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지혜의 완성-卍
앞서 소개한 불교 교리는 석가모니의 교설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다. 따라서 불멸(佛滅) 후 곧 행해진 결집(結集, 편찬회의) 때에도 계율과 함께 그것이 제일 먼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한역으로 전해지는 아함(阿含, agama)과 남방불교에 팔리어(pali)로 전해지는 니카야(nikaya)는 바로 이러한 교설을 결집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아함의 교설이라고 부른다. 불교 교단은 석가모니의 입멸 후 약 100년간은 일미 화합하여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100년쯤(B.C. 4세기) 되어서는 계율과 교리에 엇갈린 견해가 발생하여 교단은 마침내 보수적인 상좌부(theravada)와 진보적인 대중부(mahasanghika)로 분열한다. 이것을 근본이부(根本二部)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일단 이렇게 분열이 생기자 이로부터 다시 세부 분열이 뒤따라 먼저 대중부에서 8파, 계속해서 상좌부에서 10파가 갈려나가 B.C. 1세기 경까지에는 총 20부파의 형성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시대(불멸 후 100년 경 - B.C. 1세기 경)의 불교를 부파불교라고 부르고 그 이전을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부파불교시대의 각 부파는 아함의 교법(dharma)에 대해서 전문적 연구를 행하였다. 석가모니의 교설은 사람들의 근기를 살펴 그에 알맞은 법을 설해 갔으므로 언뜻 보기에는 산만하고 단편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이제 그러한 교설을 분석하여 체계화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부파 불교시대의 그러한 연구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고 부른다. '교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에서 '대법(對法)'이라고도 번역된다. 뿐만 아니라 각 부파는 자신의 아비달마 교학의 성과를 결집하여, 경(經, sutra),율(律, vinaya)과 함께 성전으로서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경,율,론의 삼장(三藏(tri-pitaka)이라고 하여, 부파불교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아함의 교설을 체계화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반면에 석가모니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번쇄한 훈고학적 해석으로 그것을 더욱 난해하고 무미건조한 불교로 만들어 갔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아라한(arhat)으로 인식되었다. 전문적으로 교학을 연구하여 철저하게 수행하는 출가승이 아니고는 이제 불교를 제대로 행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부파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을 때, 교계의 한편에서는 석가모니께서 뜻한 불교의 진정한 정신을 되찾으려는 사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것을 대승불교(mahayana) 운동이라고 하는데, 재가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혁신적인 출가인(大衆部系統)의 지도층이 그 추진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을 '소승(hinayana)'이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적인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하였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이제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에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석가모니께서 베푼 교설의 진정한 뜻이라고 그들은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의 그러한 뜻을 담은 교설을 편찬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소위 대승경전으로서 B.C. 1세기 경부터 그러한 문헌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한 것은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십지경(十地經), 무량수경(無量壽經), 유마경(維摩經) 등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결집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다.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부파들이 정통파의 권위를 내세워 그러한 경전들을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배격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급속도로 인도사회에 퍼져 나갔고, 경전 또한 줄기차게성립, 유통, 증광(增廣)될 뿐이었다. 대승경전은 이렇게 성립이 모호하고, 소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는 문제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전적으로 석가모니의 교설이 아니라고 배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상적 차원은 아함교설의 위에 있지만 그러한 차원의 이론적 근거는 역시 아함에 두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승불교는 아함 교리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의 교설은 원래 중생들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가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하는 방편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대승경전의 원시 부분만은 석가모니의 친설(親說)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종래는 대승불교를 소승불교와 확연히 구별해서 소개하는 것이 통래이지만, 본서에서는 아함과 초기 대승경전의 교리를 하나로 묶어 불교의 근본 교설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2. 반야바라밀다와 보살 1). 제법개공 아함에 설해진 열반(nirvana)은 절대적인 세계라고 말할 수가 있다.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실현된 그 곳은 모든 번뇌(탐, 진, 치)와 무지가 사라져 생사의 괴로움을 멀리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소승불교는 그러한 열반을 불교의 궁극적 목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출세간적인 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생사'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의 현실세계에 해당되는데 열반은 그것을 부정,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흔히 '사회윤리를 무시한 허무적멸의 도'라고 비난함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열반관의 반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가 있다. 아함에 설해진 열반을 과연 그렇게 절대적 존재라고 볼 수가 있을까? 생사와 열반, 유위법과 무위법이라는 그 두 법을 이제 새로운 차원에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그 두 법이 서로 연(緣)이 되고 과(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즉 생사가 있음으로써 열반이 있고 열반이 있음으로써 생사가 있다. 현대적 술어로 표현한다면, 생사와 열반은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A, B 두 법이 이렇게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두 법에는 독자적인 존재성 즉 자성(svabhava)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상대방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존재성이 없다면 A,B 두 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법이라는 말이 된다. A는 곧 B요, B는 곧 A이다. 동시에 A, B라는 두 개의 존재는 하나의 본질적인 존재(性)에 대한 일종의 존재 양식(相)이 될 것이다. 여실하게 볼 때 이렇게 평등한 두 법에 대해서 누가 만일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식별이요 분별(vikalpana)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분별은 두 법에 대한 실상을 보지 못한 것이므로 망념이라고 해야한다. 우리 마음에 이런 망념이 있으면 이 무명 망념을 연하여 생사의 괴로움이 일어날 것이다(緣起). 아함 교설의 십이연기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는 생사와 열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생사는 곧 열반이요, 열반은 곧 생사이다. 그런데도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그 중의 열반을 독자적 존재성을 지닌 것으로 절대시한다면, 이것을 과연 여실한 견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러한 분별망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불교는 바로 이러한 자각과 반성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 중에서도 성립이 빠른 것은 반야부 계통인데, 그 중의 하나인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다.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그 마음을 항복해야 하나니, 있는 바의 모든 중생의 무리를 내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여 멸도(滅度)하리라. 이렇게 무량 무변 중생을 멸도하지만 실로 중생으로서 멸도된 자가 없나니라. 왜 그러냐면 보살에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 열반을 절대적 존재로 보려는 견해를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분별망념에는 실체가 없다. 따라서 반야경에는 "모든 법은 자성(svabhava)이 비었다(sunya)."는 말이 수없이 되풀이되고있다. 아함경에서 모든 법(일체)은 십이처,사대,오온 등의 유위법을 가리키고, 그들은 모두가 무상하고 괴롭고 무아라고 설한다(삼법인설 참조). 그러나 반야경에서 말하는 '모든 법(諸法)'은 그런 유위법은 물론 열반과 같은 무위법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두 자성이 공(空)하다고 한다. 자성이 공하다는 것은 아함경의 무아라는 말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개념이라는 것이 짐작될 것이다. 자성이 빈 법은 '공(空, sunyata)'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 공을 허공(akasa)이나 무(無)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허공은 물체가 없는 공간(space)을 의미하고, 무는 있던 것이 없어졌을 때 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공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 눈앞에 있는 존재 그것이 여실하게 보는 입장에서 바로 공인 것이다. "색은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을 떠나 공이 없고 공을 떠나 색이 없다. 수, 상, 행, 식 또한 그와 같다."고 반야심경은 설하고 있다. 모든 법이 이렇듯 공의 형상(空相)이라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반야경은 여러 가지 미묘한 표현을 구사하고 있다. 모든 법은 생한 일도 없고 멸한 일도 없다. 옴도 없고 감도 없다. 중생의 마음이 더럽고, 부처의 마음은 깨끗하다는 것도 없다. 중생은 본래부터 성불해 있는 것이다. "모든 법은 꿈과 같고 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금강경> 이러한표현들은 초학자를 심히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본뜻은 우리의 분별망념을 철저히 타파하려는 것이지 다른 뜻이 아니다. 2). 반야바라밀다 망념의 부정이 행(行, 실천)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러나 그런 경계에 집착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분별망념이다. 다시 망념의 부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행을 일으키고 행은 경계를 얻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기 부정적 실천이 계속된다. 이러한 변증법적 공관의 실천은 마침내 일체의 분별을 타파한 진여(tathata)의 세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궁극적 실천의 경지를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일체의 분별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불가설(不可說)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께서는 "내가 성도하여 쿠시나가라에 이르도록 그 사이에 한마디도 설한 것이 없다."고 설하고 계신다. 이 말은 그러한 뜻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라도 언어적인 표현을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반야경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prajnaparamita)라는 술어는 그러한 언어적 표현을 꾀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반야(prajna)는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함을 보고 그 실상을 직관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일체의 분별을 떠난 것이므로 무분별지라고도 해석된다. 그리고 바라밀다(paramita)는 '피안(彼岸, para)에 이른(i) 상태(ta)를 의미한다. 궁극적인 것, 완성된 것과도 통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 두 낱말이 합성된 '반야바라밀다'는 지혜가 피안에 이른 것(智度彼岸) 또는 지혜의 완성(perfectionof wisdom)이라는 뜻이 된다. 반야바라밀다는 이렇게 생사의 차안(此岸)으로부터 일체의 분별망념을 멸하여 궁극적인 피안에 도달한 것을 가리키지만, 그것을 아함교설의 열반과 같이 생사와 열반을 분별했을 때의 그러한 경계로 보아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아직도 분별의 세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관의 실천에서는 "모든 법은 무변(無邊)이니 전제(前際)도 얻을 수 없고 중제(中際)도 얻을 수 없고 후제(後際)도 얻을 수 없다. 연(緣)이 무변이기에 반야바라밀다도 무변인 것이다."<소품반야 권 1> 따라서 보살은 마땅히 반야발라밀다를 성취해야 한다고 설하지만 보살이라고 부를 만한 대상(法)이 없으며, 반야바라밀다라고 부를 만한 대상도 없다. 일체는 공이요, 공이라는 것도 또한 공(空赤復空)이다. 일체는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다는 것도 불가득(不可得)이다. 이런 경계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절대적 부정은 곧 절대적 긍정이 된다는 주장도 있고,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3). 보살과 서원 어떻든 언사(言辭)가 사라지고(寂滅) 생각이 끊긴 경계는 그것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만이 스스로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자내증의 체험을 불교에서는 보리(菩提, bodhi)라 한다. 깨달음(覺)이라는 우리말에 해당된다. 깨닫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요, 깨달은 뒤에는 너무나도 명백한 진실계이므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을 보리살타(菩提薩陀(bodhisa-ttva) 또는 줄여서 보살이라고 한다. 보리는 깨달음을, 살타는 중생(또는 有情)을 뜻하므로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또는 깨달음 속에 있는 중생이라는 말이된다. 보살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아라한이 열반을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세간(有爲法)과 열반(無爲法)을 분별하여 이 중에서 열반을 구하는 것이 아라한의 수행이므로 그것은 자연히 출세간적인 방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살은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나와 남 등의 모든 분별을 떠나 평등한 수행을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경계를 얻는 일도 없다. 따라서 보살의 수행은 아라한과는 달리 중생계에 회향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보살이 국토를 정화하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커다란 서원을 세움은 이 때문이다. 가령 불교 의식에 흔히 사용되고 있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예로 들어보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되어 있다. 중생이 가없어도 건지고야 말리. (衆生無邊誓願度) 번뇌가 끝없어도 끊고야 말리. (煩惱無盡誓願斷) 법문이 한없어도 배우고야 말리. (法門無量誓願學) 불도가 위없어도 이루고야 말리. (佛道無上誓願成)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보살의 지상 과제이겠지만, 그보다도 먼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뜻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다. 보살의 수행을 흔히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에 대해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중생을 교화한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곧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곧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장보살과 같은 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고 있으며, 법장비구(法藏比丘, 아미타불의 전신)의 서원에는 자신이 비록 부처가 된다고 하더라도 괴로운 중생에게깨달음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않겠노라는 뜻이 반복되고 있다. 4). 육바라밀의 수행 보살은 이와 같이 사회와 중생을 망각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그와 함께 보시(布施, dana), 지계(持戒, sila), 인욕(忍辱, ksanti), 정진(精進, virya), 선정(禪定, dhyana)의 5바라밀도 함께 행하게 된다. 이것을 보살이 닦아야 할 육바라밀이라고 한다. 1.보시바라밀(dana-paramita)은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아함의 교설에서도 보시는 커다란 공덕이 있는 종교적 행위로 설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보시는 공덕을 바라고 남에게 시여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마땅히 법에 주(住)함이 없이 보시할지니, 소위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에 주함이 없이 베풀어주어야 한다."고 설해져 있다. 베풀어주어도 준다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의 보시에는 "세 가지가 청정하나니, 주는 자(施者)와 받는 자(受者)와 주는 물건(施物)의 셋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대품반야 권 7> 2.지계바라밀(sala-paramita)은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을 뜻한다. 국가에는 법률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다. 불교인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계로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오계가 있고,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에게는 각각 250계, 348계라는 구족계(具足戒)가 있다. 지계바라밀은 이러한 법과 계율들을 잘 지키는 것인데, 이때도 계율을 지킨다는 부담감이나 자만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죄(罪)와 부죄(不罪)를얻을 수가 없는 불가득의 공관에서 자연스럽고 자율적인 준법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대품반야 권 1> 3.인욕바라밀(ksanti-paramita)은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安受苦忍)이다. 우리는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되기 쉽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경우에 마음의 동요가 없는 것이니, 제법(諸法)이 본래 불생(不生)임을 보기 때문이다. 금강경에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전생담을 설하고 계신다. "옛날 가리(Kaling-a)왕이 내 몸을 마디마디 잘랐을 때 만일 내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더라면 마땅히 진한(瞋恨)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러한 상이 없었느니라." 4.정진바라밀(virya-paramita)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법을 증장시키는 데에 있어 정진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아함교설의 여러 가지 행법(三十七助道品)에는 정진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임하였을 때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하는 법이니 방일하지 말라. 불방일로써 나는 정각에 이르렀으며 무량한 선을낳은 것도 불방일이니라."고 유촉하고 계신다. 공관(空觀)의 실천을 무사안일에 빠지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5.선정바라밀(dhyana-paramita)에서 선(禪)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않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靜盧)을 뜻한다. 신(god)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불교처럼 존재의 실상을 밝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를 타파하려는 종교에서 선은 특히 중요한 행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원시불교에서도 사선(四禪)의 행법이 설해져 있으며 대승불교에서도 육바라밀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머무름이 없는 법(不住法) 속에서 행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6.반야바라밀(prajna-paramita)에 대해서는 다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들의 성립 기반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섯 바라밀은 모두가 반야공관의 입장에서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대지에 씨앗을 뿌리면 인연 화합하여 생장이 있게 되는데, 이때 땅을 의지하지 않고는 생장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속에 머물러 증장함을 얻는다. <소품반야 권2> 육바라밀은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중심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아낌없는 시여(施與), 자율적인 준법생활, 끝없는 인내, 굽힐줄 모르는 정진, 한없이 심오한 사색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간심(인색함), 범계심(犯戒心), 진심(瞋心), 해태심(懈怠心), 산란심(散亂心), 무지심(無智心)이 있을 때 큰 자비(maitri-karuna)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법의 공에 상응하는 까닭에 능히 대자대비를 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대품반야 권 1> 반야바라밀다는 이렇게 모든 분별 방념을 초월하여 말할 수 없이 청정한 것이며, 모든 선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며,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할 때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놀람이 없고 거꾸로 생각을 멀리 떠나 궁극적인 열반에 이른다. 고 반야심경은 설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가 무상의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도 반야바라밀다에 의해서다.<반야심경> 소승불교의 출세간적인 종교적 행위는 대승불교의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자리이타의 지극히 적극적인 종교적 행위로 지양된 것을 볼 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