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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님 석가산 대종사

by 혜명(해인)스님 2018. 12. 4.

나의 스승님 석가산 대종사

                                           마성/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2014.03.07

 

나는 19732월 어느 날에 출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었던 열일곱 살 때였다.

누구의 강요에 의한 출가가 아니었다. 내 스스로 직접 절로 찾아갔다. 

내가 출가하기로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 곁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원래 우리 집은 고향에서 매우 잘 살았다.

조부로부터 물러 받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우리 집에는 머슴이 약 열 다섯 명이나 있었다. 

제법 큰 배가 세 척이나 있었는데, 배 한 척에 다섯 명 정도의 머슴들이 일했다. 나는 그 머슴들로부터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며 비교적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 많던 재산은 아버지의 음주와 도박으로 다 날려버렸다.

그래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경남 진해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때부터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아야만 하는 고된 삶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생계는 어머니가 꾸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면 출가하여 스님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무작정 찾아간 절이 바로 경남 진해시 여좌동에 위치한 대광사였다.

당시 대광사에는 노스님 한 분과 스님 두 분이 살고 있었다.

 

내가 출가하기 전에는 불교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 노스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노스님이 백용성(白龍城) 스님의 직계 수법제자로서 50년대 불교분규 이후 해인대학(海印大學)에서 오직 도제양성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봉암(峰庵) 변월주(邊月舟)라는 큰스님이었다. 

노스님이 몸담았던 해인대학은 나중에 마산대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지금의 경남대학교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내가 대광사에 갔을 때 노스님은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했지만 개별적으로 학생 스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노스님은 지금의 은사 스님과 사숙 스님에게는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 어린 사제와 나에게는 꾸중하는 일이 없었다.

노스님은 내가 출가하겠다고 찾아갔을 때 무척 반가워했다.

나이 어린 사제는 매일 아침 노스님 방을 청소하면서 노스님과 장난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사제는 노스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 덕분에 나와 사제는 별 어려움 없이 절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승려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신심으로 중노릇하는 법을 하나하나 배워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불가의 스승, 즉 은사와 법사라는 개념도 알지 못했다.

그때는 승복만 입었을 뿐, 승려의 본분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시기였다. 

다만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내가 도량석을 하면 사제가 쇳송을 하고, 사제가 도량석을 하면 내가 쇳송을 했다.

그 사이 법당에서는 노스님께서 대예참례(大禮懺禮)를 올렸다.

노스님의 그 엄숙한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새벽예불은 약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70년대 초반에는 대부분의 사찰들이 매우 가난했다.

반찬은 형편이 없었다.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그런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면 첫 시간부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절로 돌아오면 지금의 은사 스님으로부터 불교의례와 초심(初心)과 치문(緇門) 등을 배웠다.

 

그렇게 약 2년 동안 절에서 하나하나를 배워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스님께서 연탄가스로 입적하시게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와 사제는 아직 수계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노스님 49재 회향일에 나와 사제는 노스님의 제자였던 석가산(釋迦山)”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그 이후 사숙 도성 스님과 사제는 대광사에 남고, 은사 스님과 나는 이절 저절 떠돌아 다녔다. 어느 한 사찰에 오랫동안 머문 기억이 없다. 그러나 내가 대광사를 찾아가 지금의 은사 스님을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불가(佛家)에서 한번 맺어진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속가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같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거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나의 스승님은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지금의 경남대학교를 졸업한 당시의 엘리트 스님이었다.

70년대 초반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스님이 많지 않았다. 

은사 스님은 노스님으로부터 전통적인 방식으로 불교를 배웠지만, 사고와 행동은 매우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은사 스님은 사제와 나에게 내전(內典)만을 공부하라고 고집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독서를 통해 다양한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나의 은사이신 석가산스님은 이미 40년 전에 중국어의 중요성을 예견했다.

그래서 사제 마아(摩阿)를 화교(華僑)가 운영하는 소학교(小學校)에 입학시켰다.

은사 스님은 사제가 중국어에 능통하면 나중에 크게 유익할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그러나 사제는 중국인 소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제는 은사 스님의 특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사춘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은사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개혁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모험을 많이 시도했다은사 스님은 80년대 초반부터 세계불교로 눈을 돌렸다. 나는 1987년 처음으로 은사 스님을 따라서 대만의 사찰들을 순례했다.

 

그 영향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나의 시야가 넓어졌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다른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은사 스님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편 은사 스님은 승가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88년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의 한국분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교육 불사였다. 이러한 시도만 보더라도 나의 은사님은 분명히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이러한 은사 스님의 덕분으로 나는 초기불교와 남방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 인연으로 나는 스리랑카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것은 은사 스님의 안목과 배려 덕분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이처럼 은사 스님의 은혜와 배려로 초기불교를 공부했기 때문에 오늘날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사 스님의 불교관과 종단관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은사 스님은 여러 종단을 새로 창종하기도 하고, 여러 종단으로 옮겨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은사 스님을 따라 승적을 옮겨본 적이 없다.

은사 스님과 종단관이 다르기 때문이다따라서 비록 은사 스님과 나는 사제(師弟) 관계이지만 서로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삶의 목표와 방향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이 스승인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의 법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경허집(鏡虛集)>을 편찬하고 그 서문을 적음에, “후대의 배우는 이는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들이 믿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後之學者學和尙之法化則可어니와 學和尙之行履則不可人信而不解也.”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석가산 대종사님은 나의 은사이자 법사이지만 나는 스승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을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번 맺어진 불가의 사제(師弟) 관계는 인위적으로 바꿀 수가 없다. 

끝으로 속가의 부친은 나를 부처님의 제자로 인도하기 위해 일찍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를 깨우쳐 준 인로왕(引路王) 보살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버지 때문에 지금도 재물에 대한 욕심은 없다.

그리고 도박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래서 나는 도박하는 사람은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뼈아픈 교훈이다.

 

-佛敎통권 701, 20143월호, pp.64-68 -

 

마성스님 - 팔리문헌연구소장

 

http://blog.daum.net/riplmase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