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은 '모양(色)이 공이고 공이 모양(色)이다.'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참선 수행을 오래 했던 사람들조차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다.
예를 들어 여기에 갈색 나무 의자가 있다고 치자. 딱딱하고 무겁지만, 앉을 수도 있고 물건을 놓을 수도 있다.
의자에 불을 붙여보자.
잠시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와 보면 의자는 이미 불에 타고 없어져 버린 뒤다. 딱딱하고 강한 것으로 보였던 그것이 찌꺼기와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의자라는 물체는 이처럼 공하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나 변한다.
다시 말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든 짧은 시간이 걸리든 의자는 결국 변한다.
그러므로 이 갈색 의자는 완벽히 공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앉으면 우리 몸무게를 지탱한다.
우리들은 이름과 모양에 집착한다.
이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이 집착이라는 병을 치료하고 싶으면 '이름과 모양이 실제가 아니며 무상하다' 는 약을 먹어야만 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변하고 변한다. 우리가 갈망하는 부나 명예, 다른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조차 공허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들은 몸을 소중히 여긴다.
또 강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곧 죽고 몸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가 생전에 얼마나 몸을 소중히 다뤘느냐에 관계없이 죽을 때는 이 공한 돈을 가져갈 수 없으며, 돈도, 명예도, 섹스도,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
그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집착해 있다.
그들은 이름과 이 공허한 것들을 위해, 단지 그것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힌다.
그들은 오로지 돈과 명성, 좋은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이 공허하고 무상한 것들을 얻기 위해 때로는 온갖 모욕과 고통도 감수한다.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섹스에 집착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모든 형태는 공하기 때문에 뭔가 가지거나 지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기본적으로 환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나는 내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가이다. 바로 이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그 마음이 나의 삶을 만든다.
그것이 지금과 다음 생을 결정한다.
모든 것이 본래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이 무상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고통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우리는 완벽하게 자유이다. 더 이상 붙잡을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전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을 깨달으면 수행이 필요 없다.
법문 또한 필요 없다.
그러나 생각에 집착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모양이 공하고 공한 것이 모양이다.'라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참선 수행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