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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佛陀)와 불전(佛傳)-비구니 교단의 성립과 발전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3.


-비구니 교단의 성립과 발전-
    1) 비구니 교단의 성립

    불교교단에서 비구니 상가(Samgha, 僧伽)의 성립은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비구니 상가가 언제 성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비구 상가보다 나중에 성립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처음 붓다는 여성의 출가에 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이와 같은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불교교단에서 여성출가자, 즉 비구니가 출현했다는 것은 종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불교교단에서 최초의 비구니는 붓다의 양모였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ī, 摩訶波闍波提瞿曇彌)였습니다. 팔리어 율장에 의하면, 슛도다나왕이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붓다는 까삘라밧투(Kapilavatthu, 迦毘羅衛城)의 교외에 있는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동산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붓다를 찾아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녀는 세 번씩이나 교법과 계를 베풀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받아들여지지 않아 슬픔의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 붓다는 까삘라밧투를 떠나 베살리(Vesālī, 毘舍離城)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Mahāvana, 大林)의 꿋따가라살라(Kūtagārasālā, 重閣講堂)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마하빠자빠띠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다음 붓다의 뒤를 좇아 베살리의 중각강당까지 찾아왔습니다. 이때 같은 뜻을 가진 사캬족의 여인들도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맨발로 걸어서 발은 부어터지고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마하빠자빠띠와 사카족의 여인들이 정사의 문밖에 선 채로 출가의 허락을 재차 간청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난다가 세 번이나 붓다께 그들의 뜻을 전했지만 붓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난다는 다시 붓다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인이 이 가르침을 따라 출가하여 수행한다면 남자와 같이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난다야, 물론 그럴 수 있다.” 이 대답을 듣고 용기를 얻은 아난다는 다시 마하빠자빠띠가 붓다께 바친 은혜를 말하고 꼭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몇 번이고 간청을 했습니다. 붓다는 마침내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덟 가지 조건이 따랐습니다.

    첫째, 출가하여 백년의 경력을 가진 비구니(比丘尼, 尼僧)일지라도 바로 그날 자격을 얻은 비구(比丘)에 대해서는 먼저 합장, 존경을 해야 한다.

    둘째,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 안거(安居)를 해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니는 한 달에 두 번씩 비구 승단으로부터 계율의 반성[布薩]과 설교를 들어야 한다.

    넷째, 비구니는 안거가 끝난 뒤 남녀 양쪽의 승단에 대해서 수행이 순결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다섯째, 비구니가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남녀 양쪽의 승단으로부터 반 달 동안 별거(別居) 취급을 당해야 한다.

    여섯째, 비구니의 견습(式叉摩那, Siksamānā)은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남녀 양쪽의 승단으로부터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의식(儀式)을 받아야 한다.

    일곱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구니는 비구를 욕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여덟째,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

    아난다는 마하빠자빠띠에게로 가서, 만약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리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젊은이가 머리를 감고 아름다운 꽃을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나는 이 여덟 가지 조항을 한평생 소중하게 지켜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이 여덟 가지 조항(尼八敬戒, 八重法이라고도 함)을 받아들임으로써 마하빠자빠띠는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그때 붓다는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난다야, 만약 여성에게 불교교단에 출가가 허용되지 않았더라면 수행의 순결이 유지되어 1천년 동안 정법(正法)이 존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이 출가하게 되었으니, 수행의 순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정법은 5백년밖에 존속되지 못하게 되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집안에는 도적이 침범하기 쉽다. 또 논밭에 물것이 성하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출가하게 되면 수행의 순결은 유지되기 어렵다. 큰 연못 둘레에 미리 둑을 쌓아 물의 범람을 막듯이, 나는 비구니들에게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베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 교단에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었습니다. 여성을 독립된 인격으로 볼 경우, 남성과 같이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붓다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비구니들 중에서도 수행과 학덕이 뛰어난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테리가타(Therīgāthā, 長老尼偈)]의 예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붓다는 수행에 의해서 여성도 성자(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여성의 이름도 몇 사람 기록되어 있습니다.

    2) 비구니 교단의 성립 시기와 그 배경

    불교교단에서 비구니 상가가 성립된 것은 붓다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봅니다. 일부 학자들은 붓다 성도 후 5년째에 비구니 상가가 성립되었다고 합니다만 이것은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마하빠자빠띠가 처음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성도 후 5년째 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베살리의 중각강당에서 비구니의 출가를 승인한 것은 아난다 존자가 붓다의 시자로 책봉된 이후임이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아난다는 붓다 성도 20년 후부터 시봉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법인 스님은 비구니 교단의 성립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구니 승가는 부처님 성도 후 2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즉 부처님의 이모이며 양모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붓다 성도 후 15년경이며, 허락을 받은 것은 아난 존자가 붓다의 시봉을 들기 시작한 첫 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미 비구 승가와 재가신도가 탄탄하게 형성된 후에 비구니 승가가 성립된 것이다.”

    이와 같이 법인 스님은 마하빠자빠띠가 붓다께 출가를 간청 드린 것이 붓다 성도 후 15년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간청은 성도 후 5년경이고, 실제로 출가를 허락한 것은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여인의 출가를 처음부터 승낙할 경우 당시 바라문들의 극심한 비난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잠롱 통프라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붓다는 여성의 출가를 허가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첫째, 붓다는 여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라한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둘째, 여성은 위험, 특히 나쁜 남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승려들에게 부담을 더하게 된다. 비구니들은 비구들의 사찰에서 떨어져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그들이 비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불교를 반대했던 다른 종교, 특히 바라문교에게 불교를 공격하도록 기회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바라문교의 사회 제도를 뒤엎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바라문 사회에서 여성들은 점점 더 불교도가 되어 갔다. 이것은 바라문의 제도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라문들은 온갖 수단으로 방해할지도 모르며, 자신의 새로운 교리를 전파하는 데 어려움이 될 수도 있었다. … 이와 같이 그는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갔다. 마침내 그의 속도 조절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를 낳았다. 사실, 붓다는 먼저 바라문들의 반응을 타진해 보기를 원했었다. 왜냐하면 성직을 요청했다는 마하빠자빠띠의 소문은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바라문들은 어떻게 했는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붓다는 그녀가 요청했던 것과 같이, 그녀와 석가족 여성 일행의 입단을 허가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비구니의 상가 입단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여덟 가지 조항’ 즉, 팔경법(八敬法, Attha-garudhammā)은 상당히 후세에 정리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팔경법의 내용 중에는 비구니 교단이 성립되지도 않았는데, 식차마나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 등을 예로 들어 붓다께서 직접 제정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팔경법의 내용과 합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전제 조건을 붓다께서 제시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붓다께서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바라문 사회의 극심한 반발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방편에서 마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행의 팔경법은 부파불교 시대에 첨가 보완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비구니에게 요구한 팔경법 때문에 불교에서는 여성을 폄하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여성 출가자 수용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적 여건에서 볼 때 거의 혁명적인 사건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도의 사회구조와 반여성적 풍토는 여성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었으며, 특히 종교행위를 가장 신성한 행위로 간주했던 인도인의 생활방식에서 여성의 종교생활은 커다란 도전이었고 파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여성의 몸 그대로는 성불(成佛)할 수 없다는 ‘여성불성불론(女性不成佛論)’에 근거한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여성변성남자성불론(女性變性男子成佛論)’ 등을 말하는 문헌들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붓다의 참뜻이 아님은 거의 확실합니다.

    3) 비구니의 출가 설화

    마하빠자빠띠에 이어서 붓다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비롯하여 사캬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했는데, 이들과 그 밖의 여성 출가자들을 합하여 비구니 교단이 발족되었습니다. 비구니 중에는 남성 출가자를 능가하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서 폭넓은 활동을 하는 자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들 비구니의 설화는 팔리어 경전인 [테리가타]에 기록되어 있는 이외에도 여러 경전과 그 주석서에도 가끔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성 출가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서는 갖가지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웃자이니의 왕녀 수메다는 어려서부터 붓다의 가르침에 접하고, 정신적으로 충실한 생활을 찾아서 결혼식 직전에 풍요로운 검은 머리를 잘라 버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또 빔비사라왕의 교계사(敎戒師)의 딸인 소마는 젊은 나이에 출가하여 ‘어둠의 숲’에서 명상을 하던 중, 유혹하러 나타난 악마를 일언직하에 물리치고 있습니다. 이들 여성은 원래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등을 돌려, 이상적인 경지에 마음을 안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한편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그 비참한 환경에 절망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았습니다. 바라문의 딸인 뭇타는 용모가 괴이한 가난한 남성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결국 남편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소나와 바다마타는 나이가 들어 늙게 되자 애지중지하여 키운 자식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됨으로 교단에 의탁하고자 출가했습니다.

    사랑하는 육친과의 생각지 못했던 이별로 인하여 출가한 여성도 많았습니다. 사왓티에 사는 상인의 딸인 빠따짜라(Patācāra)는 부모의 뜻에 맞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여 집을 나갔지만,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독사에게 발을 물려 죽고, 또 남은 두 자식도 하나는 독수리에게 채여 가고 하나는 강물에 쓸려 들어가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양친과 형제들 모두가 태풍으로 쓰러진 집에 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픔에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헤매다가 붓다에게 구원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빠따짜라가 어느 날 항아리에 물을 길어 발을 씻을 때, 흘려보낸 물이 처음에는 조금 흘러갔고, 두 번째는 좀 더 앞에까지 흘렀으며, 세 번째는 더 앞에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사라져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안 그녀는 사람의 수명도 비록 장단은 있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정각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또한 같은 사왓티의 가난한 가정의 딸 끼사 고따미(Kisa Gotamī)는 어쩌다가 자신의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그 아이를 소생시킬 수 있는 약을 구하려 다니다가 붓다를 만났습니다. 붓다는 이제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가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이를 소생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집을 찾아다녔지만 물론 조건에 맞는 겨자씨를 얻지 못하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어 슬픔을 극복하고 비구니 교단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여성 출가의 설화는 이밖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 출가자에 비해서 지켜야 할 계율이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출가에 진력한 아난다가 나중에 비난을 받는 등, 불교 교단 통제 상의 갖가지 문제를 야기 시킨 일을 기술한 문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