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의미
제행의 제(諸, sarva)는 ‘일체’ ‘모든’의 뜻이고, 행(行, samskara)은 sam이라는 ‘함께’, ‘~모여서’라는 말과 kara라는 ‘만든다.’ ‘행한다.’는 의미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로, ‘함께 모여 만들어진 것’ ‘지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어떤 존재를 만들고 어떤 일을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아무 원인과 조건 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는 행이나, 존재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나 어떤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도, 모든 일도, 모든 생각도, 또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도 앞서 언급한 연기법에 의하면 어느 하나 인연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은 유위행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다 유위법인 것이다.
그래서 제행이란 ‘인과 연이 화합하여 만들어 낸 모든 것’,
‘일체의 만들어진 모든 것’,
‘인연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존재와 행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쉽게 말하면 ‘모든 것’ ‘모든 존재’ ‘모든 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상(無常)이란 말 그대로 ‘항상(영원성) 함이 없다.’
‘항상 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즉 제행무상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모든 존재(有爲法)도 항상 하지 않고, 존재가 만들어내는 행위(有爲行) 또한 항상 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도 항상 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거나 미워한다는 행위 또한 항상 하지 않는다.
제행이라는 일체 모든 존재는 모두가 유위로써 인과 연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소멸하면 함께 따라 소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은 인연 따라 소멸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의 이치에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언젠가는 변해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제행무상이라는 이치는 연기법의 기초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기하기 때문에 무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행무상은 연기법에 대한 시간적인 해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연기법을 시간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제행무상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내 눈에는 변하지 않고 항상 할 것 같은 모든 것들이 언젠가 시간이 흘러 세월이 흐르고 나면 어김없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며,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관점을 제행무상은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이 있을까?
변치 않고 항상 하는 것이 있다면 찾아보라.
이 세상 어디에도 항상 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
항상 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만이 항상 할 뿐이다.
불교에서 항상 하는 유일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의 기준이요 근거요 법인은 무상의 이치인데, 절대 독존의 변치 않는 유일신은 바로 이 무상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은 변하는 신이다.
천상 세계의 모든 신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신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불교의 법신, 부처, 불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만약 불교를 공부한 누군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정법이 아닌 사법을 공부하고 있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로써의 법신이나 불성이나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방편일 뿐이며, 이름일 뿐이다. 편의상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일 뿐이지 거기에 어떤 실체를 부여할 수는 없다. 이것은 뒤에 제법무아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므로 우선 넘어가도록 하자.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잠시 머물렀다가 변화하여 결국 소멸되고 만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
별이 생기면 일정 기간 동안 머물렀다가 무너져 공으로 돌아가고, 우주도 마찬가지다. 인간 존재 또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막을 수 없다.
‘나’라는 존재를 놓고 보더라도 어느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외모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능력도 변하고, 체질도 변하고, 생각도 끊임없이 변해간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특정한 모습을 정해 놓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운명을 탓하고, 공부 못 하는 자는 공부 못하게 태어난 자신의 능력을 탓하고, 외모가 못난 사람은 자신의 외모를 한탄하고, 성격이 나쁜 사람은 나쁜 제 성격을 탓할 지언정 획기적인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음치는 언제까지나 음치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다. 운동신경이 나쁜 사람이 언제까지고 운동을 못하도록 정해진 것도 아니다. 어떤 자는 가난한 운명을, 또 어떤 자는 부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부자일지라도 낭비와 인색과 무절제함이 계속되면 가난해질 수 있고, 가난한 자일지라도 절약하고 보시하며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의 마음을 꾸준히 일으킨다면 언제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해 낼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일 따위는 본질적으로 없어야 한다. 다른 그 누군가가 그것을 했다면 나도 그것을 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 내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이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 능력을 변치 않는 것으로써 스스로 어떤 한계에 가두어 놓는 것일 뿐이다. 내 스스로의 능력을 내 스스로 이 정도라고 생각하여 가두어 놓는 순간 우리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그것은 내 능력이 본래부터 그것 밖에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안에 갇혀 있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를 가두고 있는 일체 모든 울타리를 걷어치우라.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나라는 존재는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생각은 제행무상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그 변화의 끝에 우리는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할진대 나라는 존재를 울타리에 가둘 것인가.
내 스스로 울타리에 가두지만 않으면 나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대자유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디에도 갇히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하라.
어디에도 머물러 있거나, 정체되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를 새롭게 받아들이라.
-법상 스님-
2009.05.21.
향상일로님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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