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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불상(佛像)

by 혜명(해인)스님 2018. 6. 30.


卍-우리나라의 불상(佛像)-卍
    1.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불교와 전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뛰어난 초일류의 예술인 석굴암의 석불조각은 신라인의 이상상(理想像)이어서 중국의 아류품(亞流品)도 아니요, 모방품도 아니며, 오직 신라인들의 것이다.

    저 아름답고 시원한 조각상은 신라인이 그린 절대적 낙원의 상징이요,
    일말의 흠집의 침입을 허용치 않는 숭고한 정신적 세계를 불상에 의탁하여 표출한 것이다.

    온 산을 돌부처의 군상으로 매운 경주 남산의 석불군(石佛群)은 불교신앙의 정신적 토양에서 태어난 것으로 그 신앙적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는, 남산의 石佛群을 감상할 자격이 없다 할 것이다.

    형성되어진 모양이나 형식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그 곳에 집약되기까지의 정신적 배경을 통찰하는 작업이다. 형태는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훌륭한 예술은 형태와 내용이 일체가 되어 균형을 유지할 때에만 비로소 태어난다. 한국 돌부처(石佛)의 뛰어남은 그곳에 창조자의 마음이 살아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예술은 마음의 예술이라 한다.
    유교사상에 의한 형식미(形式美)의 도입이 있었지만, 그것은 궁중 예술 속에서 길러졌을 뿐, 민중의 창조적 세계에는 뿌리를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돌부처의 소재(素材)인 암석의 풍부함은 돌부처를 낳게 되었지만, 돌부처가 단지 불교신앙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재래로 부터의 신앙이나 자연관과 불교가 혼효(混淆)되어 석조예술을 길러낸 것이다.

    돌에 대한 믿음은 예부터 있어왔다.
    돌의 움직이지 않는 不動의 모습에서 불사(不死)의 신앙을 보았는지 모른다.
    동물이 움직이고 죽음이 있는데 대하여, 돌은 움직이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큰 석판을 겹쳐 쌓아 만든 돌맨(支石墓)도 역시 돌 신앙과 결부된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히 한국에는 돌이 많다.
    기암괴석이나 큰 바위를 신으로 숭배했던 것은 불교전래 이전부터 있었다.
    거암괴석에 神像을 투영시킨 古代信仰위에 神을 구상화한 道敎가 자리 잡자, 또 다시 그 위에 부처님의 모습을 새겨 넣은 佛像이 겹쳐져 重層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의 불상에는 일본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통곡하는 모습이나 마치 고뇌와 깨달음이 혼융된 듯한 面相은 찾아 볼 수 없다. 조각 솜씨의 교졸(巧拙)은 별문제로 하고, 깨달음을 초월한 세계를 돌부처의 얼굴모습에 새겨놓고 있다. 그 전통은 조선조의 억불숭유정책하에서도 잃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돌부처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담겼다고 하는 것이다.

    2. 고구려의 불상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수입하였으므로 불상의 조성을 비롯하여 각종 불교적인 조형미술품을 다른 나라에 앞서서 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먼저 조상(造像)활동을 시작하였음에도 현존하는 불상이 희귀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석불이 아닌 금동불(金銅佛)로서 고구려의 것이 확실한 것이 몇 구 알려져 있고, 또 절터에서 출토된 토제(土製) 불상들도 있어 고구려 불상의 면모와 그 수법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1959년 서울 교외인 뚝섬에서 발견된 불상은 높이 5cm의 작은 동불좌상(銅佛坐像)인데, 이것은 400년경에 조성된 중국작품으로서 우리나라 초기불상의 직접 범본(範本)이 되었던 것으로 보아 귀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불상으로서는 5세기경으로 올라가는 확실한 유품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모두 500년 이후의 불상들이라 한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것이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불상은 10구도 못된다.
    이들은 모두 6세기 이후의 작품인데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초기에는 고구려의 지리적 조건으로 불가피하게 중국 불상의 양식을 따랐을 것이며, 실재 현존하는 유품을 볼 때에도 북위(北魏)를 주로 하는 북조불상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상호(相好=부처님의 얼굴 모습)에서 한국적인 인상을 보이고 있음은 사실이다.

    중요한 불상으로는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7年銘金銅如來立像)으로서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둥근 연꽃무늬 대좌 위에 직립한 여래입상으로서 큰 광배를 지니고, 거의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머리위에는 둥근 나발(螺髮)을 나타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매우 두문 유래라 한다. 광배 뒷면에는 4행47자의 造像銘을 새겼으며, 그 첫머리에 고구려 연호인 연가(延嘉 )라는 글을 새겼으며, 불명은 현겁천불이라 하였다.

    이밖에 금동 신묘명 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과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 원오리출토 니제불(元五里出土泥製佛) 등은 모두 그 후기인 6세기 중반기 및 말기의 소작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시대의 石佛에 대한 자료는 아직 얻은 바가 없으므로 . 백제시대 이하의 석불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