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의 핵심은 ‘연기(緣起)’다.
존재의 원리에 해당되는 연기를 개별 존재와 사람에게 적용하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라는 가르침이 자연스레 도출된다.
무상과 무아는 불교가 발전하면서 등장하는,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삼법인(三法印)’의 - 법인은 ‘올바른 가르침의 표지(標識)’라는 의미다 - 주요한 구성요소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을 삼법인으로 부르는데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보태 사법인이라 일컫기도 한다.
“생멸변화하는 我(아)가 없다는 게 아니고 고정불변 하는 실체적 我(아)가 없다는 뜻”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에 대해 자주 설명했다.
초기불전 곳곳에 보인다.
〈쌍윳따니까야〉에 나오는 소냐와의 대화는 유명하다.
한때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있었다.
그때 장자의 아들 소냐가 부처님께 참문(參問)하러 왔다.
찾아온 소냐에게 부처님이 말했다.
“소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부처님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이해될 정도다.
가르침의 순서도 무상 - 고 - 무아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여러 불전에서 강조한 무상은 ‘불교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무상’이라는 말은 상(常)을 뜻하는 nicca에 부정의 접두사 a를 붙여 만든 단어 anicca(아니찌:팔리어)로, 영구적인 것. 불변하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다.
무상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만약 무상한 색(色. 물질적인 존재)을 무상하다고 보면 정견(正見)에 이른다(쌍윳따니까야)” “비구들이여, 색을 철저히 생각하여 색의 무상성을 관찰하라(쌍윳따니까야)” 등의 표현이 불전에 자주 보인다.
불교의 존재론에 해당되는 무상의 밑받침이 되는 것은 물론 ‘연기’다.
“일체의 존재로 서로 어떤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태어났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인데,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무상”(마스타니 후미오)이기 때문이다.
사실 존재하는 그대로의 자연계와 인간계를 관찰해도, 모든 것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이나 바위 같은 것들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쉼 없이 변하고 있다.
자연도, 인간도, 물질적인 것도, 심리적인 것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거대한 산과 바위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산을 구성하는 작은 요소들도 내적으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무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제행무상’인 것이다. 제행은 ‘모든 존재’로 이해하면 된다.
제행무상에 보이는 무상을 ‘인생은 무상하다.’
‘세월은 무상하다.’ 등의 말에서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상의 참뜻은 세상과 존재의 실상이 무상함을 나타내고, 가리키는 말이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변하는 것 자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따라서 변화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변화 자체를 인정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을 때 무상의 의미는 제대로 전달된다.
제행무상을 사람에 적용하면 자연스레 불교의 인간론인 ‘무아’가 도출된다.
일체가 무상한데 사람이라고 변하지 않을 손가. 영원불변하는 자아(眞我)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제법무아’인 것이다. 제법은 제행처럼 모든 존재를 가리킨다.
“제행무상의 존재론을 배경으로 인간 또한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불교의 인간관인 무아”라 할 수 있다. 삼법인의 세 번째에 해당되는 ‘열반적정’은 불교의 이상적인 경지인 열반을 가리키며, 이는 불교의 목적론 혹은 행복론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무아에 대한 이해다.
무아를 ‘나를 억제한다든지, 없애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무아는 사상적 표현이지 인간의 정신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염연히 존재하는 자기를 없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부처님은 열반 직전 아난에게 “그러므로 아난아, 너희는 이제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며, 법을 섬으로 삼고, 법(法)을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마하파리닛바나숫탄타)”고 말했다. 소위 말하는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이다. 여기서도 분명히 나를 의지처로 삼아라고 돼 있다.
또한 〈쌍윳따니까야〉에 케마라는 존자는 병문안을 위해 자기를 찾아온 비구들에게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색수상행식)을 나라고 여기지 않을 뿐 실제로는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 가운데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케마는 “벗들이여, 물질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감수를 두고 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중략)
벗들이여,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이 나라고 여기지 않지만 ‘나는 다섯 가지 집착된 존재의 다발 안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향기가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그것이 꽃잎의 향기, 꽃받침의 향기, 꽃 수술의 향기라고 합시다.
그는 옳게 말한다고 봅니까?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바른 설명이 되겠습니까?
꽃의 향기라고 설명하면 바른 설명이 될 것입니다”고 보충한다.
다시 말해 무아는 현실적으로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고정불변하는 실체나 본체가 없다, 혹은 실체적인 아(我)가 없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대상으로 한 부처님의 사상적 입장이 무아”임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무상 - 고 -무아’는 불교의 사상체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상 - 고 -무아와 사성제는 어떤 관계일까.
부처님은 여러 곳에서 사성제(四聖諦)를 강조했다.
“비구들아, 여기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 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해 오취온(색수상행식)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아,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중략)
비구들아,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아,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마하박가 1:7).”
연기의 원리에 입각해 가르침을 실천의 체계로 재조직한 것이 사성제임을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삼법인이 사상체계라면, 사성제는 실천체계인 셈이다.
둘 다 연기의 원리에 입각해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