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성제(四聖諦) 멸제(滅諦)
<3. 멸제(滅諦)>
멸제(滅諦)라,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멸제는 열반(涅槃)을 말합니다.
멸제나 열반이나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열반을 바로 풀이하면 영생(永生)입니다.
멸(滅)을 단순히 번뇌를 멸한다는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따라서 사제(四諦)를 풀이할 때에 멸제는 그냥 번뇌만 멸한다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체 공덕을 갖춘 영생, 영생의 지혜, 영생의 생명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습니다만, 일반 외도(外道)는 결국 멸을 모릅니다.
멸은 정도(正道)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령 산중에 가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하고 멸을 목적으로 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정쩡한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때는 그냥 상(相)에 걸리고 맙니다.
구경(究竟) 목적 - 일체 번뇌를 멸하고서 영생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구경적인 끄트머리 목적인 멸을 구해야만 참다운 공부입니다. 나중에 공부를 하겠지만, 비록 사선정(四禪定) 법(法)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멸을 구하지 않으면 그때는 외도에 그칩니다.
멸을 목적으로 해서 멸을 구하면 그것이 정도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하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도업(道業)이고, 멸을 구하지 아니하고 나중에 칭찬의 말이나 듣고 보답이나 받고자 선업(善業)에만 그쳐서는 멸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탈(解脫)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같은 행(行)도 멸을 구해서 해탈을 구하면 정도이고, 해탈을 구하지 않으면, 유위적(有爲的)이고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어떠한 공리(功利)를 구하면 그때는 정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순교를 많이 했는데, 순교를 한다 하더라도 역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해탈을 구하고 순교하면 정도입니다.
해탈을 구하지 않고 다만 ‘인류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 속인(俗人)과 범부(凡夫)들이 하는 제한된 것 밖에는 못됩니다.
멸제(滅諦)란 곧 열반(涅槃)으로서, 열반(涅槃)이란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생사(生死)의 고(苦)를 출리(出離)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니, 오(悟)의 과(果)다.
혹(惑)은 미혹할 혹(惑)자입니다.
혹은 번뇌와 똑같은 뜻입니다.
혹업(惑業)은 미혹할 혹(惑)자, 업 업(業)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탐진치(貪瞋痴)가 혹(惑)입니다.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 이것은 ‘혹업을 없애고’라는 뜻입니다.
본래 혹이 없는 것을,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이 업(業)입니다.
따라서 탐진치(貪瞋痴)와 선악의 제업을 한꺼번에 말할 때 혹업(惑業)이라 합니다.
멸(滅)이란, 번뇌와 여러 가지 업을 멸하고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삼계윤회(三界輪回)하는 생사고(生死苦)를 출리(出離)하여 - 날 출(出)자, 떠날 리(離)자 - 여의고 떠나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입니다.
우리는 진공(眞空)과 단공(但空)과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잘 모르면 굉장히 심오하기 때문에 자칫 개념이나 술어를 잘 모르면 오류를 범합니다.
일반 공(空) - 다 비었다 하는 허무(虛無)의 공은 단공(但空)이라 합니다.
다만 단(但)자, 빌 공(空)자, 단공(但空)입니다.
다만 비지 않고서 공 가운데 그야말로 신비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이 충만해 있다는 것이 진공(眞空)입니다.
소승(小乘)은 단공만 알고 진공은 모릅니다.
진공은 반드시 묘유(妙有)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단공만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나 허무에 빠져 중생제도는 하지 못하고 자기만 편하고 맙니다.
진공적멸 - 고요할 적(寂)자, 멸할 멸(滅)자 – 적멸도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발동하지 않고 영원히 안락한 경계가 적멸입니다.
멸(滅)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모두를 멸하는, 즉 말하자면 번뇌를 멸해버려 영원히 안락하고 영원히 안온(安穩)한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바로 영생입니다.
따라서 열반이나 적멸이나 그냥 멸(滅)이라고 하나, 이것은 똑같은 뜻입니다.
다만 표현만 달리했을 뿐입니다.
멸(滅)은 ‘오(悟)의 과(果)다.’ 깨달음의 결과란 말입니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체계적입니다.
조금도 합리적인 뜻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먼저 중생의 경계(境界)를 봅시다.
결국 우리 중생이 받는 것은 고(苦) 아닙니까?
고(苦) 아님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다른 고(苦)는 그만두고라도 인간의 한계 상황인 생로병사(生老病死) - 업이 있으면 결국은 태어나야 하는 것이고, 태어나면 늙어야 하는 것이고, 아파야 하는 것이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한계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는 고(苦)가 있는 것인데, 그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고가 많이 있지만, 하여튼 모든 고의 원인은 번뇌와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行)입니다.
다시 말하면, 집(集)입니다.
우리 인생고가 있고,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인생고만 있고 또 고(苦)의 원인인 번뇌만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살 필요가 없지요.
우리 인생에 이런 고(苦)와 집(集)밖에 없다면 그때는 자살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디 갈 곳도 없고 우리가 나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노이로제나 사회적인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법 판단은 하기 때문에 인생고는 볼 수 있습니다.
인생고도 보고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도 대강은 봅니다.
하지만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을 우리가 떠날 길이 없습니다.
사실은 못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 아니면 결국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라야 인생고를 떠나 영생의 안락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멸(滅)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 숨통이 트입니다.
멸이 없으면 숨통이 트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고를 짓고, 고의 원인을 짓고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이와 같이 윤회 가운데서 고를 짓고 받고 또 고를 짓고, 또 윤회하고 그런 가운데 뱅뱅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고만 있습니다.
다행이 석가모니 가르침 또는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고(苦)를 떠나고 집(集)을 벗어버리고 해탈의 멸이 있습니다.
멸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해탈의 길, 해방되어 갈 길을 안다는 것만 두고 보더라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한테는 큰 도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고의 원인을 지어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그 반대로 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멸이 있습니다. 또 멸에 이르려면 그냥 무조건 가는 것이 아니라, 고(苦)와 집(集)을 없애는 도(道)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집(集)을 지어서 고(苦)를 받으므로, 멸(滅)에 가려면 고와 집을 멸해야 쓰겠지요.
그것이 순리(順理)입니다.
고와 집을 멸하는 것이 여기 있는 도(道)입니다.
다시 말해 도제(道諦),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간추리면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4.도제(道諦)>
도제(道諦)란 곧 팔정도(八正道)로서 능(能)히 열반(涅槃)에 통(通)하는 도(道)이니 오(悟)의 인(因)이니라. 도제는 능히 열반에 통하므로 ‘도’라 이름하며 바로 깨달음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고의 원인을 좀 안다 하더라도,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팔정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팔정도에서 오는 멸(滅)의 그런 해탈의 행복은 우리가 얻을 수 없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은 그야말로 참 불교의대(大)·소(小) 또는 현(顯)‧밀(密) - 대승(大乘), 소승(小乘), 밀교(密敎)등 모든 불교를 관통해 있는 하나의 대 진리입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불교 가운데 이와 같이 사제법문이 안 들어 있는 데가 없습니다.
어디에 조금 더 역점을 두는가 그런 차이는 좀 있지만, 사성제가 들어 있으면 불법(佛法)의 참다운 정도이고, 들어 있지 않으면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淸華 大宗師 『마음의 고향』-
출처: 글쓴이: 🙏참마음
https://cafe.daum.net/pokyodang/7O58/176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