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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화두(話頭), 이놈이 무엇인고 ?】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1.

    환영 합니다.

    이제 차츰 믿음을 갖고 살다보면 스님들께서 하신다는 화두에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스님들께서는 왜? 엉뚱한 화두 답을 하는가.그래서 화두 중에 가장 많이 들고 계시는 이놈이 무엇인고!? 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화두(話頭), 이놈이 무엇인고. ?】

    화두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자기 마음 하나 깨닫는 것뿐이다.
    부처님께서 많은 법을 설하신 것도 단지 마음 하나 깨달으라고 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말하기를 해인사 장경각의 경판은 다 마음 심(心)자 하나 해석하는데 불과하다고 했다. 마음이란 이름만 들었지 보기 어렵고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른다.
    혹 있다는 장소를 머리에 생각해도 안 되고 배에, 가슴에, 몸 전체에 있지도 않고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저 떼어놓고 말로만 마음이라 한다.

    그러기에 깨달으려면 (마음 있는 자리를 아는 것) 무수한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신체는 법계(온 세계를 둘러싸고도 남는 것)와 같다.
    인간의 이 작은 체구에서 그런 거대한 이치를 포함하고 있지만 깨닫기 전에는 모른다.
    깨달은 후에는 마음 쓰는 범위가 이렇게 넓다.
    이런 넓은 자리가 머리에, 가슴에, 배에 있다고 해도 맞지 않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 몸 하나를 체험해 보더라도 아플 때나 가려울 때의 감각은 어디를 만져 봐도 느끼는 것은 같지 않은가. 그러기에 어느 한 부분에 있다고 하면 맞지 않다.
    어디고 다 통하기 때문이다. 깨친 분상에서 보면 범위가 온 세계를 둘러싸고도 남는다.

    부처님 당시에는 근기가 수승(殊勝)하여 마음이나 행동으로써 가르치면 다 알아들었는데, 차츰 차츰 내려오면서 근기가 하열하여 그렇게 해서는 모르고 알기도 어려워서 염불(念佛), 참선(參禪), 주력(呪力), 간경(看經), 기도(祈禱)등의 여러 가지 방편으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염불, 참선 두 가지를 이용했다.
    옛날에 근기가 수승했을 시에는 따로 앉아서 하는 게 아니고 일상생활을 통해 오고 가면서 깨닫고, 알고 했다. 그 후 근기가 약해져서 그냥 앉아 있으니 그래도 잘 알기 어려워서 화두법이 생겼다.

    화두란 글자 그대로 말의 머리다.
    누군가 요긴한 말을 하는데 이를테면 미리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요지가 어디에서 무엇에 초점(마음 있는 데까지 들어가는 것)을 두고 말하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아직까지 초점이 나오기 전에, 말을 딱 끊어 버렸다면 듣는 사람이 그 얼마나 궁금해 하겠는가. 무슨 말을 하다가 하지 않고 끊어버리고 있는 게 바로 화두다. 말을 하다가 딱 끊어버리니까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까 의심이 생긴다.

    이와 같이 화두도 마찬가지다.
    화두는 1700여 가지나 된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말은 달라도 뜻은 같다.

    예를 들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 라고 물었을 시에 "마당 앞에 잣나무다. (庭前栢樹子)"라고 하고 또 "모든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一切衆生皆有佛性)"라고 해 놓고 마당 앞에 개가 지나가기에 "저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狗自無佛性也)"하니까 "없다(無)"라고 답하거나 아니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如何是佛乎)"하니 "마삼근(魔三斤)" 이라고 답한 것에서 보면 이만 저만이 아닌 것이 아닌가. 이것은 완전히 뚱단지 같은 답이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곳에 왜 그런 답을 했을까? 하고 의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의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다른 생각을 못하게 붙들어 매어 놓는 것이다.

    이런 엉뚱한 대답을 왜 했을까? 하는 것에 마음을 붙들어 놓으면 된다.
    화두에 의심을 걸어서 자꾸 의심만 하고 앉아 있으면, 그것을 하기 위해 딴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비록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딴 생각을 하게 되지만 자꾸 의심을 챙겨서 조금씩 나아가면 없어지곤 하니까. 그렇게 의심이 잘 잡혀 나갈 때 딴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면 청정 본심만 남게 되어서 깨친 공부에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하겠습니다.

    -보산 법광 두 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