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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설교 방법

by 혜명(해인)스님 2018. 6. 29.


卍-석가모니의 설교 방법-卍
    불교는 바로 이러한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인데, 그 가르침을 베풂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가 있다.

    진리 탐구자로서의 석가모니의 길과 설법자로서의 석가모니의 길은 반드시 일치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태도와 합리적인 탐구가 구도할 때의 일관된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은 뒤의 설법 때에는 바라문교와 같은 권위주위적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실제적 전도에 있어서는 이런 권위주의적 방법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성도 후 석가모니께서는 한때 이 문제로 깊은 생각에 빠지셨다고 전해진다.

    "신앙하고 두려워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하고 무력해지고 말지 않겠는가."<잡이함 권 44>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끝내 그런 권위주의적 길을 택하지 아니하였다.

    앞서 인용한 경문에는 곧 이어 "오직 정법이 있어 나로 하여금 자각케 하여 깨달은 자가 되게 하였으니 내 마땅히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리라."는 말이 따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깨달음을 열게 하려는 굳은 결의의 표명이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혼란을 깊이 고민해 보았던 석가모니의 지극한 인간애의 발로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이룬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이루게 하고 싶었던 석가모니의 이러한 바램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룬 깨달음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심오하여 탐욕에 가린 중생들에게는 도저히 실현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설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전도를 단념하고 싶을 정도로 석가모니의 괴로움은 컸다. 그가 세상에 나가 전도하게 된 것은 오로지 범천의 지극한 간청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장아함 권 1. 대본경>

    이것은 당시의 종교계에서 인간주의적인 바른 종교의 출현이 얼마나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었던가를 극화(劇化)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석가모니께서 바라는 인간주의적 바른 종교가 세상에 행해지기 위해서는 이제 그 '깨닫기 어렵다'는 문제가 어떻게든지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석가모니께서는 이 문제에 골몰하여 마침내 하나의 묘안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의 '깨닫는 능력(機)'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가서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론을 불교에서는 방편시설(方便施設)이라고 부른다. 방편(upaya)은 '접근한다'는 말이고 시설(prajnapti)은 '알아내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입장에서 석가모니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인 사실을 깨우치는 일에서부터 설해 가기 시작하였다.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초월적인 진리 에서부터 설해 가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정반대의 방향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현실적 사실과 합리적 사유의 중요성이 강조됨은 물론이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잡아함 권 2>는 말이 경전에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것 또한 인간의 합리적 사유를 비판하고 절대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종교와는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깨달음의 효과적 실현에 집중된 석가모니의 이러한 교설에 그런 목적에 필요치 않은 이론이나 실천이 설해질 까닭이 없다. 인간의 자각에 필요한 사항만이 베풀어져 있다는 말이다. 깨달음의 직접적인 내용에 관한 것도 경전에 자세하게 나타나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 문제는 깨달음의 대상으로 남겨져야 하고 깨달음을 이루면 저절로 자명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한때 숲을 지나면서 나뭇잎 하나를 손에 따 들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이 있다.

    "내가 깨달은 법에서 너희에게 설하는 것은 이 나뭇잎 하나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잡아함 권 16> 따라서 석가모니의 교설에서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해명을 구하고자 함은 잘못이다. 만동자(蔓童子, Malunkyaputta)라는 비구가 하루는 부처님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진 일이 있다.

    "이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영혼과 육체는 하나인가 둘 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안 하는가."<중아함 권 60. 전유경> 다른 종교에서는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에는 그러한 해명이 없으므로 몹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는 만일 끝까지 부처님께서 답변을 거절한다면 부처님 곁을 떠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든 다음, 그런 문제는 "깨달음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깨우치고 계신다.

    점진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석가모니의 이러한 방법론은 많은 교법의 시설을 필요로 한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적 능력이 성숙함에 따라 그에 알맞은 법이 계속해서 설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에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법이 불교 경전에 등장한다.

    이런 교법(敎法)들을 법문(法門, dharma-paryaya)이라고 한다. 각기 독자성을 지니면서 궁극적인 진리에 취입(趣入)하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렇게 진리에 이르는 교량적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진리 그 자체라고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구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석가모니의 교설에 입각해서 '전정사유(專精思惟)'하여 깨달음을 열어야 하지만, 깨달음을 연 다음에는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나의 법(法)은 뗏목과 같은 것이니 건너간 다음에는 마땅히 버려야 한다."<중아함 권 54. 다제경>고 석가모니 스스로 경계하고 계시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교설은 단순히 수의설(隨宜說)에 불과하다고 보려는 학자들이 있다.

    사람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게 설한 것이라는 말이다.

    불교 경전에도 또한 잡박한 교리가 일정한 체계 없이 수록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얼마나 피상적인 관찰인가를 알 수가 있다. 법문과 법문 사이에는 미묘한 중층적 교리 조직이 짜여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셨다는 견해도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불교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의 해명을 찾을 수 없음은 사실이지만, 그런 문제의 해명을 깨닫게 하고자 한 교설에 그런 해명이 밖으로 언표(言表)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깨달은 사람에 의한, 깨닫게 하려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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