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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수행자의 이상 상.(1)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1.

    사람(人施設)
    남방불교 성전으로 《인시설론(人施設論)》이라는 논전(論典) 이 있다.
    이 책은 불교경전 가운데 '사람'에 관해 언급된 부분 을 추리고 정리해서 열 개 항목으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인 시설(人施設)'이라는 뜻은 편의상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불교교리는 무아설(無我設)을 표방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경전에서 부처님을 언급하는 대목에 이런 말이 있다.

    "홀로 이 세상에 출현하다. 대지대광(大智大光)이 출현이니 라."
    또 수행자인 제자들도 나름대로의 '인격'으로서 취급되고 있다.
    사실은 무아이고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이지만 우 선 사람이라고 명칭하고 편의상 독립자존의 존재로 가정한다는 뜻에서 '시설(施設)'이라 부르는 것이다. 시설의 원어는 Pannatti, Prajnapri로 '가(假)'라고도 해석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 언급되는 '인(人)'에 관한 용례의 집성을 '인시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람에 관한 분류는 어떤 것이 있는가.
    남과 여라는 분류가 있을 수 있다.
    수행자라면 비구, 비구니, 신자라면 우바새, 우바이 로 나눈다.
    인도인과 외국인으로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경전 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수행의 진보상태(깨달았는가, 아닌가. 등)에 의한 분류다.
    이 같은 분류의 기본으로 생각되는 것은 범부 인가,
    성인인가 하는 것이다.

    범(凡)과 성(聖)
    범부는 무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범부에 는 '번뇌구족의'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듯이 불교적으로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는 존재다. 인도의 원어로는 어린이, 어리석은 자 라는 의미를 가진 bara, 또는 '이생(異生)'이라 번역하는 가지각색의 태생이라는 뜻을 가진 putthujana, prthagjana에 해당된 다.

    두 말을 합쳐 '범부이생(凡夫異生)'이라고도 한다.
    불제자들 도 처음 입문했을 때는 범부이지만 마침내 수행을 쌓으면 깨달음 을 얻어 '성(聖)'이라고 불리게 된다.

    원래 '아리야'라는 말은 인도·아리안인의 긍지를 나타내는 민족명으로 드라비다인과 그밖에 '가지각색의 태생'인 자들과 비교해서 사용되던 말이다. 같은 말이 불교에서는 수행을 쌓은 불제자와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대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 '아리야'란 말은 민족명·인종명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개념으로써 아리야적인 문화전통을 익힌 자들을 이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통파의 경우 바라문 계급이야말로 '아리야'로서 그 지위를 자랑했음이 틀림없다.

    부처님 제자로서 '아리야'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번뇌를 완전히 끊고(漏盡)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應供)자로서 세상의 존경을 받았던 아라하트(阿羅漢)를 최고지위로 하여, 사 향사과(四向四果)라 부르는 여덟 가지의 계위에 속하는 자를 말 한다. 이러한 계위는 물론 후대에 와서 성립된 것을 틀림없지만 어쨌든 그 명칭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예류(預流:須陀洹)로 '흐름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처 음으로 부처님의 교훈이라는 강물의 흐름에 올라탄 자 즉 수행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지키는 실천을 계속할 것을 확립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청정한 법안(法眼)을 얻는다고 한다.

    다음은 일래(一來:舍陀含), 그 위가 불환(不還:阿那含)인데 일래는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들기 전에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자, 불환은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자라는 뜻 이다. 그 위에 앞서 말한 아라한이 있다. 이 네 가지를 '4과'라 고 부르는데 전단계가 있다고 보고 (이를테면 예류향과 예류과) 모두 합해 4향 4과의 4쌍 8배(四雙 八輩)라 한다. 이들만이 '아리야'인 것이다.

    이 중 최초의 '청정법안을 얻은' 예류과는 진리를 보는 단계로 '견도(見道)'라 한다.
    이것은 예류향에 해당하는 15심 찰나 (十五心刹那)를 지나면 제16심 찰나부터는 예류과라고 하니까 거 의 직관에 가까운 짧은 시간에 달성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후 의 여러 단계는 '수도(修道)'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장기간에 걸친 실천의 반복에 의한 단련을 필요로 한다. 이들이 수도를 계속하여 마지막으로 '아라한과'에 도달했을 때 부처님과 같이 이런 선언을 하게 된다.

    "나의 생(輪廻)은 끝났다. 범행은 확립됐다.
    해야 할 일은 모 두 마쳤다. 이제 윤회의 생은 더 이상 없다."
    아라한은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무 학(無學)'이라고도 불린다. 무식하다는 뜻의 불학(不學)과는 다르다. 이에 비해 이 앞의 7위는 아직 배워야 할 아리야라는 뜻으로 '유학(有學)의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부처님 재세중 499명의 제자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시자였던 아난다는 다문 제일이었지만 아직 젊고 번뇌가 많아 아라한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곧 깨달아 5백 명의 아라한이 되었다. 이것이 '5백 나한'의 유래다 (선종사찰에서는 16나한상을 모시는데 그 명칭과 기원은 중앙 아 시아로 생각되고 있다).

    견도를 얻는데 는 16심 찰나의 직관에 의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이전에 긴 수행, 즉 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선정에 의해 체득하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오랜 수행의 효과가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란 다름 아닌 '4제의 현관(現觀)'이다.

    4과의 성위 가운데 최초의 것인 예류과는 극히 짧은 시간에 얻어지는 것이라 해도 쉽게 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랜 기간 수도를 한 뒤 한 순간 돌연한 회심이 이루어진 것이라 고 보는 것이 옳다. 이 회심의 체험이 '청정한 법안을 얻었다'는 기쁨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때가 범부에서 성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전환점을 '범부의 종성(種姓)을 초월해 성인의 종성으로 들어간다.'라고 표현한다.
    또 이 단계를 '바른 위(位)에 확정됐다(正性異生)'고도 하며 '정정취(正定聚)' 에 들게 되었다고도 한다.

    범부에서 성인으로서 전환은 뒤에 확립된 계위로는 범부도 성 인도 아닌 경계선을 '종성인(種姓人)'이라는 이르므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은 예류향 직전의 위치로 인식되었다.
    이것을 범부 쪽에서 보면 '세제일법(世第一法;세상에서 최고의 지위)'이 된다.
    유부에서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이 '세제일법'을 최고로 하는 범부의 세계에는 네 가지의 계위 가 있다.
    이것을 '4선근'이라 한다.
    《구사론》은 성위 이전의 수행에는 이밖에도 많은 계위를 설정해 세밀한 규정을 가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출가해서 삼의일발(三衣一鉢)로 소욕지족의 생활을 하는 것(戒)부터 시작해서 부정관등의 선정을 실천하면서 (定)4제를 관하는 일(慧)이 수행의 중요과정으로 제시되고 있다.

    범부는 이러한 수행을 닦아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를 '현위(賢位)'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성위와 합쳐 '현성 (賢聖)'이라고 한다.
    이 같은 계위는 확실한 수행의 발전과정에 의해 명명된 것이 틀림없으나 지나치게 상세하여 오히려 형식적 인 분류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짙다.

    이상은 아비달마의 교학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조직화된 계위지 만 근본을 따지자면 부처님 이후 출가한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리고 그 최고의 성위는 아라한이며 부처님의 제 자는 아라한이 되어도 부처님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보살의 계위(階位)
    이 같은 사고방식에 대해 대승은 만인에게 부처님과 같이 아뇩 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을 구극의 목적으로 하여 발심한 사람 을 깨닫기 이전의 부처님과 똑같은 '보살'로 호칭했다.

    그러면 보살은 어떠한 수행을 하고 어떠한 계위에 올라가는 것 인가.
    북인도 지방에서 행해졌던 설출세부(說出世部)라는 부파 가 전하는 부처님의 전기 《마하바스투》에는 보살이 거치는 계위로 관정위(灌頂位)를 최후로 하는 열 가지의 단계(十地)를 들 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되기 이전의 보살, 즉 석가보살 전신 의 수행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관정위라는 것은 즉위관정(卽位灌頂), 즉 왕이 즉위할 때 머리 위에 물을 붓는 의식에 비유한 것으로 진리의 지배자인 법왕으로서 부처님의 성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대승불교 자체에서는 《반야경》에 나타난 바에 의한 '초발심'으로 시작하여 실천(行)으로 들어가 (명칭은 일정하지 안. 뒤에 治地 또는 新學이라 불렀다.) 마침내 '불퇴전(不退轉)'의 위에 오르고 마지막으로 법왕자로서 도솔천에서 다음 생 의 성도를 준비하는 '일생보처(一生補處)' 즉 한번만 다시 태어나는 윤회 생존을 남겨두고 있는 위치까지 네 단계가 있다.

    이와는 달리 《화엄경》에서는 앞서 말한 십지설(十地說)을 이 어 받으면서 《반야경》의 주장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10지설(十地說), 10주설(十住說)이 성립되었다. 여기에서는 '초발심 지'·'치지'를 거쳐 제7지가 '불퇴전지(不退轉地=阿惟越治)'가 되 며 그 뒤는 '동진(童眞)'·'법왕자'를 거쳐 '관정지'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불퇴전'이라는 것은 수행을 확실히 몸에 익혀 이제부터는 후퇴하지 않는 지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동진은 소년처럼 순수해졌다는 뜻이다.
    이 10지설은 그 후 다시 새로운 10지설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10지경》의 10지설이다.
    《10지 경》의 10지설은 '환희지(歡喜地)'로 시작하여 '법운지(法雲地)'로 끝나는데 각 명칭은 6바라밀의 실천(제1∼제6)과 4바라밀 을 더해서 10바라밀의 실천에 따른 것이다.
    초지인 '환희지'는 보살의 출발점으로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생제도의 서원을 세운 다.

    이것에 의해 '여래의 집에 태어난다.'고 한다.
    때문에 환희지 는 일반적으로 '성인에의 입주(入住)'. '정성결정(正性決定)'으 로 해석하고 있다. 제6지인 '현전지(現前地)'에서는 반야바라밀 의 수행이 강조된다. 반야바라밀에 의해 체득되는 진실한 이치 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 '원행지(遠行地)'는 보살이 그 결과로서 불제자들보다도 훨씬 먼 곳까지 도달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제7지에서의 수행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제8 '부동지(不動地)'가 상이 되면 보살은 부처님을 대신해서 중생제도를 위해 법을 설하고 중생 을 인도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8지 이상의 보살을 종 종 '대력(大力)의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같은 《10지경》의 10지설은 앞서 말한 오래된 10지설(十住) 외에 10행·10회향이라는 계위설과 합해 《화엄경》에서는 42위 가 되고 《범망경》에서는 최초에 10신을 두어 52위를 헤아리게 되었다.

    즉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10지(十地)·등각(等覺)·묘각(妙覺)이 그것이다. 여기에 불위(佛位)를 더하면 53위가 된다. 이 경우 환희지 이상의 10지 는 성인위가 되고 그 이하는 범부위라 한다.

    보살의 길에는 초발심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부처님 이 될 때까지 많은 계위가 있다.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석가보살 이 성도하기까지 3아승지겁이나 되는 긴 생을 반복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대승불교도 이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화엄경》에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란 말이 있듯이 발심을 매우 중요시했다. 범부도 참 다운 발심을 하면 즉각 '여래의 집'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보살은 중생제도의 서원이 크기 때문에 스스로 부처님이 되기 전에 모든 중생 을 피안으로 건네주고자 노력하는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대승경전이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보살의 서원 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이상을 제시하기 위해 보살은 곧잘 뱃사공에 비유되기도 한다.
    또 이론적으로 '지혜가 있으므로 생사윤회에 빠지지 않고 자비 가 있으므로 열 바에도 안주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생사와 열반에 도 머물지 않는 보살의 본분을 '무주처보살(無住處菩薩)'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타를 살고 있는 보살의 이상상이 이것이다.

    우리는 흔히 보살이라 하면 문수(文殊)·보현(普賢)·관음(觀音)·세지(勢至)·미륵(彌勒)·지장(地藏)등 대보살을 상기한 다. 지금 그 하나하나를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설명하면 이렇다.

    미륵(마이트레야)은 일생보처의 보살로 현재 도솔천에 대기 중이며 56억7천만년 뒤에 이 사바세계에 하생한다고 한다. 석가여래가 열반한 후 그 교법은 얼마동안 존속되지만 마침내 무불(無佛)의 세상이 되므로 그 후에 오는 미륵의 세상에 행복을 기대하고 지금부터 미륵의 하생을 기대하는 것이 미륵신앙이다.
    이것 은 일종의 메시아니즘이다.

    문수(마주수리)는 지혜 제일이라 하여 《반야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문수를 따르는 사람이 반야를 만든 다'고 까지 생각되었다.
    문수가 있는 곳을 청량산(淸 山)이라 고 하는데 중국의 오대산과 우리나라 오대산이 문수가 머무는 청량산이라는 신앙이 전해지고 있다.

    문수가 지혜의 상징이라면 행의 완성자로 존경받는 것이 보현(사만타바트라)이다.
    이 보살은 타토(他土)의 보살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부처님의 교설을 듣고자 멀리서 달려왔다고 《화엄경》 에 기록돼 있다.

    아마도 《화엄경》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진 새로운 이미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보현은 행(실천)을 상징하는 보살로 '보현행(普賢行)'이라고 하면 대승적 수행의 전형을 뜻한 다.

    화엄경》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문수사리의 권고에 따라 53인의 선지식을 차례로 방문하며 보현행을 실천하여 마지막으로 보현에게로 간다는 구도편력의 얘기로 꾸며져 있다. 《화엄 경》은 보현과 문수 두 보살이 부처님을 대신해 중생제도의 설법 이 행해지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신앙에서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관음(아바로키테스 바라)일 것이다.
    이 보살의 본적은 남방의 보타낙산(補陀落山)인 데이는 힌두교의 자재신(自在神)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인다. 《법화경》의 보문품(普門品)은 관음이 서른두 가지의 몸 (三十二應身)으로 중생제도의 활동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정토계통의 경전에는 아미타불의 협시(脇侍)로서 대세지와 나란 히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원래 독립된 신앙의 대 상이었으므로 관음과 아미타의 관계는 나중에 성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지장보살은 초기 대승경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지장보살은 이런 뜻에서 비교적 늦게 태어난 보살이다.
    이 보살은 지옥으로 향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며 지옥까지 가서라도 중생을 위해 헌신한다.

    보살의 대자비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 보살은 머리를 깎고 출가비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보살이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것과 큰 차이점이다.

    그러나 연구결과로는 문수도 출가의 보살이며 대승경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살 또한 출가신분이라고 한다.

    이는 교단적 측면에서 볼 때 재가자를 중심으로 출발한 대승불교가 다시 출가중심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산 법광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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