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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 7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2.


-아함경 이야기 7-
    아함경 이야기17

    2. 그 사상. 9. 불방일(不放逸).

    "비구들이여, 밤하늘에서 온갖 별들은 빛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달 빛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달빛은 밤하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여겨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건 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기에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비구들이여, 또 가을 하늘에 한 점의 구름도 없을 때, 해는 하늘에 떠올라 일체의 어둠을 쓸어버리고 눈부시게 시방(十方 ; 동서 남북과 동북, 동남, 서북, 서남, 상, 하.)에 빛을 던지지 않느냐? 그러기에 가을 하늘에서 해는 가장 위대하다고 일컬어진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여러 가지 길이 있건만, 그것들은 모두 불방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온갖 착한 법 중에서 불방일이 최대가 되고 최상이 되느니라." ([相應部經典] 45:146 月. 147 日) 불방일(appamada)이라는 말은 아직 우리 말로서는 익숙해져 있지 못 하다. 정진(viriya)이라고 하면 다 알지만, 그것과는 얼마쯤 뉘앙스가 다르다. 오래 된 경전의 말씀에도 "방일하게 놀았거늘"이라는 표현이 있거니와,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 그 것이 방일이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런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는 자 제와 집중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붓다가 설하신 대로 이해하고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이미 내심의 어지 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 그것이 붓다의 가르침 이요, 또 붓다가 수범하신 길이려니와, 그것을 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 이 아니다. 곧은 길 설하심을 듣자온 바엔 그 길 가고 물러섬이 없어야 하리. 제가 저를 나날이 채찍질하여 궁극의 경지에 이를지로다. 제자들의 게(운문)를 모은 [장로게경]에도 이런 노래가 보인다. 앞에 도 나온 바 있는 '소나'라는 비구가 읊은 것이 이것이다.

    그는 극단적 인 수행을 감행하여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써 보 아도 실현되지 않아서 걱정과 의혹에 사로잡혔다. 그 때 붓다가 거문고 줄의 비유로 그를 타일렀기에, 그는 그 가르침에 의해 차츰 도를 즐길 수 있게 되어 마침내는 열반의 경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 비참한 이야기는 [상응부 경전](4:23 구저가. 한역 동본, [잡아함 경] 39:11 구저가)에 실려 있는 고티카(瞿低迦)의 경우리라. 그는 라자 가하 근처에 있는 어느 바위굴에 있으면서 열심히 수행한 결과 몇 번인 가 해탈의 심경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런 경지 는 지속되지 못하고 그때마다 원상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런 일을 되 풀이하기 여섯 번에 이르러 그는 마침내 칼을 들어 제 목숨을 끊고 말 았다는 것이다. 그 경의 서술은 참으로 비통한 기분에 넘쳐 있어서, 오 늘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족하다.

    그러면 대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퇴전(退轉)해야 하는 것일까? [법구 경]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뿌리만 안 상하여 든든하다면 나무는 베어져도 다시 생기며, 애욕을 뿌리째 끊지 않으면 또 다시 되풀이해 고(苦)는 생기리. 나는 이제 고디카의 보기를 들었거니와, 그런 극단적인 경우를 들어 서 이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아마도 그리 적당한 일은 아닐 터이다. 극 단으로 달려서는 사태를 도리어 그르친다는 것이 원래 불교의 입장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문제를 더 정상적인 경우로 되돌려 놓고 생각할때, 후세의 불교인들이 '아비발치(avaivartika, avinivartanlya)'라고 이른 것이 그것이며, 또 '돈(頓)'이니 '점(漸)'이니 논한 것이 그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아비발치'라고 하면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실 분도 많이 있으려니 와, 이를테면 신란(親鸞)이 한번 믿음을 일으켜서 염불하고자 하는 마 음이 생길 때, 그 사람은 열반이 약속된 이로서 불퇴(不退)의 자리에 드는 것이라고 한 그것이 바로 '아비발치'이다.

    이것은 물론 범어의 음 사요, 의역하면 '불퇴' 또는 '불퇴전'이 된다. 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에 서 여기까지 오면 절대로 타락할 염려가 없다는 경지, 그것이 아비발치 요, 불퇴의 자리요, 불퇴전지(地)이다. 대체 그러면 사람은 어디까지 가야 다시는 전락의 가능성으로부터 모 면되는 것일까? 후세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놓고 저마다 논한 바 있었지 만, 각설이 분분해서 하나의 정론이 나오지는 못했다. 이런 사실을 뒤 집어 놓고 보면 불교인마다 얼마나 불퇴전의 경지를 열망하였던지를 알 수 있으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보아도 그런 경지란 발견되지 않 았다는 증거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 오르든 간에 고디카처럼 누구나 전락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인가? 그 대답 은 일단 "그렇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전락을 막는 오직 하 나의 보장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불방일이다.

    그러기에 붓다는 자주 말 하였다. "비구들이여, 불방일한 비구라면 팔정도를 배워 익히고, 팔정도를 잘 닦아 갈 것임에 틀림없다." 불방일하기만 하면 그 비구는 반드시 팔정도를 익히고, 그것을 반복 하여 닦는 중에 마침내는 열반에 도달하리라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 했다.

    "비구들이여, 온갖 착한 법은 모두 불방일을 근본으로 하고, 다 불 방일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불방일을 모든 착한 법 중에서 최 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팔정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 의 선이 모두 이 불방일로 근본을 삼고 불방일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니까, 나는 온갖 선 중에서 불방일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다, 이런 취지겠다. 그리하여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말씀은 마 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밤하늘의 달과 가을 하늘의 해에 비유하여 힘을 주어 설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불방일을 중시하는 붓다의 입장을 이해한 이 마당에서 꼭 짚 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후대의 불교인들이 즐겨 쓴 말이 거니와, 그들은 불교의 여러 가르침을 개괄하여 돈교(頓敎)와 점교(漸敎)로 구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서 돈기(頓機)와 점기(漸機)의 설을 세우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근기(根機, 소질)는 갖가지이니까 가르침을 듣고 대번에 깨닫 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일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다음 에야 겨우 깨닫는 사람도 있다.

    그 전자를 돈기라 하고 후자를 점기라 하는데, 어느 쪽이 좋으냐 하면 물론 돈기가 뛰어나고 점기는 그만 못 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또 가르침 자체에도 그런 구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같은 붓다의 가르침에도 속히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점 차적으로 궁극의 경지를 향해 끌어올리는 것도 있다. 이 중에서 전자 가 돈교, 후자가 점교인바, 여기서도 돈교가 뛰어난 가르침이고, 점교 는 그만 못한 것이라는 것이 후세 불교인들의 일반적인 견해 였다.

    물론 이런 구분은 대승 불교의 경전까지도 다 붓다가 친히 설한것이 라고 본 데서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경전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들어 가는 우리로서는 진실한 붓다의 가르침이란 [아함경] 이외에는 없다고 보기에 이런 주장에 선뜻 동조하고 나서기가 어렵다. 그러면 붓다는 이 중에서 어느 범주에 속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점교의 부류에 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불방일로 근본을 삼은 바에야 그것을 돈교 속에 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경 ([중부 경전] 107 산수가목건련경. 한역 동본, [중아함경] 144 산수목건련경)에 의하면, 붓다는 일찍이 사바티(舍衛城)의 교외인 이른 바 동원 정사(東園精舍)에 있을 때, 한 수학자의 방문을 받은 적이 있 다. 그의 이름은 못가라나(目健連)라고 하였다.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마하 못가라나(大目健連)와 구별키 위해 이 경에서는 '산수가 못가라나 '라고 불렀다.

    이 수학자가 붓다를 찾아와서 먼저 물은 것은 불교에도 순서를 좇아 배워야 할 길이 있느냐는 문제였다. "대덕이시여, 제가 이 정사까지 오는데도 거쳐야 할 길이 있으며, 또 저의 전문인 수학도 차례를 좇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존의 가르 치심에도 또한 밟아야 하는 순서라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학자다운 질문이라고 할 것이다. 붓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붓다가 설명한 것은 꽤 길거니와,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먼저 계(戒)를 지킬 것, 그리고 오근(눈,귀,코,혀,피부)을 제어 할 것, 다음에 또 정념(正念), 정지(正知)를 성취하여 지혜로써 번뇌를 누 리고 온갖 집착과 불선을 떠나 점차 무상 안온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것. 그것은 명백히 점진적으로 도를 성취해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곁들여 말한다면 그 수학자가 이어서 물은 것은 그런 가르침에 의해 지도되는 제자들은 누구나 열반에 이르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붓다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엄연히 열반이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또 세존께서 스승이 되어 계신데, 어떠한 이유로 이르 는 사람이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붓다가 잘하는 반문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벗이여, 그대에게 라자가하에 이르는 길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자.
    그대는 아마도 그들을 위해 자세히 길을 일러주리라. 그 러나 어떤 사람은 무사히 라자가하에 이르고, 어떤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을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 그렇겠는가?" "대덕이시여, 저는 길을 가르쳐 줄 따름입니다.

    그것을 제가 어찌 할수 있겠습니까?" "벗이여, 그대의 말대로 열반은 엄연히 존재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으며, 내가 스승 노릇을 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제자 중에는 열반에 이르는 사람도 있고, 이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 것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에 불 과한 것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말씀 같은 것은 좀 차갑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으리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여기에는 붓다의 진 면목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아가서 불교 자체의 본질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겠다. "나는 오직 길을 가르쳐 주는 이"라는 말씀을 뒤집어 놓고 볼 때, 붓 다는 결코 전지 전능의 구제자가 아님이 명백하다. 또 신과 사람 사이 를 연결시켜 주는 중개자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을 고백하 고 이 사람(붓다)만 예배하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붓다의 진면목은 스스로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고 정도를 실천하면서 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너희도 이렇게 인식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열반 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가르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붓다의 진면목은 도사(導師)인 점에 즉 지혜와 실천의 선구자요 안내자인 데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결국 그 지혜와 실천에 대한 책임은 붓다가 아니라 그를 따르 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눈을 떠서 존재의 진상을 보는 것은 그들 자신이어야 하며, 마음을 다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도 그들 자신이어야 한다.

    일찍이 붓다는 성구(聖句)를 외는 사람을 비판하여 "남의 소를 세는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이 지 혜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 실에 대해 만년의 붓다는 자주 다음과 같이 설하여 제자들을 격려하기 도 했다.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 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 여기서 섬(dlpa)이라고 한 것은 강의 한가운데 또는 바다의 섬을 가 리키는 말이어서, 모든 것이 유전(流轉)하는 한가운데에서 의지할수 있 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지는 확고한 의지처란 자기 자신과 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법에 의 해 제어되는 자기, 그것밖에는 이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다는 뜻이 다. 이런 것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자기의 의지처는 자기뿐이니 저 밖에 또 무엇을 의지하리오. 자기가 잘 조어되는 때 얻기 힘든 의지처를 얻으리로다. (160) 불교란 본래가 이런 가르침이다. 이것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나타낸다 면 붓다가 설하신 것은 결국 자기 형성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형성의 길에는 이것이면 그만이라는 따위의 한계는 없는 것이므 로, 우리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가지고 일생 동안 걸어가야 하는 것 뿐이다.

    저 사라쌍수 밑에 누워 장차 크나큰 죽음(대반열반)에 들려던 붓다가 그 제자들에게 남기신 최후의 말씀은 [대반열반경] 속에 다음과 같이 전해 온다. "그러면 비구들아, 나는 너희에게 이르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느니라. 불방일하여 정진하도록 하라." 아함경이야기의 다음이야기는 <<문답식>>입니다.

    아함경 이야기18 2. 그 사상. 10. 문답식. "소나여, 어찌 생각하느냐?
    색(물질)은 불변하는 것이겠느냐, 변화 하는 것이겠느냐?" "대덕이시여, 변화하는 것입니다." "만약 변화하는 것이라면, 괴로움이겠느냐, 즐거움이겠느냐?" "대덕이시여, 괴로움입니다." "만약 변화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을 관찰하여 '이는 내 것이 다. 이는 나다, 이는 나의 본질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相應部經典] 22:49 輪屢那. 漢譯同本, [雜阿含經] 1:30 輪屢那) 상응부경전 륜루나 한역동본 잡아함경 륜루나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으로 제자들을 이끌어 갔다.

    그런 몇 가지 보 기를 앞에서도 든 바가 있거니와, 나는 이 문제와 관련시켜 붓다에 대 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생각한다. 왜냐 하면 이런 문답에는 지혜의 스승으로 붓다의 면목이 참으로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점에서 붓다와 예수 그리스도는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예수는 별로 문답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신념으로서 지니고 있는 것을 그대로 상대에게 쏟아 놓아 "저것이냐 이것이냐."의 선택을 사람들에게 바리새인과의 문답 같은 것도 전하고는 있으나, 그런 때에 도 예수는 역시 의연한 자세로 자기의 소신 그대로를 가지고 대답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에 비하여 붓다는 매우 자주 문답을 설법 방식으로 썼을 뿐 아니 라, 그 문답도 대개의 경우는 꽤 긴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하겠 다. 그런 문답을 통해 붓다는 차차 상대를 인도하여 스스로 어떤 결론 에 이르게 하곤 하였다.

    앞에 나왔던 문답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바차라는 외도가 열반에 관해 빗나간 질문을 했을 때, 붓다는 불을 비 유로들어 문답을 거듭하는 중에 어느 덧 열반의 개념에까지 이끌어 들 였던 것이다. 또 어떤 비구가 맹렬한 수도 생활을 계속하는데도 목적을 실현하지 못해서 비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거 문고를 비유로 들어 문답을 시작했다.

    재가 시절 거문고를 잘 뜯었다는 그 비구는 거문고와 관계되는 일에 대해 붓다가 묻는 것에 대답해 가다 가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중도(中道)의 이념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 이다. 그런 문답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왜 그런지 소크라테스 생각이 들곤 한다. 하기야 붓다와 소크라테스를 나란히 세워 놓고 볼 때, 여러가지면에 서 아주 유사한 점이 발견되는 것 같다.

    두 사람 다 믿는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음이 확실하다.
    유럽의 사상가들은 흔히 소크라테스를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지만, 그런 칭호는 그대로 붓다에 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도 또한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신념을 생기게 하고, 또 실천을 하게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이었 던 까닭에 소크라테스처럼 붓다도 그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자주 문답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런 문답에 대해 우리는 몇가지 실례를 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약간 특수한 문답을 보기로 들어 놓았다.

    이 장 (章)의 첫머리에 소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문답의 상대는 앞서 거문고의 비유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소 나이거니와, 붓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것은 그 한 사람만은 아니었 다. [상응부 경전]이나 한역의 [잡아함경]을 조사해 보면, 몇십 회에 걸쳐 같은 양식의 문답이 붓다와 제자들 사이에서 되풀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붓다는 같은 문답 양식을 자주 제자들에게 적용시켰는데, 그럼으로써 일종의 '교리 문답'이 성립되었던 것 같다.

    그 문답식은 얼른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 는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붓다는 어떤 때에는 설법에 곁들여 그 자리 에 있는 비구에게 그것을 시험해 본 적도 있다. 또 어떤 때에는 이제부 터 좌선하기 위해 산중으로 들어가려는 비구에게 그런 질문을 하여 대 답을 하게 한 일도 있다. 그 제재(題材)는 때로 오온(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요소)이기도 했다.

    즉 색(물질, 육체). 수(감각), 상(표상), 해(의지), 식(의식)에 관한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육처(감각 기관) 를 다루기도 했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과 그 대상에 관한 문 제였다. 이런 것을 소재로 하여 이를테면 네 눈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 한 것이냐고 물었으며, 또 네 눈의 대상은 영원한 것이냐 무상한 것이 냐고 따졌던 것이다. 또 앞에 인용한 문답같이 네 색(육체)은 영원이냐 무상이냐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붓다의 질문에 대해 경이 전하는 한에 서는 어느 비구나 다 거기에 알맞은 대답을 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당 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물음에는 누구라도 그렇게밖에는 대답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 이 무상 - 고 - 무아로 연결되는 사고 방식은 붓 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이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것을 고쳐 생각 해 보면 붓다는 그 제자들이 이런 기본적인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문답을 통해 끊임없이 시험해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후세의 불교인들이 주장한 '삼법인(三法印)'또 는 '사법인'이다. 법인(dharma-uddana)이란 바른 법의 표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불교가 그 밖의 종교나 사상과는 다른 중요한 특징을 섭송 (攝頌), 즉 짧은 운분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제 그것을 한역에 의해 표시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1) 제행 무상(諸行無常)
    2) 제법 무아(諸法無我)
    3) 열반 적정(涅槃寂靜) 이것이 이른바 삼법인이다.
    여기에 다시 4) 일체 개고(一切皆苦) 를 추가해서 사법인이라고 일컫는 수도 있다.

    후세에서 불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교의 사상적 성격을 설명하는 경우, 흔히 이 삼법인이나 사법인을 들었다. 따라서 오늘날 불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을 터이며, 그렇게 유명해진 만큼 이 삼법 인 또는 사법인으로 나타난 불교 파악은 아주 요령 있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먼저 제행 무상이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

    물론 그 밑받침이 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연기(緣起)의 법칙이다.
    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 떤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났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설인바, 그것을 단적 으로 표현한 것이 이 제행 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법 무아란 불교가 주장하는 인간론으로서 그것을 뒷받침 하는 것은 제 1 명제인 무상관이다. 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제행 무상'의 존 재론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 또한 무상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이 인간 관이라고 할수있다.

    그리고 셋째 명제인 열반 적정은 불교가 이상적인 경지라고 여기는 열반을 가리킨다.
    이것을 목적론 또는 행복론이라고 하여도 되리라.
    그런데 이 삼법인에는 붓다가 그처럼 역설했던 고(苦)에 대한 주장이 빠져 있다.
    즉 이 인생을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하는 소견이 없는 것이 다. 그래서 일체 개고의 명제를 세워, 이것을 삼법인에 추가하면 사법 인이 되는 것이다.

    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의 개념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후대의 불 교인들에 의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특징을 해명하고자 해서 정비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붓다 자신은 불교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추측하건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앞의 문답 에서 사용되었던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제까지 별로 지적하는 학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여 이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 무상 - 고 - 무아의 계열과 앞에서 설명한 사제의 체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의 체계란 붓다가 그 가르침의 뼈대가 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자주 제자들에게 역설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사실이 또 그러해서 이것 을 알고 이것만 실천한다면, 붓다의 제자로서 뜻한 바 목적을 달성할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 그 밖의 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번거롭 게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제법은 어 디까지나 실천의 체계이므로, 적어도 그 표면에는 붓다의 존재론이나 인간론은 나타나 있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것들은 그 체계의 밑바닥에 깔려있을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 체계로서가 아니라 사 상의 체계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되느냐가 문제가 되는바, 그것이 무상 - 고 - 무아의 사상 계열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 제 1 항목은 존제에 대한 해석이요,
    제 2 항목은 인생을 해석한 결론이다.

    그리고 셋째 것은 인간 해석에 대한 붓다의 주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후세 불교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삼법 인 또는 사법인의 주장은 이런 붓다의 사상을 고스란히 계승한 것이라 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붓다가 제자들을 상대로 문답한 이 내용 은 불교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 것 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붓다의 문답에 또 하나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붓다가 이런 문답식을 자주 응용 문제의 형태로 비구들에게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이를테면 어느 경([상응부 경전] 22:151 아)은 이런 문답을 전해주 고 있다.

    "비구들아,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에 집착함으로 말미암 아, 무엇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내가 있다는 생각)은 일어나겠느 냐?" 현명한 독자는 곧 이해하실 줄 믿거니와, 이 질문은 무상 - 고 - 무 아의 문답식을 거꾸로 하여 대답해야 될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저 문 답식에서는 거침 없이 대답하던 비구들도 이 응용 문제에는 반드시 그 렇지만은 못했던 것 같다.

    이 밖에도 비슷한 질문의 보기가 몇 가지 나 와 있으나, 거기서도 그들은 대답이 막혀 붓다의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 였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우리 법의 근본이시며, 우리 법의 안목이 십니다. 원컨대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설하시옵소서." 이것이 답변에 막힌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청할 때에 말하는 유형화 된 표현이었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 청에 따라 해답을 설해 주었다.
    "비구들아, 색(물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색에 집착함으로 말미 암아, 색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나느니라. 또 수(감각)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표상)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행(의지)이 있음 으로 말미암아, 식(의식)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집착하고 탐함으로 말미암아 아견은 일어난다고 알아야 되느니라." 이렇게 설한 붓다는 다시 한 번 그 문답식으로 돌아가서 비구들에게 묻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면 비구들아,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색은 영원하겠느냐, 무상 하겠느냐?" "대덕이시여, 무상하나이다." 이리해서 앞에 인용한 것과 같은 문답식이 반복되어 갔다. 이 문답식 이 되면 제자들은 막히는 일이 없이 아주 잘 대답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 문답식을 평소에 배워 익히고 있었던 까닭일 것이다.
    이런 문 답식 교육은 이 문제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제'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잘 외고 있어서, 붓다가 물을 때에는 언제나 "이 는 고(苦)이다." ,

    "이는 고의 발생이다." ,
    "이는 고의 멸진이다." ,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이런 문답식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주목한 학자가 없는 듯하다.

    주의해서 잘 읽어 보면 지혜의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진면목은 이런 곳 에 도리어 선명하게 나타나 있는 듯하다.

    "아함경이야기"의 다음 이야기는 <<착한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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