초를 둔 편찬물들에 기록된 전통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는 인도 성지(聖地)를 직접 방문했던 중국의 순례승, 즉 법현(法顯, 399-414 A.D.), 현장(玄奘, 629-645 A.D.) 등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것입니다.

    2. 석가국의 지리적 위치

    석가족의 근거지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였습니다. 까삘라밧투를 중국의 역경가들은 가비라성(迦毘羅城)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붓다의 고향이 굉장히 큰 고대 도시의 성(城)으로 연상하기 쉽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대한 성이었는지는 의문이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더라도 웅장하고 화려했던 성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실제로 이 까삘라밧투가 정확히 어디인지에 대해서 밝혀내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조사와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었던 법현과 현장의 기술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기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땅을 밟은 구법승(求法僧) 법현(法顯)이 까삘라밧투를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佛國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동쪽을 향해 1요자나(약 9마일) 남짓 가면 까삘라밧투에 이른다. 성(城)안은 왕도 백성도 없고 황폐하여 다만 얼마간의 승려들과 민가가 수십 호 있을 뿐이었다."

    또 7세기 경, 저 현장(玄奘)이 그곳에 갔을 때는 더욱 황폐해서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어느 곳에 성이 있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장은 석가족의 수도 까삘라밧투는 사왓티(舍衛城)에서 동남쪽으로 약 5, 60리 떨어져 있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나서 19세기 말 경에 영국의 탐험가 커닝엄(Cunningham)이 여러 문헌을 섭렵하고 자신이 직접 답사하였으나 까삘라밧투라는 이름의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 빈센트 스미스 등의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윤곽은 드러나 있습니다. 스미스씨는 "비록 법현이 보았던 거의 모든 성스러운 장소[聖地]를 현장 또한 보았다. 현장은 여러 가지 다른 부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였는데, 두 기록자들이 같은 장소를 묘사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매우 다르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스미스씨에 의하면 법현이 보았다고 하는 까빌라밧투는 빠다리아(Padaria) 남서쪽 9말일 지점에 있는 삐쁘라바(Piprava)였고, 현장이 보았다고 하는 까삘라밧투는 서북쪽 14마일 지점에 위치한 띨라우라 곳(Tilaura Kot)이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러한 자세한 지리적 사항에 대해서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은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며, '밧투(vatthu)'란 '지방' 또는 '지구(地區)'라는 말입니다. 까삘라밧투는 까삘라뿌라(Kapilapura, 迦維羅弗羅)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까삘라밧투라는 지명이 까삘라 선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삘라 선인은 전설적 인물이므로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까삘라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또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설명이 꼭 맞는 것인지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의 시조는 이크슈바꾸(Ikshvaku, Okka ka, 甘蔗王)라고 합니다. 옛날에 이크슈바꾸, 즉 감자왕(甘蔗王)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리야족의 태양계 씨족의 첫 왕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남오녀(四男五女)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젊은 왕비가 왕자를 낳자, 이 왕비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 싶은 생각으로 왕의 환심(歡心)을 사서, 그 네 왕자를 국외(國外)로 추방(追放)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네 왕자들은 다섯 왕녀(王女)들과 함께 북쪽 히말라야산 기슭까지 가서, 까삘라(Kapila)라는 선인(仙人)이 수도하고 있던 근처에까지 가서 정착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혈통을 존중하는 생각에서 장녀를 어머니로 삼고, 사왕자(四王子), 사왕녀(四王女)가 서로 혼인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크슈바꾸왕은 뒤에 왕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을 찾아다니다가 이러한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나라 일을 잘 시작했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잘 했다'는 뜻을 가진 '사캬'라는 말이 이 네 왕자의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서울이 까삘라 선인의 암자(庵子)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 서울을 까삘라밧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나라에 관해서 후대(後代)의 중국 순례승(巡禮僧)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토지는 비옥한 편이며, 농사를 짓되, (적당한) 시기에 파종(播種)을 한다. 사계(四季)의 운행(運行)은 규칙적이며 (주민의) 풍속은 화창(和暢)하다."

    이 지방에서는 지금도 벼농사를 하고 있는데, 석가 당시에도 논농사를 지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석가의 부왕(父王)의 이름을 숫도다나(깨끗한 쌀, 淨飯)라고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석가국의 정치적 위치

    석가족의 나라는 전체 인구 백만 정도의 작은 나라였다고 합니다. 이 종족의 일부는 로히니(Rohi ) 강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을 꼴리야(Koliyas, 拘利)족이라고 부릅니다. 석가족의 수도는 까삘라밧투였고, 꼴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Devadaha, 天臂城)였습니다. 이 두 종족 사이에서는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대체로 친밀한 관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붓다 시대의 정치체제는 크게 두 가지, 즉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와 공화제(共和制)가 있었습니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Vajjis)과 말라족(Malla s)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몽골계]는 공화제로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석가족과 꼴리야족은 비아리야계 종족이었으나, 이미 아리야 계통의 전제군주 국가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貴族的)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合議)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하였습니다.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대전제왕국(大專制王國)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가다왕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群小國家)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석가족의 나라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석가족과 꼴리야족이 살던 지대는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으로 로히니강(江)을 비롯해 하천(河川)이 많고, 지미(地味)도 비옥(肥沃)하고, 목축(牧畜)에도 적당하여 사람들이 참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석가 일가(一家)의 가문(家門)의 이름을 고타마(Gotama, 喬答摩)라고 했는데, 그 뜻은 '가장 훌륭한 소' 또는 '소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 자'란 의미이므로 이 이름도 역시 석가족이 농업과 목축을 주로 하는 종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지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석가족의 모든 활동은 언제나 꼬살라국에 의해 감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석가 왕국은 꼬살라국과 비교하면 너무나 작았습니다. 석가족은 전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울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당시 꼬살라국은 가장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꼬살라국이 석가족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기를 허용했을지라도, 그것은 섭정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석가족은 경제, 통상과 재판에 있어서 만은 자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석가족이 독립을 원하긴 했지만 대군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독립을 이룩할 수 있었겠습니까? 꼬살라국도 물론 그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

    석가족은 오직 꼬살라국에서 허가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독립으로 가득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캇띠야(Khattiya, Skt. Kshatriya)'나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개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회의에서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입니다.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고따마 싯닷타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꼬살라국의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싯닷타는 자기 자신과 자기 씨족의 지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강건함과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싸움에 의해 꼬살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와 몇몇 유능한 친구들과 작은 군대는 잘 훈련된 꼬살라국의 거대한 군대와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으며 전혀 현명한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곤충이 불 속으로 날아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방법, 즉 유혈 없는 평화적 독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꼬살라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출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