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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자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0.

    삶을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자세 1. 삶이란 고통의 바다이다. 2. 삶의 진상은 모두가 소통이다ㅡ사성제 3. 우리가 겪는 고통은 전생에 지은바 업장 때문 4. 인생은 입구에서 보면 한없이 긴 듯이 느껴지지만 5. 모든 것은 왔다가 다시 스쳐 흘러가고 6. 집착이 없고 걸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자. 7. 인생은 이별의 연속 8. 삶의 슬기를 도모하고 살자. 9. 모든 인연에 초월하는 해탈의 삶 10. 탐욕은 무지에서 오는 것 11. 이 세상은 정말 무상한 것이니 12. 탐욕이란 집착의 다른 이름일 뿐 13. 모든 것은 전생에 지은, 인연 따라 업 따라 14.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변해 가는 것 15.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니 16. 오는 사람 잡지 말고 가는 사람 막지 말라 17. 탐욕을 여의는 것만이 최상의 행복이다. 18. 삶을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자세 그것이 열반 1. 삶이란 고통의 바다이다. 법당에 하루 종일 있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루 온종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 두 마디 털어놓는 얘기들은 모두가 다 아픔의 소리이고 고통의 소리이며 괴로움이 가득한 소리들뿐입니다. 가끔가다가 즐거움의 소리 ㅡ우리 아들이 옥동자를 낳았습니다.ㅡ를 들을라치면 그것 역시도 고통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가정이나 이루고 한 가정의 지아비 아내로 사시는 분들은 그들이 대하는 고통의 양상이 그렇게 폭넓고 깊지 못하다 보니까 그저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는 분이 대부분이겠지마는 매일 매일 많은 분들을 만나고 그들의 고통과 쓰라림과 괴로움을 듣고 살다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삶이란 확실히 고통의 바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흡사 이 몸의 한부분이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이 몸 전체를 다 압도해 버리는 것과 같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조그마한 문제점이 나의 삶의 전모를 모두 압도해 버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 삶의 진상은 모두가 소통이다ㅡ사성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설한 법문이 사성제(四聖제)입니다. 성제라는 말은 성스러운 가장 요긴한 진리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뜻으로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일컫는데 이 네 글자는 삶의 진리를 가장 간단하고 극묘하게 묘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풀이해 보면 삶을 엮어 가노라면 많고 많은 고통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다 과거에 연유한 것들이다 라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삶의 진실을 우선 고통으로 보신 것입니다. '삶의 진상은 모두가 고통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날들을 대비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 정도를 닦아 가면서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자' 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각도로 이 사성제를 판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삶의 현실은 고통이라 생각하고 이와 같은 삶 가운데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행로는 무엇인가? 하는 미래지향적인 의지를 그 속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과 영원히 나아가야 할 바를 간단하고도 명료하게 네 글자에 담아놓았습니다. 3. 우리가 겪는 고통은 전생에 지은바 업장 때문 부처님 경전에 보면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곳은 한없이 즐거운 세계이며 그곳의 출생은 어미 뱃속에서 떨어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칠보의 연못위에 있는 연꽃에서 생명이 탄생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파라다이스-천국이라고 말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세계에 태어나면 한도 끝도 없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본다면 우리 인간들이 태어나는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했으니까 급수가 현저히 낮은 세계를 지침 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도 노력하고 정진하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면 긍정적인 삶의 행로를 열어 갈 수 있지만 반면에 그렇지 못할 때면 아주 처량하고 괴로운 저 어둠침침한 감옥과 같은 삶을 걸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상 세계, 즉 극락이라는 곳에 태어나는 것은 이 지구라는 세계보다 훨씬 즐겁고 복 받은 존재들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세계를 부처님께서 '고통의 바다' 라고 정의하신 것을 보면 우리는 확실히 전생의 업장에 심각한 문제성이 있는 존재들임에 분명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하늘의 아름다운 세계들이 전부 다 즐거움으로 태어난다는데 태어날 때부터 긍정적인 의지를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존재들인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이미 저 먼 과거생의 부정적인 마음의 행로 따라 지어놓은바 대로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과거 생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이 땅에 와서 지난날의 모든 고통을 해소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끊임없이 슬기롭게 재창조해가는 그러한 기회로 알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성제(고. 집. 멸. 도)의 결정적인 내용입니다. 사고(四苦) 팔고(八苦)의 측면에서 보아도 우리의 삶은 확실히 고통스러운 것이 분명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생의 측면에서 볼 때 태어난다는 것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입니까? 또 살다보면 늙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점차로 변해갑니다. 모든 것이 다 무상한 것입니다. 4. 인생은 입구에서 보면 한없이 긴 듯이 느껴지지만 우리들 중에서 한 50년, 60년 뒤까지도 이 땅에 남아 있을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인생은 입구에서 보면 한없이 긴 듯이 느껴지지만 출구에서 보면 한없이 짧게 보인다고 합니다. 입구 즉, 시작하는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일 생 7. 80년이 무척 긴 것 같지만 출구의 입장 즉, 삶을 마감 짓는 그러한 시점에서 보면 인생이 한없이 짧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차가 막 달려갑니다. 그러면 달리는 기차의 창에 산이 스쳐 지나가고 들판이 지나가고 또는 그림 같은 강줄기가 스쳐 지나가기도 합니다. 또 그 차창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각도로 스쳐서 지나갑니다. 쇠스랑을 어깨에 걸치고 지나가는 농부 아저씨, 함지박을 머리에 인 아낙네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 장면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30 ,40년, 혹은 50년 동안 살아온 지난날들과 비교해보면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삶 가운데에서도 이런 장면도 저런 장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장면 장면마다 존재하던 나를 스쳐 지나간 많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 날 것입니다. 5. 모든 것은 왔다가 다시 스쳐 흘러가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한 마리의 새처럼 나에게 날아와서 내 품에 잠시 안겼다가 다시 가는 곳 없이 가버리는 새와 같은 인연들. 그렇게 왔다가 다시 어디론가 스쳐 흘러가고 또 세월이 흐르면 또 다른 인연이 왔다가 우리의 마음에 아픔을 주고 쓰라림을 주고 또다시 흘러갑니다. 지난날들을 이렇게 가만히 돌아다보면 한편의 비디오테이프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비디오테이프 속에 스쳐 지나갔던 많은 사람들이 인연의 장단, 길고 짧음은 있을지언정 다 만났다가는 흩어지고 언젠가는 또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인생을 한 편의 비디오테이프를 본다고 생각할 때 내가 그 비디오 테이프의 어떤 한 장면 속에서 얼마나 아프고 쓰라리고 괴로워했던가 생각해 보십시오.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까지 괴로워했던 지난날이 그 당시는 대단히 심각했는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다 신기루 같고 환상이고 허상, 가상이며 순간에 흐르는 한편의 활동사진같이 느껴질 뿐입니다. 6. 집착이 없고 걸림이 없는 삶을 살아가자. 마찬가지로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인생의 출구 쪽에서 본다면 그것도 아마 지금 느끼는 것과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날들의 화면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보잘것없고 정말로 쓰디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라 면 우리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게 될 고통스러운 삶도 항상 스쳐 지나가는 그러한 장면처럼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슬기로운 지혜일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애(無 )라고 하여 집착이 없고 걸림이 없는 삶을 살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무언가 그 대상들에게 집착할 때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아함경에 보면 「사랑의 깊이를 아는 것만큼 고통스러우리라. 사랑의 고통을 아는 것만큼 이별의 고통도 크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로 많고 많은 고통들을 만납니다. 이러한 고통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제일 큰 명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7. 인생은 이별의 연속 지나간 날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두 다 환상 같으며 한편의 비디오테이프 같으며 그 테이프 속에서 나에게 스쳐왔던, 그리고 다시 스쳐 지나가 버리는 장면과 연들을 생각해 볼 때 인생은 이별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런 것이고 우리가 인생을 등질 때도 마찬가지로 이별하고 가버립니다. 내가 어렸을 때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다 흩어져 갔습니다. 만났다가 흩어지고 또 새로운 만남이 오고 또 만났다가 흩어져가는 한도 끝도 없는 이별, 인생의 그림은 전부 다 이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만남이라는 장이 중요하지만 만났기에 이별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이 세상을 이별해야 합니다. 억겁을 두고 한도 끝도 없이 부처님을 따라 다녔던 사리불존자와 같은 인연도 있지마는 인생의 대부분의 인연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은 헤어져야 되고 원수는 만나야 되고 또 내가 괴로움을 준 인연은 그 업을 탕감하기 위해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인생의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삶을 미래의 삶에다 한 번 대입해 보면 지금 내가 과거를 (완)상하듯이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이 그렇게 나의 가슴으로 날아 들어와서 잠시 머물다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아난존자가 가족의 인연에 대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부처님께서 손을 들어 기원정사 앞에 있던 나뭇등걸을 가리켰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그 영문을 몰랐는데 잠시 뒤에 바람이 부니까 가지가 휘청 이더니 거기에 앉아 있던 수십 마리의 새떼가 다 흩어져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보라, 아비 새와 어미 새, 아들 새와 딸 새가 다 한자리에 앉았다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지 않느냐? 우리는 모두 인연 따라 만났다가 다시 또 인연 따라 뿔뿔이 흩어져 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나 사는 가족들조차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 뿔뿔이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라 할지라도 같이 갈 수 가없고 일생을 두고 몸과 마음을 다 주어 사랑하던 아내라 할지라도 같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8. 삶의 슬기를 도모하고 살자. 온 자리가 다르듯이 가는 자리가 다 다른 것입니다. 앞으로 만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 그들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울고 괴로워 할 것입니다. 나에게 날아 왔다가 또다시 날아가 버리는 것들 때문에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고 해서 그것이 다시 날아들어 올 리도 만무하겠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하게 흘러가고 항상 변화하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변화이고 운동 입니다. 인생자체가 흐름이라는 말입니다. 삶 자체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므로 무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슬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나머지 아픔과 쓰라림을 감내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슬기를 도모하고 삽시다. 한편의 비디오테이프 같은 인생, 우리가 만들어낸 그 비디오테이프가 검증 당할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 테이프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지 추할 것인 지 생각해 보십시오. 9. 모든 인연에 초월하는 해탈의 삶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연에 초월하는 해탈의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해탈의 삶이 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에 너무 내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희로애락, 애욕의 감정의 분류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그 정체가 바로 집착이요 욕망이요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생의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 전생에 지은 업보를 탕감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에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전생의 업보는 탕감하지 못할지언정 오히려 내가 그 장면에 뛰어 들어 울고불고 몸부림친다는 것은 업을 쌓아가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완상하는 기분으로 그저 모든 것은 나에게 스쳐 왔다 스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지혜와 용기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면 한없는 마음의 평화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흐름일 뿐인데 그런 환상과도 같은 것에다 너무 마음을 주어버리면 내 마음이 크게 상처를 받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까지 상처를 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근본적인 목표와 이유를 또다시 쌓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의 씨앗을 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한 편의 비디오를 보는 입장으로 인생을 살도록 합시다. 그러면서 정도에 따라서 아름다운 비디오테이프를 또 다시 만들어가는, 더 이상 오류가 없는, 더 이상의 미련과 집착이 없는 인생을 살자는 것입니다. 거둘 것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 나와 가지고 몸과 마음을 다 불사르면서 부처님 말씀대로 업보를 탕감하다가 정말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간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다만 한 편의 허상 같은 비디오테이프나 가지고 갈 뿐입니다. 그 외에 또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일 뿐입니다. 그 무엇을 잃을 것이 있으며 그 무엇이 아쉬운 것이 있는 것 입니까? 부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바로 모든 상황, 즉 장면 장면마다 최선을 다하는 비디오테이프를 양성하기만을 바라신 것입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자는 것 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습니다. 올 때도 나 홀로 왔고 갈 때도 나 홀로 갑니다. 남편과 같이 혹은 아내와 아들딸과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고독하게 표표히 스러져서 사라져 갈 뿐입니다. 10. 탐욕은 무지에서 오는 것 삶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 몸과 마음을 주지 마십시오. 그러면 또 다른 고통을 불러들입니다. 너무 애착을 갖지 마십시오. 너무 집착을 갖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귀신이 되어서도 괴로운 법입니다. 이 세상사는 것도 지겹고 괴로운 곳인데 귀신이 되어 천년만년 이 세상에 미련이 있다고 한다면 그 귀신은 또 얼마나 괴로울 것입니까? 지옥이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의적인 차원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욕망을 강하게 갖는다는 것 - 물론 근본적으로 건설적이고 정말 원력적인 이른바 보살 심을 가지고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자비심을 발휘한다거나 팔정도를 닦는다거나 이런 것은 바로 부처님께서 하명하는 것이라 좋은 의미로 이바지하는 것이지만 내가 탐욕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원리 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내가 보관하다 가는 것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탐욕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도 한편의 비디오테이프, 빛바랜 사진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즐거움과 평안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원리도 간단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탐욕을 끌어 내버리고 탐욕을 절제하면 되는 것입니다. 11. 이 세상은 정말 무상한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이 세상을 모두 다 잃는다고 하더라도 슬퍼하지 말라, 이 세상은 다만 무상일 뿐,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이 세상을 모두 한 손아귀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즐거워하지 말라 그것 역시 무상 일 뿐." 이 세상은 정말 무상한 것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살아온 지난날들을 한 번 돌아다보십시오. 얼마나 무상한가. 한편의 비디오테이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비디오테이프에 수록된 장면들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말 마음 가운데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 세상을 알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가게 된다는 것 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이 벌어들였다 해도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가지고 가려는 마음만큼 괴롭고, 가지고 가려는 마음만큼 윤회를 해야 되고 또 다른 고통을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진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해야 할 일은 사성제(고집멸도)가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받고 있는 고통, 그것은 지난 세월 과거에 심어져 있는 전생에 짐 지워진 알 수없는 원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허름한 별나라 에 온 것입니다. 온 세상이 칠보로 되어있다는 극락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는 이들은 마음도 칠보일 것입니다. 내 마음이 칠보라면 내가 토해내는 말도 생각도 행동도 다 칠보가 될 것이고 우리가 사는 환경도 칠보가 되고 극락이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보석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마음이 혼탁하고 어둡고 무명(無明)이고 암흑이고 무지이므로 내가 태어난 주변 환경들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울고불고 나와서 죽을 때까지 울고불고 가는 인간의 전형을 보십시오. 남편이 먼저 가서 한도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젊은 보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살님, 남편이 먼저 갔다고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우린 한 번은 울어야 합니다. 좀 빨리 울었다고 생각하십시오. 다 허상일 뿐입니다.」 할 일을 다 하고 가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한 사실이 있습니다. 할 일을 다 하고 가는 것은 좋지만 더욱 더 많은 죄를 짓고 가게 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합니까? 일찍 세상을 떠난 젊은 보살의 남편은 전생의 업으로 일찍 이생을 끝내고 내생에는 좋은 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또다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12. 탐욕이란 집착의 다른 이름일 뿐 삶의 진상을 분명히 알도록 합시다. 행복은 어디 있는가? 탐욕이라는 것은 집착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빛바랜 사진들의 어떤 연속들. 그 사진들에 내 마음을 주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물욕을 부리고, 욕망의 포로가 되고 번뇌에 시달리고 이게 얼마나 꼭두각시 같은 것입니까? 꼭두각시 중에서도 꼭두각시입니다. 한편의 비디오테이프 같은 삶을 대하면서 왜 그렇게 처량하고 어리석게 살까요? 왜 그렇게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쓰라린 인생을 살아갈까요? 무엇이 손해 본 게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에 올 때 알몸으로 왔습니다. 떠날 때도 빈 몸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 와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정해진 이치는 빈 몸으로 갑니다. 즉,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아도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으니까 떠날 때도 가지고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는 항상「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늘고 주는 게 없습니다. 왔다가 그냥 사진만 찍고 가는 것입니다. 관광지에 가서 사진을 백장 천장 찍어본들 그 장면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그대로 있습니다. 재산을 다 날렸다한들 그것도 어차피 내가 전생에 지은 업이므로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남들은 돈도 잘 벌고 잘 사는데 나는 왜이리.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한탄한다면 그것 역시 전생의 공덕이 모자란 때문입니다. 13. 모든 것은 전생에 지은, 인연 따라 업 따라 심어 놓은 것이 없고 뿌린 것이 없는데 무엇이 흘러 들어오겠습니까? 마음을 비우고 지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리 급하더라도 바늘허리에 실을 꿰어 쓸 수 없는 것처럼 금생에 내가 뿌리고 가겠다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탐욕이라든지 각양각색의 독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처량한 것인가를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남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쓰라리게 하고 눈물 흘리고 하는 것이 얼마나 삐에로 같은 것입니까? 우리의 삶은 정말 삐에로입니다. 참다운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 삶 속의 열반을 구현하는 방법은 모든 닥쳐오는 내용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보면서 그것이 전생에 내가 지은 바대로 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또 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이들도 그렇게 전생의 인연 따라 왔다가 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14.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변해 가는 것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절대적인 하나도 없습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영원성을 대변하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들은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무상한 것, 변해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모두 움직이고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것도 현실의 집착 때문에 일어납니다. "스님, 그런데 사업은 잘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법화경에 나오는 「탕아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그 헐벗고 괴로운 그런 광야의 삶을 살다가 나의 집에 돌아 왔구나. 다시 내 문중에 들어 왔으므로 어렵더라도 그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게 해 주리라.」 부처님은 우리를 등지지 않으십니다. 설령 고통을 준다. 하더라도 부처님이 우리를 등져서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동안 무지하게 살아온 데 대한 업보를 탕감해 주는 그러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신기루와 같습니다. 15.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니 삶에 미련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다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흘러가 버렸습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다 보내야 됩니다. 보내고 싶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 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다 보내야하고 다 떠나가야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다 미련을 갖는 것은 얼마나 처량한 짓입니까? 아무리 발버둥치고 몸부림쳐 봐도 떠나가는 것임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떠나가는 대상을 잡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16. 오는 사람 잡지 말고 가는 사람 막지 말라 어차피 삶은 이별이요 인생은 모두가 다 이별입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보내는 것입니다. 정일랑 두지 말고 미련일랑 두지 마십시오. 보낼 것 어차피 보내야 하는 것은 빨리빨리 보내는 것이 속이 시원합니다. 가겠다고 하면 막지 마십시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처럼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내일 떠오르는 태양은 어제의 태양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어제와 이별합니다. 어제의 장면들과 이별하고 오늘의 장면을 살면 다시 오늘의 장면과 이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별하는 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어차피 삶의, 인생의 속성은 이별입니다. 우리는 다 떠나야 합니다. 남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17. 탐욕을 여의는 것만이 최상의 행복이다. 탐욕은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집착은 무지이며 애착도 무지입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가는 인생! 그 무엇을 애착해 할 것입니까? 그 무엇을 애절해 할 것입니까? 인생은 참으로 묘해서 그저 열심히 뛰어서 자기 마음으로 무엇을 이룩했으면 이룩한 것 그 자체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다 놔두고 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탐욕과 욕망이 있는 한 윤회는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여의는 것만이 최상의 행복이며, 최상의 평온을 내 마음이 가져옵니다. 내 마음 가운데 욕심과 탐욕을 녹여 버릴 때 내 마음엔 한없는 평화가 옵니다. 18. 삶을 관조하면서 살아가는 자세 그것이 열반 삶을 살아가면서 한 편의 비디오테이프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응시하면서 살아가는 자세 그것이 열반입니다. 열반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나의 마음을 아프고 쓰라리게 하고 슬프게 하는 모든 장면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듯이 넘어가는 것,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열반입니다. 영원한 아픔도 고통도 쓰라림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한 것입니다. 그런 것에 속박되지 말고 해탈심을 가지고 사십시오. 해탈은 바로 열반이며 집착은 속박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절대적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상대성으로부터의 해방, 무상으로부터의 해방,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깨달은 자는 항상 평안한 것입니다. 열반묘심의 세계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막 뛰는 것 같지만 마음은 항상 평화롭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해탈의 삶을 삽니다. 지난날의 삶은 빛이 바랜 한 장의 사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삶의 모든 양상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을 극복하는 삶이 열반의 삶이라고 한다면 열반은 그 고통을 처리하는 방법에 달려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알고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 한편의 비디오테이프에 지나지 않는 것, 알몸으로 왔다 빈 몸으로 가는 이별의 연속인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삶의 모든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부처님의 아들 딸 된 도리인 것입니다.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용서한단 말입니까? 무엇을 아쉬워하며 무엇을 애착하는 것입니까? -'능인선원'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