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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채워지면 비워라. 비우면 또 채워진다.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0.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흐르는 물과 같다. 도도하게 흐를 뿐이니 담아 둘 것이 없다. 그대로 여여할 뿐이다. 걸음걸이를 보라. 한 발짝 내딛으면 뒷 발짝 없어지고 또 한 발 내딛으면 또 한 발 없어진다. 떼어놓은 발자국을 아쉬워하면서 걷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본래 그렇게 놓고 간다. 먹으면 배설해야 하고 일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겪으면서 흘러간다. 보는 것 듣는 것도 다 그러하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흘러간다. 그런데 흐르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집착한다면 그대로 마음의 짐이 되어 업으로 남는다. 흘러가질 못하고 내 마음의 때로 남아 떨어지질 않는다. 그래서 오직 놓고 가라고 하는 것이다.” 흐르는 물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그냥 흐를 뿐이다. 흐르다가 막히면 돌아서 가고 흐르다가 갇히면 채워서 넘쳐흐른다. 때로는 급하게 흐르다가 또는 쉬엄쉬엄 흐른다. 빨리 간다고 뽐내지 않고 늦게 간다고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오직 흐름 그 자체일 뿐이다. 옛 사람들은 그래서 물 같은 삶을 으뜸으로 여겼다. ‘청산은 날 보고 산 같이 살라하고 녹수는 날 보고 물 같이 살라하네’ 하고 읊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가? 물 같은 삶은 바보 같고 덧없는 삶으로 여긴다. 가능하면 내 곁에 잡아두고 나를 위한다는 생각에 흐름을 거슬리려 한다. 재물을 쌓고 자리를 다투고 모든 흐름이 나의 바람을 따라 좌지우지 되어야 한다고 고집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툰다. 싸우고 경쟁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미워하고 탓을 한다. 때로는 자만하고 때로는 괴로워한다. 우리들의 삶은 대체로 ‘내 논에 물을 대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우리들이 공인하는 능력이란 대개 아전인수(我田引水)하는 능력을 말한다.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가능한 한 물꼬를 넓혀서 내 논에 많은 물을 대고 그것을 가두어 두는 것을 유능하다고 한다. 나아가서는 그런 일들을 자못 인간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폭력, 술수, 증오, 전쟁에 대해서조차 명분을 붙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탐욕을 당연시하고, 탐욕을 가르치고 이를 심화해 나간다면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되겠는가. 결론은 뻔하다. 집단을 기준으로 본다면 경쟁은 투쟁으로, 투쟁은 전쟁으로, 전쟁은 동족상잔, 인종청소로 확대되어 갈 것이다. 개인을 기준으로 본다면 경쟁은 증오로, 증오는 술수로, 술수는 폭력과 범죄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만인이 만인(萬人)과 싸우는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사랑과 자비는 퇴조하여 마침내 불치의 단계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계속해서 먹기만 할 수는 없다. 무한정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먹었으면 배설해야 하고 먹을 만큼 먹었으면 멈춰야 한다. 계속해서 숨을 들이 쉴 수만은 없다. 들이 쉬었으면 내 쉬어야 한다. 흘러드는 물도 무한정 잡아 가둘 수는 없다. 흘러들었으면 그만큼 흘려보내야 한다. 잡아 가두면 썩거나 터지게 된다. 그것은 순리이다. 조금도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진리이다. 고로 우리의 노력이란 그런 흐름을 타는 것, 그런 흐름에 순응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우리가 노력해야 할 내용이다. 그렇게 가는 것이 이른바 능력 있는 삶이 된다. 먹기만 하는 것, 들이 쉬기만 하는 것, 잡아 가둘 줄만 아는 것, 그것은 잘하는 일도, 능력 있는 삶도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요 탐욕일 뿐이다. 인생의 오류일 뿐이다. 물은 빈자리를 메우며 흐른다. 가두지 않고 흐르게 내버려두면 흘러나간 만큼 흘러들어온다. 재물도 물과 같고 권력도, 명예도, 나아가 건강까지도 물과 같다. 물처럼 흐르는 삶이 여여한 마음이다. 비우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비우는 게 바른 삶이다. 묶이면 썩는다. 썩으면 고통밖에 남는 게 없다. -글:-한주선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