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법과 동행을/💕불교자료실

수행과 열반

by 혜명(해인)스님 2018. 6. 29.


卍-수행과 열반-卍
    1. 해와 행

    우주의 근본 원리 또는 인간의 생사와 같은 문제를 해명해 주는 것을 종교 사상이라고 부르고, 그에 입각한 실천 행동을 종교 행동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각각 해(解, 이론)와 행(行, 실천)이라는 말로 부른다. 종교 행동은 종교 사상에 의해서 행해지므로 전자(前者)의 목표와 방법은 후자(後者)의 가치 내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불교에서 종교 사상에 해당되는 것은 앞 장에서 살펴본 연기론(緣起論)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연기론은 인간에게 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된 근본 원인을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종교 사상이 이렇게 연기론이라면, 그의 실천적 교설이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방법을 채택할 것인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연기론에 의하면 인간의 생사 괴로움은 진리에 대한 무지 즉 자기 마음 속의 무명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무지의 타파를 통해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의 실천 행동의 목표는 무명을 타파한 세계 즉 열반에 있고, 그 방법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명 번뇌를 멸하는 자력(自力)적인 성격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연기 사상에 입각한 불교의 이러한 실천 행동은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실천 행동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유신론적 종교의 실천 행동에서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 기도, 제사 등이 주축이 되고 신의 구제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종교적 목적이 달성된다.

    그러나 불교의 자력적 수행에는 염불, 발원, 선정 등이 중심이 되고 궁극적 깨달음에 이르러 그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해(解)에 못지 않게 행(行)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와는 달리,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를 구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행이 없는 해는 한낱 희론에 불과하다고 경계됨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이론(解)에 해당되는 교설을 베푸실 때마다

    그에 상응한 실천(行)을 반드시 함께 설해 주고 계신다.

    그리하여 불교의 초기 경전에는 사념처(四念處),사정단(四正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이상 三十七助道品] 등을 포함한 실천적 교설이 무수하게 설해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십업설(十業說)과 사제설(四諦說)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십업설은 세속적인 사회윤리에 관한 대표적인 교설이며, 사제설은 생사 괴로움의 근본적 멸진에 향하는 대표적 수행의 길이기 때문이다.

    2. 십업설

    1). 업설의 내용

    앞서 불교의 연기 사상을 소개하는 곳에서 주체적 인간(六根)과 객체적 대상(六境) 사이에는 작용, 반응이라는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보았다. 불교의 십업설은 바로 이러한 인과율에 입각한 실천 윤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업(業, karma)이라는 술어는 '작위(作爲)'나 '일'을 나타내고, 보(報, vipaka)는 '이숙(異熟)'이라고도 번역되고 있듯이 '성숙함'을 나타낸다. 이 두 낱말은 불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계파에서도 중요한 교리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는 그 두 술어를 특히 인간의 의지적 작용과 그에 대한 객체의 필연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로 채택하셨다.

    업과 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들의 성질 또한 동일성을 띠게 될 것은 물론이다. 즉 업인이 선(善)이면 과보도 선, 악(惡)이면 과보도 악의 성질을 띠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선업에는 즐거운 보(善報)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惡報)가 따른다."고 설한다. 어떤 경우에는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흑업(黑業)에는 흑보(黑報)가, 백업(白業)에는 백보(白報)가, 흑백업(黑白業)에는 흑백보(黑白報)가 따르고, 불흑불백업(不黑不白業)에는 보(報)가 없다."<중아함 권 27 達梵行經> 불흑불백의 업이란 작용된 것이 아니므로 보가 없다고 할 것은 물론이다.

    왜 그러냐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만을 업으로 보고 있으므로 "의지가 작용되지 않는 업(不故作業)은 보를 받지 않는것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와 같이 선업에는 즐거운 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보가 따른다면 우리의 행동 방향은 마땅히 악을 여의고 선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즐거움을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선업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 선업보다는 악업을 익혀 왔음이 사실이다. 행복하게 살 것을 바라면서도 불행을 가져오는 악업을 일삼아 왔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痴暗) 일인가? 괴로운 상황에서는 선보다 악을 행하기가 더 쉬워 일단 악에 빠지면 끝없는 악의 순환이 있게 된다.

    인간의 이러한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악업을 타파하는 일에서부터 착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먼저 악업부터 설명하고 계신다. "몸으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를 받나니, 그것은 곧 살생, 투도(偸盜), 사음이다. 입(言語)으로 네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운 보 받나니, 그것은 곧 망어(妄語, 거짓말),양설(兩舌, 두말), 악구(惡口, 욕지거리) ,기어(綺語, 꾸밈말)이다.

    의지로 세 가지 악업을 짓고 괴로움을 받나니, 그것은 곧 탐욕(貪欲, 욕심),진에(성냄),치암(痴暗, 어리석음)이다."<중아함 권 3 思經>

    이상 열 가지를 십악업(十惡業)이라고 하는데, 십악업의 부정은 곧 십선업(十善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십선업은 따로 시설하지 않고 십악업에 부정 접두사 '불(不, a)'을 덧붙여 이를 표현함이 보통이다.

    즉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이고,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선업은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이고, 의지로 짓는 세 가지 선업은 무탐(無貪), 무에, 정견(正見, 無痴)이다.<잡아함 권28>

    십선업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물론 없지 않다.

    가령 불살생은 방생으로, 불투도는 보시로. 그러나 십악업의 반대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몸으로 짓는 삼업(三業)과 입으로 짓는 사업(四業)과 의지로 짓는 삼업 가운데서, 근본이 되는 것은 의지로 짓는 삼업이다. 업은 본래 의지에서 발생하여 언어 또는 신체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계파가 신벌(身罰)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보는 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의업(意業)을 가장 중한 것으로 본다.<중아함 권 32 優婆離經> 어떤 경우에는 의업을 사업(思業, cetana-karma)이라 하고 구업(口業),신업(身業)을 사이업(思已業, cetayitva-karma)이라고 하데, 이것 또한 의업의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선,악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상과 같거니와,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윤리를 엿볼 수가 있다.

    윤리학에서는 선악의 판별 기준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된다.

    불교의 업설에서는 그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십업의 내용을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라도 인간의 사회생활과 무관한 것은 없다.

    이것은 선악의 판단은 각자의 의지에 맡겨져 있지만,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업에는 반드시 보가 따른다는 것이므로 사회적 책임(報)이 또한 깊이 의식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매우 합리적인 사회윤리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실제적인 우리의 현실을 보면 이따금 이러한 불교의 업설이 문제성을 던져 줄 때가 있다. 업설의 합리적 인과율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구체적인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극악한 일을 저질렀는데도 잘 살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선한 일만 하는데도 일생을 불우하게 살다 가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십업설의 인과율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문제의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업보의 인과율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의 현상'에 대해 사람들은 다른 원리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유신론자는 신의 뜻에서, 운명론자는 운명에서, 우연론자는 우연에서 그 원인을 찾을 것이다. 그들의 설명은 매우 이해하기 쉬우므로 곧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크게 행해지게 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설명들은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는 인간의 업인에 의한 것과 그렇게 않은 원인(신,운명,우연)에 의한 것과의 두 가지 현상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인간이 한 일이며 해야 할 일인가가 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이런 문제성에서 만일 모든 현상이 신이나 운명, 우연 등의 원인에서 오고 있다고 하면, 이번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나 욕심, 노력 등이 있는, 또는 있어야 할 이유가 수긍할만하게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중아함권 3 度經>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냉철한 현실 관찰과 합리적인 사유를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그러한 현상도 업보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왜 그러냐면, 앞서 십이처설에서 분명히 다졌던 바와 같이 "일체 존재(현상)는 십이처에 들어가고, 그 이외의 경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경우 불교의 업설은 삼세업보설(三世業報說)로 전개된다.

    문제의 현상을 분석해 보면, (1).현재 업인이 있는데 그 과보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와, (2).과보는 있는데 그 업인이 현재 발견되지 않을 경우의 둘로 갈라진다.

    이러한 두 경우를 업설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1)의 경우는 그 과보가 현세의 이후에 즉 내세(來世)에 있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2)의 경우는 그 업인이 현세의 이전에 즉 숙세(宿世)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도 있다."<중아함 권 3 思經>

    불교의 업설은 이렇게 삼세업보설로 전개되므로, 사후 내세에 가서 받을 업보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것으로 생각된다.

    육도의 도(道, gati)는 '취(趣)'라고도 번역되는데, '가는 곳'을 가리킨다.

    그런 취로서 천(天),인(人),수라(修羅),아귀(餓鬼), 축생,지옥의 여섯 가지를 시설(施設)한 것을 육도라고 한다. 아수라를 빼고 오취를 헤아릴 경우도 있다. 육 도에서 앞의 셋을 선업에 대한 선취(善趣)라 하고, 뒤의 셋을 악업에 대한 악취(惡趣)라고 한다.

    2). 업설의 평가

    이상 소개한 것이 불교의 삼세업보, 육도윤회설의 대강인데, 이것은 실천적 인간의 시야를 현세의 테두리를 벗어나 무한한 시공 속에 펼치게 하며, 악을 멸하고 선을 행하는 강력한 의지적 인간상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설은 종래 학계에서 올바른 이해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진정한 불교 교리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은 일도 있다. 업설에 대한 그러한 부정적 평가 중에 첫째로서 우리는 업설을 단순한 숙명론으로 보려는 견해를 들 수가 있다.

    업설은 현세의 괴로움을 숙세의 인연으로 돌리고 체념하라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현재 받고 있는 괴로움이 숙세의 업인에 의한 것도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불교 업설의 목적은 그것을 체념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그것을 극복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에 목적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의 업설은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장하려는 '통속적인 교화방편설(敎化方便說)'이라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그 이유는 업설이 불교의 무아설과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업설뿐만 아니라 무아설에 대해서도 올바로 이해가 된 것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불교의 무아설은 앞서 십이연기설의 중도설(中道說)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무명 망념에 실재하는 아(我)가 없다는 것이지 망념 그것까지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생사윤회는 바로 그런 망념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업설과 무아설은 이론적으로 아무런 모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본다는데(십이처설), 이런 입장과 삼세업보설은 모순되지 않느냐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숙세나 내세와 같은 것은 보통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불교 교설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는 볼 수가 없다.

    석가모니께선 각 종교의 진리성 주장에 대해서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현실 세계의 관찰로부터 출발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로 시종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삼세업보설은 권위주의적 입장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인과를 관찰하면 누구나 그 필연성을 추단(推斷)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업설은 단순히 인간의 합리적 사유의 소산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처럼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업보의 실상(實相)이 직접 인식되는 숙명통(宿命通)이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지혜도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의 삼세업보설에 대해 부정적 태도로 임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부터 실천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라고 하겠다. 불교의 계율은 업설에 입각한 것이며, 과거 칠불(七佛) 또한 모두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 七佛通戒偈)을 읊고 계신다.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힘써 하며 그 의지를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석가모니께선 당시 인도사회의 사성제도(四姓制度)를 비판하고 배격하신 것도 업설의 정신에 의했던 것이다.

    사성은 모두 선, 악업에 의해 상벌이 결정되는 것이니, 귀천은 업에 의한 것이지 종성(種姓)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잡아함 권 20>

    바라문교의 공희(供犧, 邪盛大會)에 대해서도 수백 마리의 소와 양 등을 살상하는 것은 반대하셨으니, 이것 역시 업설의 불살생에 의한 것이다.<잡아함 권 4> 불교 업설의 사회 윤리적 성격은 오늘의 민주사회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받을 만하다.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 등이 민주시민의 기본정신이 되어야 하는데, 업설에서의 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능동적 행위이며, 보(報)는 그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행위자에게 지우고 있다.

    또 현대사회가 바라는 인간관은 현실 극복의 강인한 의지를 가진 창의적 인간이라고 보겠는데, 업설의 정신은 바로 그런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 사성제설

    1). 사성제의 내용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諦(satya)라는 말은 '제'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고(死)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노,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集)이고, 수, 상, 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集)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둘째 번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먼저 이 팔정도의 각 항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피면서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종교적 생활을 조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정견(正見, samyak-drst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四諦)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정사유(正思惟, samyak-sam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ac)와 정업(正業, samyak-karma-a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同上經> 정어(正語)와 정업(正業)이 이렇게 각각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正思惟)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정명(正命, samyak-aji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aya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한다. 정념(正念, samyak-smr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끝으로 정정(正定, samyak-sama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音譯語)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연기(緣起)한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앞 장 십이연기설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생사의 괴로움도 연기한 것이므로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연기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正見)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正思惟 - 正念)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게끔 집중하지(正定)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 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samatha)와 관(觀, vipas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라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서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 해서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이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 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제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모니께서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2). 사과

    사제 팔정도는 행하는 사람의 인격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과 심성의 정화가 함께 행해지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그러한 종교적 체험을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여 행자의 수행을 돕고 있으니, 예류(預流),일래(一來),불환(不還),아라한(阿羅漢)의 사과설(四果說)이 곧 그것이다.

    첫째의 예류(srota-apanna)는 세 가지 결박의 번뇌(身見, 戒 取, 疑)를 끊고 범속한 생활에서 성스런 흐름에 들어간 사람을 가리킨다.<중아함 권 1. 水喩經>

    둘째의 일래(一來, sakrd-agamin)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 가지 결박의 번뇌뿐만 아니라 탐, 진, 치(三毒心)의 셋도 약화시켜 이 세상에 한 번 돌아와 괴로움을 다하는 단계이다.

    셋째의 불환(不還, an-agamin)은 다섯 가지 결박(五下分結)의 번뇌(身見, 戒 取, 疑, 貪, 瞋)를 끊고 이 세상에 옴이 없이 천상에서 열반에 드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아라한(arhat)은 일체의 번뇌(身見, 戒 取, 疑, 貪, 瞋, 痴)를 끊고 현재의 법에서 그대로 해탈의 경계를 체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4. 해탈과 열반

    1). 열반의 의미

    수행을 통해 도달한 궁극적 경지를 불교에서는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말로 부른다.

    해탈(vimoksa, vimukti)은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 자유 등을 의미하고, 열반(nirvana)은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 두 술어는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이 계파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석가모니께서 불교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표현하는 술어로 채택한 것이다.

    이것은 그 경지가 그러한 개념에 통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십업설과 사제설을 살펴보았다. 먼저 십업설에서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계라면 십악업이 단절된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십악업에서 근본이 되는 것은 세 가지 의업(意業) 즉 탐욕(貪欲, 욕심), 진에(성냄), 치암(痴暗, 어리석음)의 소위 삼독심(三毒心)이다.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이 밖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십업설에서의 궁극의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말해도 좋다. 사제설에서도 팔정도의 수행이 궁극에 이른 경지는 탐, 진, 치가 사라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사과설(四果說)의 각 단계에서 단절되는 결박의 번뇌를 보면, 예류에서는 삼결(三結. 有身, 戒取, 疑)이 끊어지고, 일래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탐, 진, 치가 박약해지며, 불환에서는 삼결과 탐, 진(五下分結)이 끊어지고, 아라한에 이르러 탐,진은 물론 치까지도 끊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전에서 열반은 그러한 탐, 진, 치가 영원히 끊어진 상태라고 설명되어 있다.

    "열반이란 탐욕이 영진(永盡)하고 진에가 영진하고 치암(痴暗)이 영진한 것이니, 일체 번뇌가 영진한 것을 열반이라고 이름한다."<잡아함 권 18>

    따라서 열반이란 개념은 십업설과 사제설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궁극적 경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술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두루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열반이란 개념이 갖는 본래의 뜻은 생사의 구속을 벗어난 해탈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된다. 경전에 사용된 예를 보면 열반은 대부분이 사제설과 결합되어 있으며,<잡아함 권 2>

    사제설이 지향하는 바는 무명의 망념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오온을 여실하게 아는 까닭에 오온에 불착(不着)한다. 오온에 불착하는 까닭에 해탈을 얻는다."<잡아함 권 15>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과 심해탈(心解脫)의 두 가지가 설해지고 있다.

    혜해탈(prajna-vimukti)은 오온이나 십이연기에 실체가 본래 없는 것을 봄으로써 지적(知的)으로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연기한 것이 무아라는 것을 직관하는 것(정견)만으로 마음의 번뇌가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다. 정정(正定)을 통해 마음에서 그것을 멸해야만 한다. 이것이 심해탈(ceto-vimukti)이다.

    열반은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이 갖추어 질 때(俱分解脫)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열반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이다.

    그 곳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함은 없다.

    "유위(有爲)에는 생주이멸이 있지만 무위(無爲)에는 생주이멸이 없다.

    이것을 모든 행(行)이 적멸(寂滅)한 열반이라고 한다."<잡아함 권 12>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도 이런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오든 행은 무상하니 그것은 생멸의 법이다.

    생멸을 멸해 버리면 적멸은 즐거움이 된다."<잡아함 권 22>

    불교에 있어서 열반은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삼법인설에도 이 뜻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의 셋을 드는 경우가 그것이다.

    2). 열반의 바른 이해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적 인상은 적극적이라기 보다는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탐, 진, 치를 전적으로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교에서는 열렬한 구도를 위해서 재가(在家)보다는 출가(出家)를 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는 염세 종교라든가 허무적멸(虛無寂滅)의 도(道)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과연 열반의 참다운 뜻을 이해한 것일까.

    선과 악은 성질이 상반하므로 한 인간의 행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악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선은 있을 수 없고, 선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악이 있을 수가 없다.

    선과 악의 이러한 상반성은 악을 끊으면 곧 선이 되고 선을 끊으면 곧 악이 된다는 판단을 끌어낸다.

    그런데 불교의 열반은 탐, 진, 치라는 세 가지 악한 의업이 멸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그 곳에는 무탐, 무에, 정견(無痴)의 세가지 선한 의업이 곧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열반의 언어적 표현은 비록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열반의 적극적 의미에 관한 이러한 해명에 대해서 다시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선과 악의 중간 상태 즉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의 상태가 있을 수가 있으니, 열반은 바로 그러한 비활동적 중간 상태가 아니겠느냐고. 이런 견해도 불교의 십업설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러냐면 십업설에서는 선악의 중간 상태를 시설함이 없이 선악을 완전히 상호 대립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불교에서 십선업을 따로 시설함이 없이 십악업의 반대 개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가 있다.

    즉 십선업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무탐(無貪), 무에, 정견(正見, 無痴)의 열이라고 설하고있는 것이다.<잡아함 권 15> 따라서 십악업의 멸(滅)은 곧 십선업의 발생을 의미한다.

    열반의 이러한 적극적 의미를 우리는 사제 팔정도에서는 더욱 뚜렷이 할 수가 있다. 팔정도가 완성된 아라한의 경계에서는 탐, 진, 치의 일체 번뇌가 영진(永盡)한다고 한다. 이것 또한 무탐, 무에, 정견의 발생을 의미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사제의 집제와 멸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에 각각 해당되는데 십이연기의 최초에 위치하고 있는 무명은 명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따라서 무명의 멸진은 곧 명(明)의 발생으로 전환하며, 우주적인 대아(大我)의 눈부신 활동이 거기에 전개될 것이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낭요(朗燿)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는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내가 사성제에서 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을 함에, 눈이 생하고 지(智)가 생하고 명(明)이 생하고 각(覺)이 생 하였다."<잡아함 권 15>

    열반의 적극적 의미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열반은 또 인간의 사후에야 실현되는 경계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경전에도 석가모니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圓寂)이라고 한다.

    반열반은 완전(pari-)한 열반이란 뜻이다. 사과(四果)를 얻은 사람의 죽음에도 그런 용어가 사용된 예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열반이라는 말이 이차적으로 전용된 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 어떤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다.

    십업설에서 선업은 선취(善趣)에 악업은 악취(惡趣)에 수생(受生)한다고 설하고 있음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생사에 결박하는 근본 무명을 단절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러한 사람에게 재생이 있다고는 못할 것이다. "내 생은 다했고 범행(梵行)은 섰으며 할 바는 하였고 후유(後有)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자증(自證)의 선언(記別)이 경전에 수 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반열반은 바로 이러한 도인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반열반이 죽음을 가리킬 경우는 이차적 전용에 의한 것이지 그 본래의 뜻은 아니다.

    열반의 참다운 뜻은 현재의 상태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라한은 현법(現法)에서 해탈한다고 설해져 있으며, 석가모니께서는 또 다음과 같은 교설을 베풀고 계신다.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함이란 어떤 것인가.

    늙음, 병듦, 죽음을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을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을 얻었다고 한다."<잡아함 권 15>

    모든 악이 멸하면 일체는 선이 되고 모든 사(邪)가 파(破)하면 일체는 정(正)이 된다.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였던 일체는 곧바로 상(常), 락(樂), 아(我)의 일체로 전환한다.

    열반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전개, 생명의 약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법과 동행을 > 💕불교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타와 자비  (0) 2018.06.29
    지혜의 완성  (0) 2018.06.29
    연기의 진리  (0) 2018.06.29
    현실의 관찰  (0) 2018.06.29
    일체무상  (0) 2018.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