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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佛陀)와 불전(佛傳)-깨달음의 즐거움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3.


-깨달음의 즐거움-
    1. 윤회의 삶은 끝나다

    붓다께서는 우루벨라(Uruvela) 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 尼連禪河)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는 성도(成道)에 관한 여러 경전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동일합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약간 다른 점도 있습니다. 붓다의 성도와 관련하여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항마(降魔)의 이야기는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항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아함(中阿含)의 <라마경(羅摩經)>과 이에 해당하는 팔리어로 씌어진 아리야빠리예사나 숫따(Ariyapariyesana Sutta, 聖求經)에서는 항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오직 깨달음만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석존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의 곁을 떠나 마가다(Magadha)국을 편력하던 중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Senanigama, 將軍村)로 갔습니다. 그곳은 수행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석존은 이곳이야말로 참으로 수행정진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자리를 깔고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출가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결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거기에서 자기의 몸이 '태어난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 태어난다는 것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남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열반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다음으로 자기의 몸이 '늙는다'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병에 걸린다'는 자연의 법칙,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 '근심한다'는 자연의 법칙, '더러워진다'는 자연의 법칙, 이와 같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그러한 존재 속에 불행의 원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초월한 최상의 평안, 즉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하여 내게 지견(智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解脫)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생애이고 이 이상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을 한역 <라마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생(生)은 이미 다하고, 청정한 수행은 이루어져, 소작(所作)도 모두 가려졌네. 다시 유(有)를 받지 않으며, 진여(眞如)를 알았다."

    즉 과거로부터 무수한 생애를 두고 정진 노력한 결과가 성숙해서 여기 최고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므로 이제는 더 이상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온 생사의 유전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고, 맑고 깨끗한 수행은 완성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다 해놓았으며 또다시 생사를 되풀이함이 없이 최고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팔리문이나 한역 중아함 <라마경>에는 보리수 아래 앉기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 즉 마을 처녀의 공양, 강에서의 목욕, 길상초의 보시를 받은 일, 그리고 보리수의 일 같은 것은 전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마라 빠삐만(Mara papiman)에 대해서도 한마디 비치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의 불교학자 와다나베 쇼오꼬(渡邊照宏)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라마경}은 원래 부처님이 제자들을 위해 자기 자신의 수행시절의 체험을 말한 것을 기록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제자들의 수행에 직접 관계가 깊은 사항에 대한 설명에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부처님밖에 통용될 수 없는 항마(降魔)나 성도(成道)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간단히 보살은 우루벨라의 세나니가마로 와서 경치가 아름다운 언덕진 숲속에 앉아 좌선,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 더러움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 결과 그런 것들의 본질을 깨닫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만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가지 사건 특히 마라와의 싸움 같은 것은 전기 작가의 창작이라거나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학자가 지금도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부처님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불교의 본질에 접근할 수도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라마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2. 깨달음의 경지

    사실 범부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와다나베 쇼오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능력에 알맞은 범위 안에서만 사물을 생각하려고 한다. 선천적인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빛깔이나 소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설명을 듣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부처님이 아니므로 부처님의 심경이나 그 경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없다고 해서 부처님의 특수한 모습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르는 대로 경전에 나오는 말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헤아려볼 수는 있다. 경전에 사용되고 있는 말의 표면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실한 그 뜻을 체득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흔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자신의 체험이 그러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깨달음을 이룩한 붓다의 경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처님께서 성취한 깨달음의 경지는 감히 우리 범부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를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세계, '불불상념(佛佛相念)'의 세계,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의 경계라고 불려집니다. 이지불이(理智不二)란 지혜와 이치가 하나된 상태를 말하고, '불불상념(佛佛相念)'이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서로 생각하는 상태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이란 법의 즐거움을 스스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 누린 붓다의 만족감과 한동안의 안도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범부는 다만 우러러 존숭(尊崇)하고 찬탄하며 경앙(敬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만상(萬象)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마음에는 모든 경계가 다 와서 거기에 머뭅니다. 그 마음을 바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마음의 바다에 와서 머무는 것입니다. 실로 깨달은 그 분의 심경(心境)은 이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도 합니다.

    3. 깨달음의 즐거움

    여러 율장과 불교문헌들에 의하면 붓다는 성도한 후 4주(28일) 동안 혹은 7주(49일) 동안 보리수 밑에서 또는 그 밖의 다른 나무들 밑에서 홀로 가부좌한 채 열반의 즐거움을 맛보았다고 합니다. 팔리 율장(律藏) 대품(大品)에 의하면,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뒤, 첫 번째 7일 동안은 보리수 밑에서 보냈고, 다시 7일 동안은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nigrodha) 나무 밑에서 보냈으며, 세 번째 7일은 무짤린다(Mucalinda) 나무 밑에서 보냈고, 네 번째 7일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 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첫 번째 7일 동안 붓다는 보리수 밑에서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三昧)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이 때 붓다는 연기(緣起)를 발생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 7일 동안에는 모든 것을 비웃는 버릇이 있는 거만한 브라흐마나(Brahmana, 波羅門)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진정한 브라흐마나(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한 율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보리수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교만한 바라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존께 와서 안부를 여쭙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눈 뒤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사문 고따마(Gotama)여, 그대는 어째해야 바라문이 되는지 아시오? 어떤 수행을 해야 바라문이 되는지 아시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습니다.

    "바라문은 죄악을 멀리하고, 마음이 교만하지 않다. 때가 없고 자제(自制)하고, 베다(Veda)에 정통하며 청정한 수행을 완성한다. 바라문이란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에게 세상 어디에선들 교만함이 있겠는가?"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아자빨라 니그로다 나무를 떠나 무짤린다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구름이 일어나 7일 동안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날씨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러자 무짤린다 용왕(龍王)은 자신의 거주처에서 나와 긴 몸으로 세존을 일곱 번 둘러싸고, 고개를 굽혀 세존의 머리 부분을 가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추위나 더위가 세존을 침범치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파리·모기·바람·열기·뱀 등이 세존에게 다가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일이 지난 뒤 세존께서는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용왕은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갠 것을 보고 세존에게서 자신의 몸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동자의 모습으로 변한 뒤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경배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습니다.

    "진리를 듣고 보아 혼자서도 만족함은 즐거움이다.
    생명에 대해 조심해서 해치지 않음도 세상의 즐거움이다.
    애욕(愛欲)을 극복하여 세상살이에 탐착하지 않음도 즐거움이다.
    그러나 내가 있다는 교만심을 누를 줄 아는 것,
    이것이 최상의 즐거움이다."

    세존께서는 7일이 지난 뒤 삼매에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무짤린다 나무를 떠나 라자야따나 나무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맺고 앉은 채 7일 동안 오로지 한자세로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그때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두 상인이 욱깔라(Ukkala) 지방에서 세존이 계신 곳으로 향하는 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생에 두 상인의 친척이었던 천신(天神)이 그들 앞에 나타나 세존께 공양을 올리도록 권했습니다.

    "벗들이여, 이제 막 깨달음을 이루신 세존께서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에 계십니다. 그분께 보리죽과 꿀을 공양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들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안락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리죽과 꿀을 가지고 세존에게 다가가 공손히 절한 뒤 한쪽에 서서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보리죽과 꿀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저희들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안락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여래(如來)가 저들의 손에서 직접 음식을 받을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것을 사용하여 보리죽과 꿀을 받아야 할까?'

    그러자 사대왕(四大王=四天王)이 세존의 생각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알아낸 뒤, 사방에서 다가와 수정으로 만든 네 개의 그릇을 바치며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으로 보리죽과 꿀을 받으십시오."

    그리하여 세존께서는 수정 그릇으로 음식을 받아 드셨습니다.

    두 상인은 세존께서 음식을 다 드시고 그릇에서 손을 거두는 것을 보고서는, 세존의 발에 머리를 숙이며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과 법(法)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신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생명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상인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는 세존과 법이라는 두 의지처에 귀의한 최초의 신자가 되었습니다.

    위 내용은 팔리 율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따뿟사와 발리까라는 두 상인이 500대의 수레에 짐을 싣고 웃깔라 마을에서 중부 인도로 가던 도중 마침 이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수신(樹神, 일설에는 조령이라 함)의 권고로 앞으로의 이익과 안락을 기원하며 보리죽과 꿀떡을 공양하고 불(佛)과 법(法)에 귀의함을 허락 받아서 붓다의 최초 재가 신자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출가한 제자들의 집단이 없을 때인데, 이와 같이 세속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그의 가르침을 실행해 가는 남자들을 우빠사까(Upasaka, 優婆塞)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우루벨라의 숲속에서 고행(苦行)을 할 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대성자(大聖者)로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지금 보리수 밑에서 성도한 뒤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그 거룩한 위덕(威德)에 감화를 입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