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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세상은 고통이다.

by 이初心 2023. 4. 15.

    세상은 고통이다.

    世樂後苦 何貪着哉
    세상의 즐거움 뒤에는 고통이 따라오는데,
    어떻게 세상의 즐거움에 탐착하겠는가.

    ■세상은 고통이다.■

    세상의 즐거움은 연속성이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인 쾌락의 궁극은 이성 간의 교접시에 행해지는 사정의 순간이다. 이 한순간의 쾌락 때문에 인간은 평생 동안 쓰디쓴 책임을 져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즐거움과 쾌락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부피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운 대가를 요구한다.

    한자로 아들 子 자와 비슷하게 생긴 글자가 두 개 있다.
    하나는 孒 자고 하나는 孑 자다.
    앞의 것은 장구벌레 궐 자고 뒤의 것은 고단할 혈 자다.
    앞 글자는 아들 子 자에 왼쪽이 없다 보니 좀 모자라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아들은 일생 동안 속을 썩인다.
    정말 부모의 고혈을 짜낸다.
    그래서 뜻이 장구벌레 궐 자다.
    장구벌레는 모기의 유충이다.
    성장하면 모기가 된다.
    성장해서 부모의 피와 살을 빨아먹게 된다.
    자식 복이 없어서 이런 자식을 만나는 날에는 평생 땅을 치는 한탄이 그치질 않는다.

    뒤의 글자 孑은 아들은 아들인데 생긴 것이 비뚤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바르지 못하고 엇나간 자식을 가진 부모는 정신적으로 정말 고단하다.
    그래서 이 글자가 만들어졌다.
    이런 자식 역시 복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평생토록 부모 애를 먹인다.
    그래서 일생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이 두 글자는 모두 생리학적으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절정의 기쁨 뒤에 나타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둘 다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

    그 외의 조그만 즐거움은 또 그에 맞는 조금의 고통을 수반한다.
    한 끼의 따뜻한 밥을 먹기 위해 힘든 농사를 짓고 지겹게 직장에 다닌다.
    그러고는 화장실에 가서 배설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을 사람들은 그냥 인생살이라고 한다. 이런 삶은 참 영양가 없는 일상이다. 이것은 본능적 생존에 그칠 뿐이다.

    썩은 고기를 잘 먹는 자칼 부부가 있었다.
    종일 굶어가며 먹잇감을 찾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굶주린 배를 등에 붙이고 흐느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대한 코끼리 사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맘껏 포식을 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냥 두고 가면 누가 와서 차지할까 봐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자칼 부부는 그 사체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같이 쫓아가 배고픈 식구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자칼 식구들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비가 오거나 뙤약볕이 쏟아지거나 상관없이 그들은 그늘진 코끼리 몸속에서 마음껏 먹고 단잠을 자며 장난을 치고 사랑하면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기쁨에 젖어 있었다. 그들이 그 속에서 더 없이 행복해할 때 코끼리 가죽은 점점 말라가고 있었다.

    초식 동물의 가죽은 일단 마르기 시작하면 무엇보다도 질기고 딱딱하게 변해간다.
    이런 긴급한 상황인데도 그들은 순간의 행복에 겨워 바깥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사체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다 파먹고 살이 통통하게 찐 가족들이 바깥으로 나오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때 서야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죽이 굳어서 그들을 가두어버린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의 이빨과 버둥거림으로는 결코 밖으로 탈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자칼 가족은 부모의 무지와 안일 때문에 그곳에서 모두 굶어 죽는 비극을 맞이했다. 인간들은 결과적으로 이렇게 전 가족이 죽어가는 행복을 원하고 있다.

    행복은 바로 즐거움이다.
    즐거움으로 인해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대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은 상대적인 행위에서 나온다.
    상대는 외적 조건을 말하고 행위는 육체적인 움직임을 말한다.
    이런 즐거움은 바로 고통을 대동한다.
    상대가 언제나 나의 입맛에 맞게 움직여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단계 더 높은 행복을 원한다면 상대를 떠난 정적인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시를 쓰거나 음식을 듣거나 아니면 명상을 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내면의 정화에 의해 독자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 역시 죽음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행복이라고 여길 때 벌써 불행의 조짐은 시작된다.
    그래서 주어진 행복을 즐기면 여기서 죽는다.
    죽지 않으려 하는 자는 행복을 즐기는 그 시간에 계속 선업을 지어 여기를 탈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칼 가족과 같은 불행한 꼴을 당하게 된다.

    오늘 내가 받아야 할 즐거움을 뒤로 미루면 그 즐거움은 배로 다가온다.
    지금보다 더 큰 즐거움을 원한다면 지금의 즐거움을 투자해야 한다.
    그것을 다 써버리면 다음 행복을 만들어내는 데 너무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짧다. 하지만 행복을 만드는 시간은 너무 길다.
    그 행복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는다.
    내가 정당하게 만들어 놓은 행복은 내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훔쳐 가지 못한 상태로 자연계에 온전히 남아 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공부하라고 들들 볶아대는 부모는 진정한 가족의 행복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칼 부부처럼 자식들을 데리고 거대한 코끼리 배 속으로 들어가 행복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발심수행장 열강기, 공파 스님 –불광출판사-
    -옮겨옴-

세상은 고통이다.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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