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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바른 수행 길 제시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1.

    요즘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선(禪)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쉽고 바르게 쓰인 선수행서가 없다는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이제 화두를 해설하는 책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본인은 선과 교학이 괴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교학이 없다면 왜 선정을 닦아야 하는지, 선정을 닦아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뒤에 우리는 어떠한 경계를 체득하게 되는지 바르게 설명할 수 없다.
    이미 부처님께서 연기설을 설하실 때 중생이 사량하고 분별하는 정신세계를 설하여 주셨고, 깨달음의 세계는 어떠한 경계인지 분명하게 펼쳐보여 주셨다.

    그래서 규봉종밀 선사께서도 선과 교의 일치를 주장하셨다.
    근래에 선수행의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화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화두를 해설하는 책까지 펴내고 있다.
    이 모두가 교학을 바르게 알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교학을 바로 세우면 곧 바른 수행의 길도 밝혀질 것이다.
    불교에서 얻고자 하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였더라면 적어도 이토록 잘못된 풍조만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증득하는 것이다.

    물론 무분별지를 증득한 뒤에 다시 무분별후득지(無分別後得智)를 나투는 세계를 설명한 것이 화엄(華嚴)의 세계이지만, 그야말로 무분별지를 증득한 뒤의 이야기이니, 논의를 간략하게 하기 위해 무분별후득지는 뒤로 미루어놓고 설명하기로 하자.

    무분별지란 인법양공(人法兩空)이라고 간략히 설명할 수 있다.
    인공(人空)이란 인식주관이 헤아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작용이 끊어져서 일체의 번뇌와 망상이 끊어진 것을 설명한다. 법공(法空)이란 인식주관이 헤아려 생각하고 분별하여 생겨나는 인식현상(法)이 끊어진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연기설을 설하신 것은 바로 중생이 헤아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망령된 것인가를 펼쳐 보이신 것이다.

    즉, 중생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것은 오온(五蘊)의 단계를 거쳐 일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인식은 중생의 마음속에서 열두 가지 연기(緣起)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것을 자세히 밝히신 것이다.

    이렇듯 중생이 사량하고 분별하는 것은 무명(無明)이라는 미혹 때문에 자신의 탐욕과 감정으로 말미암아 자의적으로 조작하고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허망한 것들이라고 설파해주신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를 보면서 “예쁘다” 또는 “밉다”는 분별과 망상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상(相)들이 본래 어디에 있는가?

    내 마음 속에서 자신의 미적 기준이라고 하는 관념에 의해 조작해서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허망한 표상(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생은 이러한 허망한 표상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그것에 얽매어 울고 웃으며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한 생각을 끊어버리면 곧 슬픔도 고통도 없는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허망한 표상을 만들어내는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그 마음의 작용을 끊어버린 것이 바로 인공(人空)이며, 그 마음에 일어난 허망한 표상들이 끊어져 없어져버린 것이 법공(法空)이다. 헤아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의식의 작용이 완전하게 끊어져서 일체의 연기하는 작용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분별하는 의식의 작용이 분별적 사유의 작용이 없는 의식의 작용으로 바뀌는 것을 유식학에서는 전의(轉依)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즉, 분별적 사유에서 무분별적 사유의 양상으로 완전하게 바뀌는 것을 설명한다.
    이러한 전의를 이루기 위해서 선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옛 선사들이 공통적으로 “묘한 깨달음은 마음의 길이 끊어지는 것이 필수적이다”고 설명하고 계신다.

    대혜 선사께서도 “단지 범부의 정식(情識)이 끊어질 따름이지, 따로 성스러운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고 설하신 것이다. 연기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 끊어지면 모든 것을 참답고 바르게 인식하는 지혜의 경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육조혜능 대사의 법제자 이신 영가 현각스님의 <선종영가집>에 “연기하는 작용이 끊어진 뒤에 고요하고 고요하여 신령스럽게 아는 지혜의 자성(自性)이 분명하고 또렷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제 깨달음의 세계가 어떠한 경계인지가 분명하게 밝혀졌으니, 선을 닦는 목적과 방법이 또한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다. 화두를 참구하며 선을 닦는 것은 분별하고 사유하는 마음의 작용을 끊는 것이다.

    그런데 화두를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고 해석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분별하고 사량하는 마음의 작용이 끊어질 수 있겠는가?

    다만 알 수 없는 의심에 사무쳐서 눈멀고 귀먹어버리는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가지 않고는 결코 마음의 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화두를 해설해버리면 그것을 읽는 사람이 어떻게 큰 의심을 일으켜서 선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제발 이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보산 법광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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