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행, 곧 생멸(生滅)변화하는 모든 현상은 정신이나 물질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변화한다는 원리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영원불변하는 진리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라도 마침내는 죽는다는 진리이다. 모든 현상계의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한 것이 찰라에 생멸변화(生滅變化)한다는 것이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生者必滅], 만난 자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것[會者定離]이 무상의 원리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상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조그마한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생(生)하고, 잠시 그 수명대로 머물다가[住] 형체가 변하고 달라져서[異, 變], 없어지고[滅]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석존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서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과 같은 요소는 불변적 존재(不變的 存在)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그것 또한 무상한 것임을 역설하고 계신다. 현대의 자연 과학에서는 원소(元素)나 원자(原子)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素粒子)도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고 한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제행무상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던 사람의 마음도, 부귀영화도 어느덧 변하고 마는 것이며, 젊음과 건강을 자랑하던 젊은이도, 뛰어난 미모를 뽐내던 미인도 무상의 원리 속에 스러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나, 풍성한 낙엽이나, 풍성한 결실을 언제 맺었었느냐는 듯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며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며 생(生)의 덧없음을 느끼고, 역사 속에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부침(浮沈) 속에 지나갔던 많은 사실을 보며 허망함을 느낀다. 그러나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무상함을 느끼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만큼 우리 마음이 탐욕[貪]·성냄[瞋]·어리석음[癡]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오히려 사람들은 영원을 착각한다. 백 년, 천 년을 살 것같이 생각하고, 자기의 부귀와 공명(功名)이 영원히 갈 것으로 본다. 탐욕(貪慾)과 집착(執着),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행무상의 도리를 망각하고 헛된 욕심 속에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무상의 원리에서 볼 때, 인생 백 년이 수유(須臾)에 불과한 것이며, 잠깐 꿈속을 헤매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중생들의 뒤바뀐[轉倒] 착각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인생관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현실 판단 위에 바른 인생관을 정립하고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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