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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 6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2.


-아함경 이야기 6-
    아함경 이야기14

    2. 그 사상. 7. 나도 밭을 간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지혜는 내가 밭 가는 모습. 나는 몸에서 입에서 마음에서 나날이 악한 업(業)을 제어하나니 <===업(karma);어떤 결과의 원인으 그는 내가 밭에서 김 매는 것. 로 생각되는 행위 일체. 이것 내가 모는 소는 정진이니 을 행위와 말과 생각으로 나누 가고 돌아섬 없고 어 신(身), 구(口), 의(意)의 행하여 슬퍼함 없이 '삼업'이라 한다.

    나를 편안한 경지로 나르도다. 나는 이리 밭 갈고 이리 씨 뿌려 감로(甘露)의 열매를 거두노라. ([相應部經典] 7:11 耕田. 漢譯同本, [雜阿含經] 4:11 耕田) 상응부경전 경전 한역동본 잡아함경 경전 이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경 중의 하나이다. 그때 붓다는 마가다국 의 시골인 에카사라(一葦)라는 마을에 있었다. 그 마을 이름은 다른 경 에도 나오는데, 붓다가 여러 신자들을 상대하여 법을 설하고 있을때 악 마가 도전헤 왔다는 것도 그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어쨌든, 붓다와 그 제자들은 어디에 살든지간에 하루하루의 새활을 탁발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어서, 이런 탁발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경이다. 그 아침에도 붓다는 어느 집 앞에 서서 탁발을 했다. 그것은 바라문 의 집이었는데, 마침 씨 뿌리는 철이었으므로 그 집 주인인 바라문은 마을 사람들을 시켜서 그 준비를 서둘고 있는 참이었다. 바라문이란 예전부터 내려오는 사제자(司祭者)여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그 소임 이었으나, 붓다 시대에는 아마도 바라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 농사 를 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붓다가 탁발 온 것을 보자 앞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는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내가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소. 당신도 또한 스스로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당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것은 아마도 날카로운 어조의 도전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생각건 대 그 바라문은 종교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므로, 그에게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일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이런 생각이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이 도전에 대해 붓다는 어떻게 응수했던가?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기이한 인상을 주는 말씀으로 나타났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간다. 나도 밭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느니라.
    " 그것을 들은 바라문이 자기의 귀를 위심하는 듯 어리둥절해 하는 모 습이 눈앞에 선하다. 아마 그는 얼마 동안 붓다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었으려니와, 이윽고 다시 물었다. "사문이여, 우리는 누구 하나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소. 대체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의 소는 어 디에 있소? 당신이 밭을 간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나는 묻고 싶 소." 그때 붓다가 대답한 말씁이 앞에 든 게(偈)로 표현되어 전해 오는 것 이다. 거기서 붓다는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信仰)이요, 내 모습은 지헤가 그것이라고 했다.

    또 나날이 악업(惡業)을 제어하는 것은 곧 김매는 작 업이며, 내 소는 무엇이냐 하면 정진(精進)이 그것인바, 이 소는 한 걸 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가 물러섬이 없고, 또 그 행한 결과에 대해 뉘 우쳐야 할 일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내 농사요, 그 수확은 감로(amrta)의 열매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감로는 '불사(不死)', '천주(天酒)'라고도 번역된다. 그것은 꿀같이 달고 향기가 높으며, 한 번 먹으면 죽는 일이 없다는 전설이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신(神)의 음식이라고 생각되었거니와, 불교에서는 이것으로써 그 궁극의 경지를 나타내는 일이 많다. 그런데 붓다가 "나도 밭을 간다."고 대답한 것은 아마 그 순간에 떠 오른 즉흥적인 말씀이었겠지만, 참으로 의미 심장한 바가 있다고 하겠 다. 그 뜻을 해명하면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 드 러나게 된다고 여겨지므로, 이제 그것에 대해 얼마간 설명을 해 볼까한 다. 대체로 인도 게르만 어족 계통의 언어에서는 대지를 개발하는 것과 인간의 정신을 계발하는 것이 같은 낱말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영어에서 이것을 말할 때 cultivate가 그것이다. 또 문화와 농업이 어 근을 같이하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문화가 cultute인 데 대해, 문화, 또는 인간 정신의 계발이 언어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그 양자는 기본 구조 를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문화를 논하는 학 자 중에는 문화의 근본 원리가 경작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모 양이지만, 그것은 결코 근거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대지를 갈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어떻게 경작하고, 어떻게 수확을 올리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그것을 논할 만한 자격이 없으나, 구태 여 말한다면 그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 사꾼에게 주어진 것은 거친 대지이며, 그것을 인간이 개간하는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잡초와 잡목을 제거하고, 크고 작은 돌맹이들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보습을 대고 갈아야 할 것이며, 토양이 곡식의 성장에 적당치 못하다면 그 개량도 꾀해야 할 것이다. 또 물에서 떨어져 있을 때는 관개 시설도 서둘러야 하리라.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논밭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씨가 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비와 햇볕과 김매기, 거름주기 같은 것이 있음 으로써 겨우 수확까지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런데 문화니 교양이니 인간 정신의 계발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 보 면, 그것 또한 농사 짓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생긴 대로의 인간이 란 자연의 대지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 과 육체는 마치 잡초와 잡목에 뒤덮인 황무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잡초와 잡목을 뽑고, 크고 작은 돌멩이를 치우며, 토양도 개량해야 한 다. 그 때 거칠던 인간은 비로소 아름다운 논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씨가 뿌려지고 적절한 손질이 베풀어질 때, 인간은 아름다운 땅 으로서 훌륭한 수확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붓다도 기실 이런 일을 하고있기에 "나도 밭을 간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인간 개간의 일을 하자면 먼저 지혜의 보습으로 갈아야 한다. 즉 인간의 무지 몽매함을 제거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미망이 있고, 탐 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전도가 있다. 그리고 잔인성이 있고, 극단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

    붓다의 설법이야말로 이런 황무지를 지혜의 모습 으로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전([상응부 경전] 42:1 포 악. 한역 동본, [잡아함경] 32:6 악성)은 붓다가 어떤 촌장을 교화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사나이는 마을에서도 매우 소문이 나쁜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스 스로 걱정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대덕이시여, 사람들은 나를 '포악하다, 포악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까닭에 그리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는 같은 인 간이면서도 '얌전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도 있거니와, 대체 어떤 이 유로 그런 사람은 그런 말을 듣는 것이겠습니까?" 붓다는 거친 그 사람을 자비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 씀했다. "촌장이여, 여기에 탐욕을 지닌 사람이 있다 하자.

    그는 탐욕 때문 에 남의 노여움을 사야 하며, 남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 게 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 아니냐? 또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다고 치자. 그는 증오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다른 사람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 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논리의 전개는 붓다의 독특한 설명 방식이다. 간명하다고 하기 보다는 좀 지루한 느낌이 없지 않다. 분석적이어서 단계에 따라 끌어 올리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에 덮여 있는 눈을 뜨게 하는데 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촌장이여, 탐심, 증오심, 우매함을 떠나 버린 사람이 여기 에 있다 하자. 그는 그런 것들을 떠난 까닭에 누구의 노여움도 사지 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남의 노여움에 자극되어 자기가 성내는 일도 없으리라.

    그 때에는 모두 그를 일컬어 '얌전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 아니냐?" 이것은 바로 인간의 개간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 몽매에 덮여 있는 인간 정신의 황무지에서 탐욕을 갈아 엎고, 증오심을 베어 내며, 어리석음을 뽑아 내서, 거기에다 씨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기에 씨가 뿌려진대도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대지를 경작하는 데에도 적당한 비와 적당한 햇볕과 때에 맞는 거름과 때에 맞는 제초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인간 정신의 경작 또한 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일 중에서 앞에 나온 게(偈)가 들고 있는 것은 계율과 정진이다.

    즉 나날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 (三業)에서 악을 제어하는 일, 그것이 "내가 김매는 일"이라고 붓다는 말씀했다. 불교의 술어로 말한다면, 계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 다. 대지를 경작할 때도 일단 개간한 땅이라고 하여 내버려 둘 수는 없 는 문제이다. 잠시라도 눈을 땅에서 뗀다면, 모처럼 자라던 곡식도 순 식간에 잡초로 뒤덮여 버리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도 어 느 만큼 계발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리하다 가는 악성의 잡초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 하여 신, 구, 의 삼업에 걸쳐 철저한 제초 작업이 나날이 되풀이 되어 야 하는 것이다. 계(戒)라는 말은 우리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웬지 강요된 규제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계를 강요된 규제 사항으로 생 각하는 것은 그 받아들이는 태도에 잘못이 있는 것 같다. 이 말의 원어 인 '시라(si-a)'라는 말은 습관, 성격의 뜻이다. 예로부터 불교인들은 흔히 이것을 설명하여 소극적으로는 '악을 막는 일(防非止惡)', 적극적 으로는 '선을 향상시키는 일(諸善增上)'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국 나쁜 버릇을 없애고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성격을 개조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행 위(身)와 언어(口)와 생각(意)에서 나날이 악의 풀을 제거해 감으로써 뿌려진 진리의 씨를 잘 자라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계요, 성격 을 개조해 가는 불교적인 방식인 것이다. 무릇 모든 종교에는 성격을 전화시키는 그 나름의 방식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낡은 것은 이미 지나가고,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 모든 종교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교에도 그런 방식이 있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어떤 경지로 뛰어오름으로써 만사가 끝나 버리는 그런 방식은 결코 아니다.

    나는 깨달았기에 이제 부터는 수행할 필요도 없고,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다는 그런 방식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작의 방 식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개간하고, 법의 씨를 뿌리는 것은 기실 그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제초 작업으로 항상 성격 향상의 노력 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고 돌아섬이 없고, 행하여 뉘우침이 없는" 정신의 지속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마침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비유로밖에 설해져 있지 않다. 감로, 즉 신들에게 바쳐지는 달콤한 술이라고. 이것은 이것 대로 다른 항목에서 설명되어야 하겠다. 아함경이야기 다음회의 이야기는 <<열반(涅槃)>>입니다. 아함경 이야기15 2. 그 사상. 8. 열반(涅槃). "사리푸타(舍利弗)여, '열반, 열반' 하고 말하지만, 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 이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相應部經典] 38:1 浬槃) 상응부경전 이반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불교인이 기어이 실현코자 하는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반(nibbana)이라 일컬어지는 경지이다. 이상의 경지는 사람과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죽어서 천국에 태어 난다든지, 제천(諸天: 여러 신)이 있는 곳에 왕생한다든지 하는 것을 이상으로 그리는 종교도 있다. 또 현세에서의 번영이나 행복을 궁극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중에서 열반을 인간의 이상으로 여기는 불교의 사고 방식은 반드시 그 유례가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시대의 인도에 그리 보편화되어 있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경([중부 경전] 72 파차구다화유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 34: 24 견)에 의하면, 붓다는 바차(婆蹉)라는 외도의 방문을 받아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먼저 그 외도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 적인 문제에 대해 붓다의 소견을 물었고, 붓다는 그런 문제가 해탈, 열 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견해 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차는 문제를 바꾸어 그 해탈, 열반에 대해 따지고 들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그 해탈한 사람은 어디에 가서 태어나는 것입 니까?" "바차여, 그것은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안 간다는 것입니까?" "가서 태어난다든지, 태어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 다." 그는 열반에 대해 물었던 것이지만, 그 착안점이 전혀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해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붓다 쪽에서 그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생각을 유도해 갔다. 경전의 이런 서술로 보아도, 이 열반이라는 개념은 그 당시의 인도에서는 아직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개 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붓다는 어떤 질문으로 그 외도를 이끌어 갔는지 살펴보자. "바차여, 그대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 하면 이 가르침은 심히 깊고, 알기 어렵고, 미묘하여,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다른 사상을 따르는 이나 다른 실천 법을 닦는 이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바차여, 만약 여기 에 불이 타고 있다 할 때, 그대는 그것을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독자들은 아마도 이상스런 질문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나, 이런 데에 도 현실을 직시해 가는 붓다의 사상적 자세가 보인다. 물론 바차는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바차가 아니더라도 이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 으리라. 그러자 붓다의 이상한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 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 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 었으므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이 이상스런 문답으로 붓다는 열반을 설명해 갈 터전을 닦았던 것이 다. 그래서 붓다는 순순히 이런 말씀으로 타일렀다. "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 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 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 하는 것 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난 바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일 생을 통해 충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쨌든 여기에 전개된 문답은 불교의 이상인 열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더욱이 거기에 사용된 비유는 단순한 비유로만은 보기 어려울 정 도로 열반의 개념에 밀착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저 열반이란 그 원어(Pali, nibbana ; Skt.,nirvana)의 뜻을 캐어 볼때 '불이 꺼진 상 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를 붓다는 어디로부터 가져왔던 것일까? 이런 문제를 캐기 란 쉽지 않겠지만, 요컨대 그 출처는 붓다의 사상 자체에 있었던 것이 라고나 해야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아주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연소'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다. 유럽의 불 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산상 수훈'에 비교하여 '산상 설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바 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로부터 다시 마가다 국의 우루베라 - 정각한 곳 - 로 돌아온 붓다는 거기서 많은 제자를 얻 었다. 그 수효는 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제자들을 이끌고 붓다는 다시 그 나라의 수도인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나갔던 것이지만, 그 출 발에 즈음하여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간 일이 있 다. 산상에 올라서 바라보매, 추억 많은 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 북쪽으로는 아득히 가야(伽耶)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서 흐르는 것은 네란자라 강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그것을 따라 멀리 남녘 으로 눈을 옮기니 정각을 성취했던 고장이 보였다. 이 장한 조망을 발 아래 놓고 붓다는 새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그것은 붓다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는 고조된 욕 망을 말하는 데 '갈애'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찬가지 로 욕망의 고조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연소'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을 따라 오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 '욕망의 불꽃'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 난 용어로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 인 표현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 앉혀야 한 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 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 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至福) 이니 하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 멸지(灰身滅智 ; 육체적,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끊 어진 상태.)의 경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눈을 돌이켜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글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자푸카다카(閻浮車)라는 외도가 사리푸타를 찾아와서 벌인 문 답이다. 그 사람은 낡은 주석에 의하면 사리푸타의 조카라고 되어 있거 니와, 어쨌든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듯해서, 잔푸카다카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관해 꼬치꼬치 물은 데 대하여 사리푸타는 하나하나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은 붓다의 설명 방식과는 약간 달라서 정의적, 주석 적인 점은 있으나,
    역시 붓다의 수제자답게 참으로 명쾌 하다고 하여야겠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열 여섯 개의 경에 기록되어 그것들이 일련의 경군(經群;염부거상응)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의 내용이 이 열반에 관한 문답이다. 흔히들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는 것이 이 외도의 질문 내용이었다.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면,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 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사리푸타 는 이렇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그리고 사리푸타는 "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명쾌한 주석이어서, 열반에 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여기에 딴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을 애매 모호하게 만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 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에 의해 현대인들은 어쩌면 열반 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인간의 이상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불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이상이 불교만의 주장이었다면, 우리는 도리어 의 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 관념을 검토해 보아야 했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널리 세계의 온갖 사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현대인의 입 장에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언어 표현상 가장 비슷한 것은 스토아(Stoa)의 철인들이 인간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관념이다. 그들도 또한 인간의 불행은 격정(pathos)에 의해 이성이 방해되고 영혼이 구속됨으로 써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격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최고의 이상이라 여겨, 그것을 아파테이아라 고 불렸다. 또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kouros)가 '아타락티아(ataraktia)'라고 부른 경지도 그것에 가깝다.

    그것은 어지러움이 극복된 내적 평화의 상 태를 말한다.
    저 쾌락주의자들이 그려 낸 인간의 최고 경지가 이런 것 이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근대에 와서 칸트(D ant)가 말한 '자유'의 개념 또한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그것이 자율적 자유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 때 그것은 방종의 타율이라고 했다. 그런 것에서 우리는 열반의 생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일찍이 붓다는 어떤 경([상응부 경전] 1:63 갈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예속시키도다.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 기에서 "소멸하여"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 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아함경이야기의 다음이야기는 <<불방일(不放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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