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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우리의 업과 과보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1.

    오늘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해 봅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교설(敎說),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부처님의 생애를 통해, 부처님이 설법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셨던 그 내용이 무엇인가?
    이러한 부처님 가르침의 내용을 불법(佛法)이라고 합니다.

    불법이란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심도 있게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그 해결점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진실한 모습’을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이 탐닉하고 있는 세간, 그 진실한 모습을 추구해 본다면 온통 괴로움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 같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 “모든 세간에 충만한 괴로움의 원인은 업(業)일 뿐”이라고 단정 지으십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업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수타니파타에서는 업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들은 업에 의해 존재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업에 매여져 있다. 마치 수레가 밧줄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

    업이란 무엇인지 어원을 따져보겠습니다.
    업(karma 카르마)은 ‘짓다’를 어원으로 하는 개념인데 일, 작업, 노동, 작용, 업적, 기능,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이러한 업 사상은 자기 밖에 어떠한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기의 업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 신이 정한 법칙에 의하거나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기의 손으로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이를 불러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합니다.

    업이란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행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신체적인 행동[신업(身業)], 언어표현의 행위[구업(口業)], 의지적인 사려[의업(意業)], 이 세 가지를 삼업(三業)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고 다시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상호 동시적 관계에 있으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순간순간 창조해 나가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속박하고 지배하기도 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이 세 가지의 행위를 그 성질에 따라 분류해 봅니다.

    1. 상호관계성으로서의 업
    한 개인에 의한 행위의 결과가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분류한 것입니다.
    첫째, 개인에게 국한된 행위입니다. 이를 불공업(不共業)이라고 하는데, 이는 공업(共業)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어떤 한 사람의 행위로 인한 과보를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죄를 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복을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 그러한 행위를 각각의 개인이 지은 것일 뿐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공동으로 함께 하지 않는 행위를 불공업(不共業)이라고 합니다.

    둘째, 타인과 함께 하는 행위인데 이를 공업(共業)이라고 합니다.
    이는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어떤 일을 공동으로 하는 경우입니다. 작게는 개개인의 가정생활이 공동체로 유지되는 것으로부터 크게는 국가 사회의 조직이 유지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는 전체가 합심하여 공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경우를 공업(共業)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불공업과 공업은 그 성질이 외형상 동일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는 상호 연관관계로써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살펴보면 어떤 한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건축업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리 공사를 맡았으나 적절한 재료와 기술을 투입하지 않고 공사를 했습니다.
    그러한 부실 공사로 인하여 그 다리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 업자는 그로 인해 구속되어 그 죄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 업자를 조사해보니, 그 공사를 맡고 준공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관계자들에게 많은 뇌물을 바친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뇌물은 그 사회의 관행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럴 경우 부실한 공사를 한 책임을 지고 구속되어서 죄 값을 치른 것은 불공업(不共業)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행화된 뇌물로 인해 부실공사가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사고는 공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 개인의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그 행위를 신중히 해야 합니다.

    2. 그 성질적인 업
    행위를 다시 그 성질상 착한 성질의 행위[선성업(善性業)]와 악한 성질의 행위[악성업(惡性業)]와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행위[무기업(無記業)]의 세 종류로 분류합니다.

    첫째, 현실적으로는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동시에 이익을 주고 시간적으로는 금생과 내생, 그 모든 시간대에 함께 이익 되는 모든 행위를 ‘선한 성질의 행위’, ‘선업(善業)’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善)은 사회일반에서 말하는 ‘상대적인 선(善)’과는 구별됩니다.

    ‘선업’을 세분하면 오계(五戒), 십선(十善), 육바라밀(六波羅蜜), 사섭법(四攝法) 등이 있고 이러한 행위는 삼선도(三善道)나 출세간(出世間)에 태어날 원인이 됩니다.

    둘째,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손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금색과 내생 그 어느 쪽에서도 손해를 보는 것을 ‘악한 성질의 행위’, ‘악업(惡業)’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선업과 마찬가지로 몸과 입과 뜻[신구의(身口意)]을 의지해서 ‘십악업’ 등의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데, 이 행위는 삼악도(三惡道)에 가는 원인이 됩니다.

    셋째, 그 행위가 착한 성질도, 악한 성질도 아니어서 자신과 타인 그 모두에게 전혀 손해와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금세나 내세에도 손해와 이익이 없는 행위를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행위’, 무기업(無記業)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밥을 먹거나, 차를 타고 가거나, 무엇인가를 만드는 행위부터 크게는 직업상 하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해당됩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과 가정의 생존을 위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않으므로 선업(善業)이라 하긴 어렵지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악업(惡業)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선업도 악업도 아닌 이러한 행위는 선악(善惡)의 과보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업(無記業)은 그 동기에 따라서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착한 성질의 행위’로 이루어지거나 ‘악한 성질의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여 관료가 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관료가 되어 국민을 이익 되게 했다면 그가 공부한 행위는 선업이 되지만, 비리를 저질러 국민의 세금을 포탈했다면 그가 공부한 행위는 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3. 인과관계로서의 업
    중생의 행위를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복업(福業) 비복업(非福業) 부동업(不動業) 등 셋으로 분류합니다.

    복업(福業)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는 행위를 착한 성질의 행위에 해당하는 십선업(十善業) 등으로 행하면 이는 인간이나 천상의 복스러운 결과를 부르므로 이를 ‘복의 결과를 가져오는 선한 행위’ ‘복을 부르는 행위’ ‘행복을 가져오는 선한 행위’라고 합니다.

    비복업(非福業)은 죄업(罪業)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우리의 행위를 악한 성질인 십악업(十惡業)으로 행하면 그 행위는 지옥 아귀 축생의 과보를 받게 되거나 인간의 과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온갖 괴로움의 과보를 부르므로 ‘복스럽지 못한 행위’ ‘괴로움의 원인을 제공하는 성질의 행위’라고 합니다.

    부동업(不動業)은 십선업(十善業) 이외에 다시 지관법(止觀法) 수행을 닦고 이를 통해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서 여러 선정을 얻으면 그 선정의 경지는 복과 복 아님, 이 둘 가운데 그 어느 쪽에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이러한 선정의 경지를 부르는 행위를 ‘흔들림 없는 행위’라고 합니다.

    4. 시간적인 측면에서의 업
    우리가 지은 행위에 따라 결과를 받을 때의 빠르고 늦음에 따라 3종류로 나누는데 이것을 삼시업(三時業)이라고 합니다. 이 삼시업은 불교의 윤회사상과 깊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첫째, 현세에서 업을 짓고 현세가 끝나기 전에 그 댓가를 치르는 것을 현세에 받는 행위라 하여 현수업(現受業) 또는 순현수업(順現受業)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고 가정합시다. 국민들의 크나큰 저항에 의해 쿠데타 정권이 전복되고 난 뒤 민주정부가 수립되었고, 민주정부의 적법한 재판에 의해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을 사형시켰다고 할 경우, 이러한 경우가 현수업(現受業)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쌓아둔 선업이 자신이 저지른 악업보다 작은 경우에 해당됩니다.

    둘째, 현세에서 지은 행위에 따른 과보가 다음 생에 받는 경우를 생수업(生受業) 또는 순차수업(順次受業)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앞에서 예로 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이 국민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사히 임기를 채우고 퇴임하여 편안한 노후를 보낸 뒤 생명이 다했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사람을 죽인 과보를 받지 않았으므로 다음 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선업이 악업보다 큰 경우에 해당되는데, 전생에 지었던 복이 많은 사람은 설사 금생에 중죄의 악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현재의 복력(福力)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바로 그 죄과를 목전에서 받지 않고, 현생에 받을 복이 다해야만 다음 생에서 그 과보가 이루어집니다.

    셋째, 전 전생에 했던 행위의 과보를 후후 다생이 지난 뒤에 받는, 즉 어느 시기에 받을지 아직 미정인 상태를 후수업(後受業) 또는 순후수업(順後受業)이라고 합니다.

    앞에 예로 든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의 복력이 매우 커서 그 다음 생에도 과보를 받지 않은 경우 언젠가 복력이 다하면 그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경우를 후수업(後受業)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설명해 보면, 전생이나 현생에 지은 선업이나 악업의 힘이 극히 미약하여 많은 생을 기다려야만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업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해 보았습니다.
    업을 단 한 마디로 정의하면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에는 과보가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과보가 따르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모든 업에는 과보가 따르는가?”
    여기에 대해 부처님은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이 있으면, 현세에 받든 혹은 내세에 받든 그는 반드시 그 보(報)를 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그는 보(報)를 받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고의성이 있는 행위에는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한 번 저지른 업은 결코 소멸하지 않고 과보가 반드시 나타나는가?”
    부처님께서는 그 의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지은 업(業)에 따라 그 보(報)를 받는다. 그래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없앨 수 없고, 범행을 수행하면 곧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여기서 범행은 일반적으로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말하지만 포괄적으로 선업을 닦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물과 소금을 예로 들면서 같은 양의 소금이라도 물이 적으면 마실 수 없이 짜지만 물의 양이 많으면 짠 맛을 느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악업은 소금에, 선업은 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닦은 선행으로 충만해 있으면 조그만 악행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악행으로 가득 차 있으면 조그만 악행도 큰 괴로움을 일으키게 됩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조그마한 돌멩이라도 물에 놓으면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엄청나게 큰 바위를 물에 놓는다고 하더라도 커다란 배가 그 바위 아래를 받치고 있으면 바위는 물에 빠지지 않습니다. 돌멩이나 바위를 악업이라고 한다면 배를 선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업이 크면 작은 악업이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업과 업에 따른 과보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설법을 정리해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업설(業說)은 한 개인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한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에 파급효과를 끼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이 행위를 함에 있어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행위에는 반드시 그 과보가 따르게 되므로 가급적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악업을 지었을 경우에는 나쁜 과보를 받기 전에 이를 상쇄할 만한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쁜 과보를 언제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평소에 선업을 많이 닦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상대적인 선과 악을 초월한 부동업(不動業)을 닦아야 하는데, 이는 십선업(十善業) 이외에 지관법(止觀法) 수행을 닦고 이를 통해 여러 선정을 얻으면 그 선정의 경지는 선과 악, 이 둘 가운데 그 어느 쪽에도 흔들림이 없게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늘 설법의 주제인 업(業)과 관련하여 우리는 마지막으로 경전의 한 귀절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출생에 의해서 비(非)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업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 업에 의해서 비(非)바라문이 된다.
    업에 의해서 농부가 되며, 업에 의해서 고용인[용인(傭人)]이 된다.
    업에 의해 도적이 되고, 업에 의해 무사(武士)가 되며, 업에 의해 제관(祭官 제사를 지내는 사람. 즉 높은 신분)도 되고, 업에 의해 왕도 된다.” 자신은 현재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업을 짓고 있는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보산 법광 두 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