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모아지면 본래가 둘이 아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뜻을 모르고 한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연꽃인 동시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또는 보현보살이나 그런 보살들이 가장 훌륭한 벗으로 삼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이 이 세상의 모든 개념 가운데 가장 고귀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적인 전문 술어로 말하면, 무생청정 보주명호(無生淸淨 寶珠名號)라, 생사를 초월한 보배 같은 그런 명호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위대한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서 우주의 실상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런 최상의 이름을 갖는 부처님이니까, 그 이름 가운데 부사의한 공덕이 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는가 하면, 삼세제불이 옹호할 것이고, 또는 동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고 가장 무섭기도 하고, 가장 자비스럽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기 때문에, 어떤 신장이나 나쁜 귀신이나 좋은 귀신이나 하늘의 천상에 있는 천신들이나, 모든 존재가 다 나무아미타불을 숭앙하고 받들어 지킵니다.
따라서 뜻도 모르고 나무아미타불 한번 왼다고 생각할 때도, 그 나무아미타불의 공덕으로 해서 모든 신장이 우리를 다 지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가장 권위가 있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얼씬도 못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의 부사의한 명호를 간직할 수 있는 인연을 가졌습니다.
불교를 믿는다 해도 '염불은 방편 가르침이고 화두를 들고 선방에서 애쓰고 의단을 품고 해야 참다운 가르침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염불 공부와 비교할 때는, 사실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선방에서 몇십 년 동안 화두를 들고 이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무엇인가? 의단을 품는다 하더라도, 염불하는 마음이 화두하는 마음 밑바닥에 깔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공부가 이어지는 것이지, 그냥 덮어 놓고 의심한다 해서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하는 마음이 왜 깔려야 하는 것인가, 참선이란 것은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이른바 본체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육조혜능대사의 가르침도, 선이라는 것은 본체를 안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본체를 떠나 버리면 그건 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뭐고' 화두를 드나, '똥막대기' 화두를 드나, 어떻게 들든 간에 똥막대기나 이뭐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산란스런 마음을 통일시켜, 본래 우리 생명이 부처이고 아미타불인데, 부처를 찾고자 해서 우리가 임시로 의심을 품은 것이지, 의심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화두를 드는 것도 좋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의심이 없는 그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말이 전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의심 그것에 무엇이 붙은 것도 아니고,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의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의심이 있으면 신앙이라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퍼센트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달마스님도 의심하란 말 한 마디도 안 하셨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더라도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마조스님이나 백장스님이나 또는 임제스님이나 의심을 내란 말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중국 남송 때 대혜스님이 비로소, 우리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깨닫고 우리 주인공을 찾는 그런 하나의 방편으로 해서 의심하란 것이지, 절대로 목적은 아닙니다.
육조 혜능스님이나 그 뒤에 마조스님 백장스님 황벽스님 임제스님 그 분들은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곧장 사람 마음을 가리켜서 바로 깨닫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쪽의 선법은 그때부터 차근차근 이울어지고, 남송 때 대혜종고스님이 낸 화두법이 당시에 융성했단 말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 때입니다.
불행히도 고려 때 그런 법이 한국으로 수입되었습니다.
그때 중국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아닙니까?
그 명나라 때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습니다.
명나라 때는 4대 고승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하면 운서주굉, 자백진가, 감산덕청, 우익지욱, 하는 분들인데, 그분들이 모두가 다 화두를 염불로 했습니다.
아미타불을 화두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을 화두로 하는 염불선이 그 때 한국에 들어왔으면 오직 좋으련만, 그 때가 불행히도 이조 오백년 때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중국과 교류를 했습니까? 이조 오백년 때는 중국 불교와 한국 불교가 교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은 전체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의 교화를 위해서나 우리 참선을 위해서나, 굉장히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그 오백년동안 중국과 교류를 못했습니다. 요즘에 염불하는데 기왕이면 염불선을 하고 싶다,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염불선의 체계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이 많이 있습니다. 염불을 꼭 자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그런 분도 있고,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염불은 꼭 고유하니 어떤 음정에 따라서 그렇게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 내도 좋고 안내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계행 지키면서 염불하면 더욱 좋고, 계행을 지키지 못하면 못한 대로 염불해도 좋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또는 소리를 내고 안내고 상관없이 염불하는 것은 어느 때나 좋습니다.
장사할 때나 밥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소리 내는 것은 어렵겠지요. 염불이라 하는 것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므로 소리를 안내고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따라서 염불이란 것은 소리를 내고 안내고 상관없이 언제나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빨리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 식으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극락세계에 가서 보면, 극락세계에서 꼭 어떤 식으로 하란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그야말로 모두가 다 광명정토(光明淨土)라, 우리 사람 같은 존재가 극락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두가 광명세계입니다. 몸도 광명 몸입니다.
그 물질이 아닌 광명으로 만들어진 무량의 몸입니다.
물질 아닌 몸이니까, 극락세계 중생은 개체인 동시에 바로 전체입니다.
자기 몸과 우주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사실 극락세계 중생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우리 존재도 우리가 똑바로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자리를 느끼고 불생불멸한 그런 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이 몸도 역시 개체인 동시에 전체입니다. 개체와 전체는 절대로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과법을 알면 그냥 짐작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이른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중중무진이란 것은 모두가 다 한 고리로 얽혀 있다는 말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몸인 것을, 우리 중생은 전체를 못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인연법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 본래로, 우리가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하나의 몸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성품을 보지 못하고 중생의 상만 보니까, 나 따로 너 따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저절로 참다운 자비가 나옵니다. 참다운 무주상행(無住相行)을 하지 말라 해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남한테 베풀면서 나라는 상을 내겠습니까?
따라서 그 근원적인 문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염불한다 할 때 일반 보통염불과 염불선의 차이가 무엇인고 하면, 염불선이란 근원적인 문제, 본체를 여의지 않고 염불하면 그것이 염불선이 됩니다.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그와같이 정말로 깨닫지를 못해서, 내가 증명을 못해서 천지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소식은 모른다 하더라도, 천지 우주는 본래로 불생불멸이고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가 바로 내 자성이기 때문에,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고 염불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됩니다.
-🙏청화 스님-
작성자 : 🙏미타행자
출처: 글쓴이: 🙏일념통천
https://cafe.daum.net/pokyodang/7Ccb/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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