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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대각교단세불법륜

나는 소를 치는 한가한 사람-석가산 대종사

by 혜명(해인)스님 2018. 12. 5.

나는 소를 치는 한가한 사람  

                                                                  한국고승협회 총정 석가산 스님

 

<전문>

우리나라보다 해외 불교국가에서 더 잘 알려지고 존경받는 대율사이신 석가산 큰스님은 도량에서 하루를 묵은 내게 以靈爲筆(이영위필)’이라는 글을 즉석에서 일필휘지하였다.

영혼을 취해서 글을 쓰라漢詩(한시)를 받았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더러 바람에 몸을 눕는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며 울긋불긋 끝없이 춤을 추는 계곡을 따라 절터로 가는 길목에는 언덕너머로 가끔 들려오는 산새소리만 애절할 뿐, 그 어떤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적막했다.

파란 물이끼로 덮여있는 계곡을 따라 찾아간 충북 진천 초평리의 대작골의 절에는 사찰이름도 없이 목우한(牧牛閑)이라는 도량의 간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말 그대로 소를 치는 한가한 사람이라는 현판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일자일배삼칭수행의 길

 

이곳의 석가산 큰스님은 사경실에서 세계 최초로 대방광불화엄경 80권을 한번 쓰고 한번 절하고 세 번을 칭하는 일자일배삼칭을 하며 하루 18시간을 경을 쓰고, 2시간을 앉아 잠을 자는 장좌불와와 묵언으로 몇 년간을 수행정진하며 그 뜻을 이루었다.

 

수행 중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수염은 끝없이 자라던 그해 장마로 인해 폭우가 몇 날 며칠을 퍼부어 절간이 물에 잠겨도 이상하게 내가 수행하던 사경실만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 비범함을 직접 겪었지, 화엄경 사경당시 회향을 마치던 날, 오색무지개가 하늘을 수놓았으며, 구천을 헤매는 수천만의 영가들이 사경실 앞에서 슬피 우는 모습을 법안으로 보고 모두 천도해주는 경험도 했어.”

 

중생의 고뇌를 해탈하여 성불하게 하는 그 원력은 가히 놀랍기 그지없다.

또 한 신라시대 진표율사가 김제 모악산, 금산사와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팔공산 동화사 등을 점찰 근본도량으로 하여 고려시대까지 성행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배불정책으로 단절된 점찰법을 석가산 큰스님은 기도정진과 원력으로 점찰선악업보경, 그 참법과 행 의식을 정립 역경하여 600년 만에 재현한 것은 과히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점찰이란 전생의 모습과 금생의 길, , , 복과 미래의 일을 쳐 괘상으로 알아내는 것이며, 마음으로 관찰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소원 성취하는 것이다.

이 점찰법은 불교가 융성했던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전국 각 사찰에서 성행하였던 하나의 법회방법이었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과거의 죄업을 참회하여 선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최고의 수행 방편도였다.

2000년도엔 석가산 큰스님께서 직접 TV방송에 출연하여 점찰법에 대하여 사부대중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특강을 한 사례도 있었다.

 

불교의 국제 활동을 위한 인력을 키우다.

 

큰스님은 1964년 우리나라 스님으로서는 해외나들이 제 1호의 기록도 가져있다.

당시 30세도 채 안된 젊은 승려로서 세계불교협의회에 정식 초청을 받아 세계평화기도협회 한국대표의 법주로서 참석을 하게 되어 세계 불교계에 그 족적을 남겼고또 한 부처의 경전이 거의가 빠알리어로 되어있어 경전을 직역하고 공부하기 위한 한국불교대학을 1987년 설립하여 스리랑카의 본교에서 직접 관리하고 학위도 그곳에서 직접 주는 시스템으로 스리랑카 빠일리대학의 분교캠퍼스를 만들어 불교의 국제 활동을 위한 인력을 키워내기도 하였다.

 

그 이후, 한국승려 20여명과 미얀마스님 600여명이 합동위령 천도재를 지낸 후 1993년 미얀마정부와 함께 비극의 아웅산 문을 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94년 스리랑카 대통령의 초청으로 20만 명이 모이는 대법회에 초대되어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 이곳 두타산 대작골 계곡 원융사터에 기숙사를 만들어 몽골, 스리랑카 승려들이 우리나라의 불교교육을 받는 업력도 만들었다.

 

석가산스님은 우리의 대승불교뿐만 아닌, 소승불교의 동남아시아 각국의 고승들과 라마불교의 몽고 티베트 고승들과도 교류하며 폭넓은 불교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스리랑카 대통령궁에서 스리랑카 대통령과 한국과 스리랑카의 불교문화교류 발전과 세계불교를 논하기도 하였고, 세계 승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는 영광도 안았다.

 

또한 직지경, 참범, 점찰 선악업보경, 범망경 보살계본, 국제보살대계의, 조선불교 중흥조 서산대사의 연구, 화엄경 회향계 및 일진법계, 선시 및 전법계 등의 저서 발표 및 역경을 끊임없이 하였다.

 

항일운동의 유지를 받들어

 

큰스님을 뵈러 목우한실로 찾아가던 날, 종일 큰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느꼈던 것은 애국사상이 철저하다는 것이었다.

 

그 근저에는 19193·1운동 당시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의 대표자로 참가하여 구국 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 백용성 스님의 손자 상좌제자이기도 한 큰스님이 바로 위 스승인 봉암스님의 항일운동 사실을 확인하기위해 법원의 각종기록과 사료들을 3년간 찾아다닌 끝에 항일운동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게 한 사실을 알았다.

 

늦게나마 은사스님인 봉암 월주대선사께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게 돼 다행이야.”라며 소탈하게 웃으시는 큰스님의 입가에는 고생 끝의 낙이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발품으로 각종 묻힌 사료들을 혼자서 다 찾아낸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해외에서의 불교활동을 추억삼아 얘기하는 스님의 눈빛에는 그 활동의 왕성함이 그대로 투영되는 듯하였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꽤 길어지자 이제 그만 얘기하고, 잠시 향공양을 하고 와.”하며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어 몸을 비트는 나를 보고 슬며시 웃으시며 밖에 나가 향공양을 하고 오라는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천령정골염주를 친견하는 행운을 얻다.

 

나는 그날 이 절터에서 머물며 하나의 전율을 느꼈다.

티베트에서 오랜 세월을 수행 정진한 라마승이 열반할 때 다비(茶毘)하기 전에 정수리 뼈를 깎아서 만든 108염주를 친견한 것이다.

 

108염주가 되기까지 2천년이나 긴 세월이 걸린다는 천령정골염주108명의 라마승이 대를 이으며 열반하기 전까지, 한 가지씩 원()을 세우고 수행 정진했기 때문에 108명의 라마승의 원이 스며있는 불가사의한 세계의 단 하나뿐인 무가보(無價寶)의 성물(聖物)이라는 것이다.

 

이 염주를 친견하면 과거의 업이 소멸되고 바라는 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전설 같은 기적의 일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염주는 큰 스님이 가장 아끼는 염주로서 그날 나는 직접 친견하며 생애 처음으로 손가락마디에서 일어나는 전율과 막힌 가슴이 확 트이는 환상을 느꼈다.

 

또한 나뭇잎에 새겨진 경전인 패엽경(貝葉經)은 옛적부터 인도에서는 종이 대신 나뭇잎에 가는 송곳 같은 것으로 글자를 새기고, 먹을 입인 후 닦아내어 새긴 글자만 남게 해서 보관해 온 것으로, 초기 불교 경전의 원형인데 2000년 된 패엽경을 직접 만져보는 행운도 얻었다. 이처럼 석가산 큰스님은 세계 각국을 돌며 설법을 하시고, 그 불가의 연유로 받은 고귀한 선물은 과히 놀랄 지경이었다.

 

영혼을 취해서 글을 쓰라

 

우리나라보다 해외 불교국가에서 더 잘 알려지고 존경받는 대율사이신 석가산 큰스님은 세계불교엑스포를 구상하고 있다.

 

최근에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일본당국이 중학교 새 학습지도요령 사회과 해설서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내용을 명기함으로써 도발적이고도 야비한 무력침략행위의 조성을 드러내자 격분하시어, 종교계, 학계, 시민단체, 33인 독립선언 유족회 등 애국시민을 망라한 국토수호범국민운동협의회발족을 제안하여 일본정부가 독도 영유권 포기선언을 할 때까지 영구히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가겠다고 천명하였다. 독립 운동가이신 백용성스님에 이어 봉암스님를 거쳐 3대째 일본에 반기를 든 셈이다.

 

큰스님과 함께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 도량에서 하루를 묵은 나는 새벽녘에 큰스님께서 부르시길래 사경실로 찾아가니 경건하게 붓과 벼루를 준비해 놓으시고 以靈爲筆(이영위필)’이라는 글을 즉석에서 일필휘지하였다.

 

풀이하면

영혼을 취해서 글을 쓰라漢詩(한시)를 내게 뜻깊게 선물해 주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절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큰스님의 지나온 그림자를 더듬으며 솔향기 묻어나는 바람소리에 취해 잠시 잠든 틈에 108염주를 손에 낀 고승 한분이 내게 손짓하는 꿈을 꾸었다.

 

:-김미루 20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