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법과 동행을/💕불교자료실

진정한 대효, 1

by 혜명(해인)스님 2020. 7. 29.


진정한 대효, 1.

      혜정법사 법문
      정수淨修법사님· 홍洪거사님· 가족 여러분: 나무아미타불!
      오늘 여러분들이 법당에서 염불하는 모습을 보니 대부분 아주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아주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신 염불은 아미타불께서 전부 아셨습니다. 동시에 이 모든 게 전부 여러분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천도시키고자 하는 기대에 도달하였습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효도를 바라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효도’를 불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 등급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부모와 조상에 대해 효도하고 봉양하는 의무를 다하여 부모로 하여금 일생생활에 있어서 의식에 대한 근심걱정이 없고, 동시에 부모님의 뜻을 따르면서 그분들을 거역하지 않으며, 부모에 대한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곧 자녀로써 가장 기본적으로 다 해야 할 효도입니다. 두 번째는 중간 정도의 효도인데, 바로 자신이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말을 하고 덕을 쌓고 공을 세워서 조상의 덕을 드러내고 조상의 이름을 빛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효도는 세간 사람들의 관념 속에 이미 굉장히 효순한 것이어서 부모로 하여금 이 자녀들을 헛되이 낳지 않게 하는 거죠.

      그러나 불법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이 역시 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법에서는 삼세인과·선악응보·육도윤회로부터 전체 인생을 바라보며, 또 이러한 인생관으로써 무엇이 효도이고 무엇이 불효인지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불법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앞의 그 두 가지 효는 아직 진정한 효가 아니고, 진정한 효는 반드시 자신의 부모와 조상들로 하여금 완전히 육도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작은 효’와 ‘중간 정도의 효’에 해당하는데, 불법의 안목으로 본다면 이 두 가지는 원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육도윤회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자녀인 우리들이 원만한 효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바로 부모님이 아직 왕생하시기 전에 효양·효경·효순을 하는 것 외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각종 방법으로 부모와 가족들이 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가족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단지 인연들이 잠시 모여서 생겨난 것뿐이고,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지은 선업과 악업에 따라서 윤회를 하며 태에 들어가 환생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불변한 게 아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어서 해탈을 하지 못한 이상, 계속해서 윤회를 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매우 길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만약에 이러한 이치를 안다면 그들의 세계관이 달라져서 이 세상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게 될 겁니다. 다시 말해 물론 사람으로 태어나 부모로서 당연히 자녀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고, 자녀가 된 도리로서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이 짧은 수십 년 가운데 가족들을 인도하여 우리를 따라서 불법을 배우고 또 불법에 의지하여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이러한 이치를 설명해 주신다면 최소한 부모에게 어느 정도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길만 제대로 안다면 생사는 한꺼번에 쉬게 된다

      모든 사람의 생사윤회는 그 누군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각자 밥을 먹어 각자 배부르고, 각자 생사는 각자 해결해야 한다.’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말은 쉬워도 전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법문을 제대로 찾기만 한다면, 간단하다고 말하면 또 매우 간단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또 있지요. ‘수행에 달리 수행이 있는 게 아니라 길만 제대로 알면 된다. 길만 제대로 안다면 생사는 한꺼번에 쉬게 된다.’ 다시 말해 법문만 제대로 찾는다면 우리가 금생에 비단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성불도 할 수 있다는 거죠. 만약에 법문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면 금생에는 단지 부처님과 인연만 맺을 뿐, 아직 다음 생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이 육도 가운데서 윤회를 하다보면 왕왕 한생이 한생보다 못하게 되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릴 적부터 육식을 하면서 자라왔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마음은 모두 사리사욕이 있어서 탐진치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일생 중에 악이 많고 선이 적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 반성해보면 다음 생에 사람 몸을 보존하기란 쉽지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사람 몸을 보존하려면 반드시 불법 중의 기본적인 수행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법문만 제대로 찾는다면 자신이 수행할 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전부 해탈할 수 있습니다.

      금생에 성취할 수 있는 법문

      그렇다면 어떤 법문이 우리가 금생에 성취할 수 있는 법문일까요?
      바로 염불하는 법문입니다.
      염불하는 법문은 우리가 현생에 살아있는 동안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면 ―
      오직 극락왕생을 하려는 이 마음이 절대적이고 백분의 백이며, 타협하지 않고 대충대충 하지 않으며, 그 뒤로 오로지 이 명호만을 부를 수 있다면 이미 지옥에서 제명되고 극락에 등록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대학에 합격하여 이미 합격자의 이름을 발표한 것과 같습니다.

      비록 아직은 입학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학교의 학생신분을 갖춘 거죠. 우리가 극락세계에 가려면 시험을 볼 필요 없이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그 다음은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른다면 이미 아미타불께서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은 아미타불께서 자발적이고 평등하게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고, 또 극락왕생을 하는데 반드시 구비해야 될 갖가지 공덕과 자량 역시 아미타불께서 미리 우리를 위해 완성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공덕을 어디에다 완성해 놓았을까요? 바로 이 한 구절 명호 속에 있는 거죠. 따라서 오로지 이 한 구절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자연히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필요한 자량과 공덕을 갖게 됩니다. 마치 합격이 되었을 때가 바로 그 학교의 학생인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현재 수명이 다하지 않았지만 왕생을 발원하고 오로지 명호를 부르다가 시간이 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현재 염불을 하면서 왕생발원을 한다고 해서 지금 바로 왕생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수명이 각자 다르므로 오늘부터 염불하며 왕생발원을 하기만 하면 임종 시에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을 ‘염불인’이라 부르죠. ‘염불인’이 임종할 때 생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미타불께서는 그 사람 앞에 몸을 나투어서 위로하고 보호해주시어 그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게 해주시는데, 가장 주요한 목적이 바로 그 사람을 극락세계로 접인해 가는 것입니다.

      가족을 염불로 인도하다

      우리는 이러한 도리로써 자신의 가족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가족의 죽음에 직면하여 가족을 위해 천도법회를 해줌과 동시에 한 편으로는 자신이 직접 세상사의 무상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비록 가족의 사망이 본인을 몹시 슬프게 하지만 어느 날 우리 역시 마침내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족의 죽음을 빌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와 모든 공덕 가운데 불법의 공덕으로 조상을 천도하는 게 가장 쉽고 가장 수승하며 효과 또한 가장 빠릅니다.

      이른바 ‘착수하기 쉬우면서 성취가 뛰어나다.’는 거죠.
      마치 『지장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설사 어떤 사람이 살아계실 때 부처님과의 인연을 만나서 불자가 되어 수행을 하지 못하고, 심지어 악연들을 만나서 온갖 나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임종할 때 사람들로부터 염불을 하라는 권유를 받고 참회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한 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즉시에 삼악도를 벗어나 과거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지 않게 됩니다.

      만덕홍명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이 명호가 ‘만덕홍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아미타불께서 시방중생을 위해 세우신 48원의 공덕이 전부 이 명호 속에 들어있고, 조재영겁兆載永劫의 시간을 거쳐서 쌓은 공덕 역시 이 명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위해 건설하신 청정하고 장엄한 극락세계의 모든 공덕도 이 명호 속에 있고,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증장시키는 그런 공덕 역시 모두 이 명호 속에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설사 일생동안 악연을 만나서 실수로 법망을 저촉하고 국가의 법률을 범하게 되었으며 또 세간의 도덕을 어겼으나 임종할 때 이 한 구절 명호를 불렀기 때문에 ― 이는 아미타불께서 당신이 쌓으신 공덕을 이 한 구절 명호로써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에 우리가 이 명호를 칭념하는 것은(명호가 곧 부처님의 본체인 까닭) 아미타불의 공덕을 받아들인 것과 같아서 우리의 일생동안의 죄업이 소멸되어 삼악도까지는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임종하는 사람이 염불을 할 뿐만 아니라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영원히 다시는 삼계육도 가운데서 윤회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그 사람이 평소에 적선을 했다거나 수행정진을 한 소치가 전혀 아니고, 이 명호자체의 기능입니다. 마치 이 사람이 빈곤할 뿐만 아니라 산더미 같은 빚을 지었다하더라도 부유하면서도 애심이 가득한 사람이 백천만에 달하는 수표 한 장을 적어서 주시거나 아니면 신용카드 한 장을 그 사람에게 주신다면 그 사람은 모든 채무를 상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부유해질 수 있겠죠.

      그래서 이 한 구절 명호를 ‘만덕홍명’이라 부르는 거죠.
      이른바 ‘만萬’이란 백천만이라는 숫자상의 만이 아니라 이 ‘만’은 ‘법을 표현함表法’이라는 뜻으로, ‘만’이란 원만한 공덕이고 초월적인 공덕이며 3장12부를 구족하고 법계의 공덕을 구족하여 이 명호를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만덕만 있으면 업장을 소멸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관무량수경』에서 설하기를, 현생에 잘못하여 법을 어기고 또 윤리도덕을 위배한 사람은 비록 한 때의 무지와 악연을 만났기 때문이지만 맨 마지막에 도리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한 구절 명호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관무량수경』에서 설하기를, 이런 사람이 최후에 이르러 염불하면 한 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를 때마다 모두 그 사람의 80억겁의 생사중죄를 소멸하게 되어 일단 숨이 끊어지기만 하면 즉시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하신 겁니다.

      염불로써 조상을 천도하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로써 우리의 조상들을 천도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로 돈을 써가며 외부사람들을 불러서 불사佛事를 할 필요 없이 집에서 우리의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이 입을 사용하여 염불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이는 매우 쉽고 돈쓸 필요도 없으며, 따로 불사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조상들의 업장소멸을 말한다면 염불보다 쉽고 빠른 것이 없고, 조상들의 복덕과 공덕을 늘리는 데도 염불보다 더 쉽고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무량수경』에서 설하기를 ‘우리가 환희용약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위없는 공덕을 구족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위없는 공덕’이란 바로 성불의 공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 가운데 최고·최상이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거든요. 따라서 부처님보다 더 높은 분은 더 이상 없으므로 우리가 염불만 한다면 부처님과 똑같은 위없는 공덕을 구족할 수 있기 때문에 염불은 쉬우면서도 수승하다는 거죠. 『지장경』에서도 설하시길, 임명종 시에 그 사람에게 죄가 있던 죄가 없던 간에 단지 이 한 구절 명호만 듣게 되면 모두 삼악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염불로써 우리의 조상들을 천도해야 하는데, 칠칠 사십구일이 다 됐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49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면 하루하루를 잘 활용하여 최대한 틈을 내거나 휴가를 내어서 조상들을 위해 염불하여 천도를 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49일 기간에 조상의 중음신이 아직은 태에 들어가 환생을 하지 전이어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효도를 할 수 있는 시기인데, 이 시기가 지나서 효도를 하려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49일 뒤에도 만약에 여전히 조상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면 ― 심지어 삼악도에 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이때에 우리가 계속해서 그분을 위해 염불해주신다면 부처님께서 삼악도로 광명을 놓아 구제해주실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거나 숨이 끊어진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분을 위해 조념을 해줄 수 있다면 조상님은 절대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조상님이 육도윤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지어드린 낱낱의 공덕들도 그 공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고 헛수고를 한 게 아닙니다.

      척계광이 『금강경』을 독송하여 부하를 천도한 이야기

      이제 여러분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습니다.
      중국 명나라 때 척계광戚繼光이라 부르는 장군 한분이 계셨었는데, 그 분은 나라와 백성을 아끼는 장군이면서 동시에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일생동안에 매일매일 고정적으로 『금강경』 한 편씩 독송하였는데, 설사 밖에서 행군을 할 때라도 짬을 내어 『금강경』을 끝까지 독송하고 나서야 잠을 잤다고 하였으니, 그의 불법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독실하고 간절한지 알 수 있을 겁니다.

      하루는 그의 부하 한 명이 죽었는데, 이 부하가 본인의 부인 꿈에 나타나서 척장군에게 『금강경』을 독송하여 자신을 천도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하였답니다. 척장군이 『금강경』을 반쯤 정도 독송하고 있을 때, 척장군의 부인은 척장군이 목을 축이고 기를 보충하시라고 인삼차 한잔을 들고 들어왔지요 척부인이 문밖에서 들어올 때 이를 본 척장군은 손을 한 번 저으며 마음속으로 ‘필요 없어!’라고 말을 했어요. 『금강경』 한 부를 다 독송하고 난 그날 밤에 부하의 부인은 돌아가신 남편이 다시 꿈속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아직은 완전히 천도된 게 아니라면서 척장군께서 다시 한 번 독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얻은 공덕이 『금강경』의 전반부뿐이고, 후반부에서는 ‘필요 없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공덕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척장군은 이 일을 알고 나서 그때서야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척부인이 차를 들고 왔을 때 자신이 손을 저으며 거절하면서 입으로 비록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필요 없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결과 후반부의 공덕을 얻을 수 없었던 거죠. 이튿날 아침에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을까봐 문을 닫고 독경을 하였습니다. 당일 밤에 그 부하가 꿈속에 나타나 사의를 표하면서 이미 천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불법의 공덕은 헛되지 않고 즉각 효과를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염불로써 조상을 천도하는 공덕은 경전을 독송하는 것보다 더욱 수승하다

      『금강경』의 경문에는 극락세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또 아미타불과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며, 단지 『아미타경』·『무량수경』·『관무량수경』에서만 언급을 하였어요. 따라서 만약에 독경으로 조상을 천도하여 극락세계로 왕생하게 한다면, 『아미타경』·『무량수경』·『관무량수경』을 독송하는 것보다 수승한 게 없겠죠.

      하지만 이른바 ‘천구의 경문이 한 구절 명호만 못하다.’고 했듯이
      『아미타경』을 독송하면 공덕이 있어서 조상을 천도시키고 업장을 소멸하며 재난을 면하게 해줄 수 있겠지만 이것은 가장 주요한 공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마치 한 장의 지도와 같고 또 지도에 대한 설명서와 같아서 우리가 설명서를 보고 또 지도를 찾아보고 목표와 방법을 알았으면 응당 곧바로 행장을 꾸리고 길을 떠나서 목표지를 향해 나아가야지 독경에만 머물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비록 독경에도 공덕은 있으나 독경보다 공덕이 큰 것이 바로 이른바 ‘가르침에 따라서 마음을 관하고, 가르침에 의해 받들어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은 명호를 집지하기만 하면 우리와 우리가 천도할 대상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할 수 있고, 또 이것은 시방제불들이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이구동성으로 우리에게 석가모니불의 말씀에 절대 거짓이 없다고 보증을 해주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법문의 수승함을 찬탄하시고 염불인들을 모두 호념해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미타경』의 구구절절에서 모두 염불하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비록 천도의 기능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천도의 기능은 이미 문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경전을 볼 때는 단순히 문자의 내용만 볼 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문자의 이면에 포함되어 있는 깊고 넓은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경은 마치 넓은 바다와 같아서 그 가운데 깊이 들어갈수록 그지없이 심오하고 공덕이 불가사의하여 포함하고 있는 의미 역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러므로 독경으로 천도할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염불로는 더욱 천도할 수 있겠지요. 경전에서 설하기를, 이승에 있는 사람이 만약에 정성을 다해 염불하여 조상천도를 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직접 그 곳에 가셔서 그 사람에 앞에 나타나서 접인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염불로써 조상을 천도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효과가 가장 수승하고 빠른 것입니다.

      기자가 ‘관락음’을 체험하다

      예전에 잡지사에서 근무하던 젊은 기자 한분이 있었는데, 전문적으로 그의 잡지사를 위해 기이한 사건들을 취재하러 다녔습니다. 한번은 그가 방문할 곳이 바로 이른바 ‘관락음觀落陰’이었어요. 이걸 여러분들은 아시는지요? 아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세요. 오! 여기 나이가 젊으신 분들도 ‘관락음’을 아시네요? (연우님: 텔레비전에서 본적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관락음’의 과정에 대해 아실 테고, 저도 경험한 적은 있지만 텔레비전의 보도는 잘 보지 않습니다.

      ‘관락음’은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같이 한편으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편으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관락음’을 할 때 두 발은 땅바닥을 밟고 있는 게 아니라 부적 한 장을 밟고서 두 눈은 수건으로 가리는데, 수건 속에도 부적을 사용하여 눈을 가립니다. 법사法事를 주관하는 사람은 일반 도사道士들인데 옆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우죠. 이때 ‘관락음’을 체험하는 당사자는 그곳에 조용히 앉아계시다가 만약에 머릿속에 특이한 영상이 나타나면 주문을 외우는 사람에게 일러줘야 하는데, 그럼 주문을 외우는 사람은 이미 저승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에 도사가 다시 다른 주문으로 바꾸어 외워서 이 사람이 원하는 경계 속으로 인도해줍니다. 예를 들어 그가 저승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을 만나려 한다거나 자신의 운명을 보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주문으로 여러 가지 인도를 해주는 거죠.

      이 젊은 기자는 스물 몇 살이었는데 그는 취재를 하러감과 동시에 직접 현장체험을 하였습니다. 현장에는 대략 열 분정도 계셨으나 오직 그분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외할머니를 찾고 싶었는데,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가 키워주셨기 때문이죠. 찾다 찾다가 외지고 쓸쓸하고 또 외로운 곳에 낮으면서 화려하지 않은 작은 집에 있었는데 그 집에서 자신의 외할머니를 찾은 거죠. 외할머니와 손자가 어렵사리 저승에서 만나게 되니 몹시 흥분되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았어요.

      이때 도사가 옆에서 외할머니에게 돈이 필요한지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태워드리면 외할머니가 바로 받을 수 있어서 다른 귀신들이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할머니에게 돈이 필요하시냐고 물으면서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가 이렇게 물을 때, 마음속에 문득 영감이 탁 떠올라서 종이돈을 외할머니에게 태워드릴 수 있다면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의 공덕도 매우 클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한번 ‘나무아미타불’하고 불렀어요.

      본래 그런 곳에서는 사람들이 경전을 독송하고 진언을 외우는 것을 못하게 하고, 또 기타 부처님의 명호도 못 부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경전을 독송하고 진언을 외우거나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 그 과정을 방해하고 장애할까봐 염려돼서죠. 그가 이 명호를 부르자마자 즉각 허공에 아미타불이 나타나셨는데 아미타불의 손에 보석상자를 들고 있었고, 동시에 이 보석상자가 이미 그의 외할머니 품속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외할머니가 입던 옷도 바로 화려하고 진귀하게 변하여 마치 보살의 옷과 같았고, 모습 또한 아주 장엄하게 변하였으며 신고 있던 신발도 순금이었어요. 그의 외할머니는 발을 들어서 그에게 황금처럼 빛나고 고귀한 신발을 보여 주셨대요.

      그가 이일을 저에게 말해주길래 제가 물었어요.
      “그 당시에 명호를 몇 번 불렀나요?”
      그는 한번밖에 못 불렀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몇 번 더 부르지 않았나요?”라고 묻자 그는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었어요. 이는 그가 염불인이 아니기 때문인데, 만약에 염불인이였다면 어떤 장소와 어떤 시간에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모두 생각해 볼 필요 없이 즉석에서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억념한다든지 아니면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불렀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끊임없이 염불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염불인이 아니었고 단지 종교적인 기이한 사건들을 취재하러 다니다 보니 이 명호가 위대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