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가나카와 마하까싸빠의 귀의-
1) 디가나카의 귀의 역사적으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불교교단에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붓다께 귀의한 사람은 디가나카(Dīghanakha, 長爪)였습니다.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조카로서 숙부인 사리뿟따가 붓다께 귀의한지 겨우 반달이 지났을 때 붓다를 친견했습니다. 팔리어 디가나카(Dīghanakha)라는 말은 ‘긴 손톱’이라는 뜻이며, 한역에서는 장조(長爪)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마 손톱을 깍지 않고 길게 길렀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바라문 가문의 출신자였지만 바라문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던 회의주의자 혹은 절멸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라문의 전통에서 보면 이단자였던 것입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그를 편력자(遍歷者)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디가나카는 그의 숙부 사리뿟따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대체 붓다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려고 붓다를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수까라카따(Sūkarakhatā, 豚崛洞, ‘멧돼지 동굴’이라는 뜻)에서 처음으로 붓다를 친견했습니다. 디가나카와 붓다의 대화는 팔리어로 씌어진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中部) 제74경 디가나카 숫따(Dīghanakha Sutta, 長爪經)에 실려 있습니다. 이 팔리어 경전과 대응하는 한역은 잡아함경(雜阿含經) 34권 장조경(長爪經)7)과 별역잡아함경 11권 5경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에 의하면, 그는 붓다를 친견한 뒤 곧바로 “나는 일체의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자신의 회의주의적인 생각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서는 “당신은 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붓다는 “주의주장에는 일체를 긍정하는 것, 일체를 부정하는 것, 일부를 긍정하는 것,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있으나, 이 중 일체를 긍정하는 견해는 탐욕과 계박(繫縛)과 집착에 가깝고, 또 일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적이 생기고 장애가 나타나므로 이 두 견해는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경전에서 붓다는 그를 악기베싸나(Aggivessana, 火種)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한역 『장조경』에 의하면, 붓다의 설법을 듣고 디가나카는 “티끌과 때를 멀리 떠나 진리의 눈이 깨끗하게 되어, 법을 보아 법을 얻고 법을 깨달아 법에 들어갔다. 모든 의혹을 끊되 남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바른 법, 율에 들어가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붓다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비구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는 “곧 선래(善來)비구가 되어 ‘착한 남자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바른 믿음으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까닭’을 생각하고 내지,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팔리어 『디가나카 숫따』에서는 그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재가불자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전의 팔리어 경전에서는 디가나카(長爪)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재가 신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전의 한역 아함경에서는 그가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전승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마하까싸빠의 귀의 붓다께서 입멸하신 뒤 실제로 교단을 이끌었던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가 붓다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붓다의 저명한 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가장 엄격한 두타행(頭陀行, dhutavādānam)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에 ‘두타제일(頭陀第一)’ 혹은 ‘행법 제일(行法第一)’이라고 불리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마가다국의 마하띳타(Mahātittha) 바라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까삘라(Kapila) 바라문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수마나데비(Sumanādevī)였습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삡빨리(Pippali)였습니다. 그가 성장했을 때 그의 부모들은 결혼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결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부모들의 강요를 회피하기 위해 그는 아름다운 황금 인형을 만들어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다면 결혼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들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밧다 까삘라니(Bhaddā Kāpilānī)라는 여인을 사가라(Sāgala)에서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비록 결혼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이틀 밤을 함께 지냈지만 꽃으로 만든 사슬을 경계로 서로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삡빨리는 막대한 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혼자서 많은 양의 향료를 사용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엄청나게 광대하였습니다. 그 토지에 농사를 짓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열여섯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가 들에 나가서 농부들이 밭갈이 할 때, 기어 나오는 벌레들을 새들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저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출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같은 시간 그의 아내 밧다(Bhaddā)도 까마귀가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고, 이 때 밖으로 뛰어나온 씨앗들이 말라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생명을 잃는 아픔을 생각하며, 그녀도 출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둘은 함께 출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각자 머리를 깎고 황색 가사로 갈아입고, 발우를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함께 같이 길을 걷다가 교차로에 도착하여 서로에게 장애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남편은 오른쪽으로 아내는 왼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아내와 헤어져서 혼자서 여행을 계속하던 삡빨리는 어느 날 붓다를 친견하게 됩니다. 그때 붓다께서는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의 간다꾸띠(Gandhakuti, 香室, 부처님의 거실)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지진이 일어날 징후를 아시고, 세 가부따(gāvuta, 길이의 단위, 1/4 由旬)를 걸으신 다음, 라자가하(Rājagaha)와 나란다(Nālandā) 사이에 있는 바후뿟따까(Bahuputtaka, 多子) 니그로다(Nigrodha, 榕樹) 나무 밑에 앉으셨습니다. 이 여행으로 붓다의 명성은 더욱 빛이 났다고 합니다. 삡빨리(이제부터는 마하 까쌋빠라고 부른다)는 붓다를 발견하고, 곧바로 붓다를 자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붓다께서 그를 굴복시키기 전에 그는 이미 붓다의 위대함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그를 자리에 앉도록 하고 세 가지 설교를 한 다음, 그에게 구족계를 주었습니다. 붓다와 함께 라자가하로 돌아오던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몸이 위대한 성자의 상징인 32호상 가운데 일곱 가지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붓다는 길옆의 어느 나무 아래 앉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접어 붓다께서 앉을 수 있도록 바닥에 갈아드렸습니다. 붓다께서 그곳에 앉으신 다음, 그 가사를 만져보시고 매우 부드럽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마하까싸빠는 자신의 가사를 세존께서 받아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입지?”라고 붓다께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까싸빠는 붓다께서 입고 계시는 누더기 가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사용하여 빛이 바랬다”라고 붓다께서 말씀하였으나, 까싸빠는 전세계에서 이것이 최상이라고 찬양하고, 가사를 교환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붓다께서 벗어버린 가사를 입기에 적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까싸빠의 공덕에 의하여 다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까싸빠는 이것을 매우 영예롭게 생각했으며, 자기 스스로 열세 가지 명세들[dhutagunā, 頭陀의 德]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며, 그리고 8일 뒤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마하까싸빠는 두타제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엄격함을 지니고 살았으며 부처님이 입멸한 후의 불교교단에 중심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우루벨라 까싸빠(Uruvela Kassapa), 나디 까싸빠(Nadi Kassapa), 가야 까싸빠(Gayā Kassapa) 등 까싸빠 삼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마하까싸빠(Mahā Kassapa, 大迦葉)로 불리어졌습니다. 그에 관한 전기는 남, 북 양전에 달리 나타나지만, 애욕이 부정한 것임을 알아 아내를 맞이해도 끝내 육체관계를 멀리 했으며, 아내와 함께 출가를 했다는 점에선 남전과 북전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나와 있으며, 그에 관한 시구가 『테라가타(Theragāthā, 長老偈)』제1051-1090게(偈)에 전하고 있습니다. 북전에 의하면 마하까싸빠와 헤어진 아내는 외도의 수행자 밑에 있었지만, 부처님의 교단에 비구니의 출가가 허용되었을 때 마하까싸빠가 아내의 일이 염려되어 천안(天眼)으로 그녀의 소재를 알고 비구니 한 사람을 시켜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비구니 교단에 들어온 그녀는 비구니 교단의 수석이었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i)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꾸준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안 있어 불제자로서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마하까싸빠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누르고 간소한 생활 규율(頭陀行)을 지켰습니다. 붓다께서 당신은 이미 늙었으니 부드러운 옷을 입고 신자의 초대를 받으면서 나의 곁에 있으라고 권했을 때도 그는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또 언젠가 그는 지난날 함께 수도를 하던 동료가 환속을 하여 도적질을 하다가 체포당해서 형장으로 끌려갈 때, 곧 달려가서 여러 가지로 훈계를 하여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형리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당시의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평소 마하까싸빠가 어떻게 생활했는가는 그가 남긴 시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래으 시들은 그가 남긴 시구 가운데 일부입니다. “나는 침상에서 내려와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밥을 먹고 있는 한 문둥병자에게 가, 그의 곁에 가만히 섰다.”<1054게> “그는 문드러진 손으로 덩이의 밥을 주었다. 발우 안에 밥을 담아줄 때, 마침 그의 문드러진 손가락이 ‘툭’하고 그 안에 떨어졌다.”<1055게> “담 벽 아래에서 나는 그가 준 밥을 먹었다. 그것을 먹고 있는 동안,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내게는 혐오스러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1056게> “문전에 서서 탁발로 얻은 것을 양식으로 삼고, 소 따위의 냄새나는 오줌으로 만든 것을 약으로 삼으며, 나무 밑을 침상으로, 누더기 기운 것을 옷으로 삼아, 그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사방(四方)의 사람이다.”<1057게> 이처럼 마하까싸빠는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된 이후, 철저한 두타행을 실천함으로써 승가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후대의 대승불교에서는 그가 붓다의 정법(正法)을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존께서 입멸 하신 뒤 세존의 유해를 넣은 관은 마하까싸빠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리 해도 불이 붙지 않아서 다비를 행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든 직후, 교단의 동요와 분열을 염려한 그는 아난다와 함께 비구들을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이게 하고, 세존의 바른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이른바 제1차 결집을 거행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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