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을 갚는 자세로 살아갑시다.
진리에 입각한 복된 사람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이 인생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현재의 모습으로 있도록 한 근본 법칙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법칙은 바로 대우주에 가득 차있는 인과율(因果律)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에도 적용됩니다.
<능엄경>에서는 물과 불의 예를 들어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요점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우주 공간에는 불의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불이 일어날 수 있는 연(緣, 환경)만 갖추어지면 어디에서든지 불을 구할 수 있다.
대우주의 공간에는 물의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인연이 화합하면 아무리 높은 산에서도 능히 물을 구할 수 있다.
<능엄경>의 말씀처럼, 우리가 지은 전생의 업(業), 곧 전생에 심은 씨앗〔因〕이 금생에서 발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면 반드시 과보(果報)를 나타내게 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조선 중기의 고승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스님은 금강산에서 내려와 백담사에 계시던 중,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부름을 받고, 서울 봉은사로 옮겨와서 정치고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임금인 명종(明宗)은 13살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정왕후는 보우 스님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마침내 보우 스님의 말이 왕의 명령처럼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세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보우 스님을 찾았기 때문에 봉은사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정왕후는 보우 스님에게 비단으로 만든 가사를 내렸고, 보우 스님은 입궐할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궁궐에는 백의(白衣)나 보통 옷을 입고 보통 옷을 입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도(道)가 높은 보우 스님이라도 궁궐 출입을 할 때는 비단 가사 장삼과 연화관에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금강산에서 보우 스님을 키워주신 노스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보우가 어떻게 사는가. 중노릇을 옳게 하고 있는지 한번 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수천 리 길을 걸어 봉은사에 이르렀는데, 마침 그날이 보우 스님이 입궐하는 날이라 입궐 행렬을 보게 된 것입니다.
보우 스님은 연화관에 비단 가사 장삼을 입고 턱 하니 가마에 앉아 있고, 가마꾼들은 “휘, 물렀거라. 보우대사님 행차시다” 하면서 요란하게 출행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누더기 옷에 송낙(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모자)을 쓰고 지팡이 하나 짚고 거지 행색을 한 노스님은 뒷전으로 밀려 제자 보우를 만나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보우 스님이 알았으면 당장 가마에서 쫓아내려 왔겠지만, 주위 사람들이 아예 만날 수조차 없도록 막고 있었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노스님은 발길을 돌리며 혼자 말했습니다.
“구피마피(狗披馬皮)로다!”
개가 말 껍데기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스님의 말씀대로 후일 보우 스님이 정말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권세를 누리던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반대파들로부터 축출을 당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양지 감옥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제주도에 어승마(御承馬)가 한 마리 태어났는데, 보통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뛰어난 준마(駿馬)였습니다.
제주도에는 주로 조랑말이 많이 났는데, 이 말은 조랑말의 몇 배나 되는 크기에다 골격이 빼어나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호마(胡馬)같은 말이었습니다.
제주 목사는 그 말을 어승마로 임금께 진상했습니다.
임금은 매우 기뻐하여 말에게 ‘호남장부(好男丈夫)’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온갖 치장을 다 하여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어찌나 영리한지 임금이 어디를 가야 하겠다고 생각만 하면, 그 앞에 척 나타나곤 하였으며, 간신들이 근처에 오면 발길로 차거나 물려고 하였습니다.
충신인지 간신인지는 말 근처에 가보면 저절로 밝혀지므로, 뒤가 켕기는 자들은 이 말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교 중흥을 위해 보우 스님은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권력의 중심에 서서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쌓았기 때문에 결국은 제주도 귀양을 가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임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말이 되어 돌아왔던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업이 비록 마땅하지 않을지라도 ‘빚을 갚는 자세’로 녹여야 합니다.
‘어차피 내가 갚을 빚이라면 기꺼이 갚자.’
빚을 갚는 자세로 현재의 인연을 받아들이면 업은 다시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자리’가 바로 과거의 업을 푸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연(緣)을 맺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빚을 갚는 자세로 과거의 업을 기꺼이 수용하면 그 업이 결코 힘들지만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성심(誠心)을 다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씨를 심게 되면 극락과 차츰 가까워지게 됩니다.
가족. 이웃. 동료들과 좋지 않은 관계에 있으면 빚을 갚는 자세로 임하여 보십시오.
부디 감정에 휘말려 자꾸만 질이 떨어지는 업을 만들지 마십시오.
눈앞의 이익, 눈앞의 손해만 생각하여 모든 것을 상대적인 감정과 자존심으로 해결하려 하면 매듭만 늘어날 뿐입니다.
발전하느냐 퇴보하느냐,
위로 나아가느냐 아래로 내려가느냐는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매사에 한 생각을 바르게 가져 업을 풀어나가고 푼 것을 더욱 좋은 인연으로 가꾸어 나가기를 간절히 당부 드립니다.
-우룡 스님-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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