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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초기의 불교

by 혜명(해인)스님 2018. 7. 11.

    오늘의 불교는 과거의 불교가 있었기에 우리가 불교라는 진리위에서 삶을 지탱해가게 되는 것이다. 현사회의 거개의 사람들이 TV 드라마에서 큰스님의 함자를 갖고 술이나 많이 마시고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 불교 지도자 인양 잘못들 인식하고들 있다.

    TV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역사 스토리에 흥행성과 흥미를 가미하여 긴장과 스릴과 크라이막스를 살려서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은 역사극인 것이다. 소승이 제일 못마땅한 드라마가 "왕건" 이라는 드라마다. 거기에 나오는 스님들은 법복입고 거들먹거리고 권력에 아부하고 법문 하나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조선 초기의 불교와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을 이야기 해 보고 져 한다.
    신라, 고려, 조선의 세 왕조에 걸쳐 불교가 가장 빛을 잃은 시기는 조선왕조라 할 수 있다. 고려 말부터 불교 말살정책이 유교에 의하여 제창된 것은 앞서 밝혔거니와 이조에 있어서도 그 불은 꺼지지 않았다.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호를 송헌이라 하며 함경도 영흥 출생이다.
    그는 무예와 지략이 있는 명장이었으며 고려 공민왕때 왜구를 쳐부수고 남도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소굴을 소탕함으로 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홍건적과 원나라가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사로서 적을 물리치고 국가의 위신을 세우게 되어 명성을 조야에 떨치게 됐다.

    그럴 즈음에 고려의 국운은 기울어지고 그는 신세력과 합작하여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게 되었으며 정도전 등과 합심하여 왕을 내쫓게 됐다.

    왕권파인 정몽주는 이성계에 의하여 죽게 되고 척불론자 중의 일부도 왕권파로서 숙청되었는데 정도전은 이성계와 결탁하였으므로 개국공신이 됐다.

    이태조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므로 국권을 잡은 뒤에도 호불정 책을 쓰려고 했다.
    그가 호불 정책을 쓰려고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불교의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불심이 있었다.

    더욱이 왕조의 창업 동기도 불교와 유관하여 더욱 보불정책을 쓰려고 했던 것이다.
    이태조는 그가 왕이 된 것이 불력의 덕이라 생각하였고 불교를 옳게 믿어야 국태민안과 국력이 영구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등극 2년 7월에 해인사의 옛 탑을 중수하고 대장경을 인출하여 옛 탑 안에 봉안해 졌으며 원성대장어제문을 이었는데 어제문에 <불교를 믿고 불교에 귀의하여야 선조를 복되게 할 수 있고 중생에게도 이익이 오게 할 수 있는 것임이라. 이에 즉위초에 고탑을 중수하고 탑의 장엄을 갖추게 하고 군신과 더불어 발원하여 대 장경을 탑 속에 봉안하는 바이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의 가호가 온 누리에 미치고 법운이 널리 퍼져서 모든 중생이 다 잘 살게 하여 주시고 국리민복 함을 과인은 바라옵니다.>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불교에 귀의 하였으므로 불교의 인과설을 믿고 있었다.
    그는 개국 과 더불어 고려의 왕실과 반대파를 무참히 죽였다.
    따라서 언제인가는 죄업의 과보 가 있을 것으로 믿어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즉위 3년째의 해에는 「법화경」3부를 도금하여 불전에 바치고 건국 때 희생된 망령의 명복을 빌기까지 했다.

    불교의 인과응보설은 언제나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으며, 과거의 모든 업보를 멸하게 위하여 진심으로 불교에 귀의 하였던 것 이다.

    태조에게도 호국 불교 의식이 있었다.
    불교를 국교로 했던 나라의 출장입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음으로 태조는 무학자초에게서 사사하고 국사로 삼았던 것이다.

    불교에의 신심은 집권 후에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덕왕후 강씨가 죽 자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륙대제를 지내게 하였고 강화 선원사에 있었던 대 장경판을 지천사에 옮기는 불사도 했다.

    그것은 이태조 자신만의 불교 신앙심이기보다도 죽은 강씨의 불심이 지극하였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그 망령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불사를 대대적으로 벌였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니 정도전 같은 개국공신의 척불론도 왕의 확고한 불교정책에는 맥을 못 추게 되었으며 승려에 대한 제반 예우도 고려 때와 같았다. 이태조는 당시의 고승 무학자초를 존경하여 무학을 왕사로 삼았고 사례로서 무학을 대했다. 태조는 불교의 인연설을 깊이 믿고 있었는데 태조와 무학은 태조가 40대 연의 무장으로 적진을 휩쓸었던 공민왕 시절부터 풍수지리설과 도참으로 써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그 인연의 시작은 이러하다.
    태조의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 9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 태조는 아버지를 장사하기 위하여 장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마침 장지 옆을 지나던 두 중이 있었다.
    나이 많은 승려가 젊은 승려에게 하는 말 이 <지금 이 자리는 장수밖에 나오지 않지만 좀 올려서 묘를 쓰면 임금이 배출될 자리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급히 승려에게 달려가서 예의를 갖추어 물었다.
    이윽고 노승은 이성계에게 묘를 그 위로 옮겨 쓰도록 일러 주었다.
    그때 나이 많은 승려가 유명한 나옹혜근이고 젊은 승려는 무학자초 이었다고 한다.
    그 뒤 이성계는 어느 날 꿈속에서 헌집에 들어가 서까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지는 꿈을 꾸었는데 당시 설봉산의 토굴 속에서 정진하고 있든 무학을 찾아가서 해몽을 부탁했다.

    무학의 해몽은 다음과 같았다.
    헌집에서 서까래 셋을 짊어지고 나온 것은 왕자 모양 이니 왕이 될 꿈이요 꽃이 떨어진 것은 곧 열매가 열리는 것을 말함이며, 거울이 깨진 것은 반드시 큰 소리를 동반한 것이니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전해 오는 고담이다.
    석왕사는 이미 고려조 때 있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뚜렷한 것은 이태조가 부친의 묏자리를 옮겨 쓰 도록 말했다는 무학과 그 후에도 인연을 끊지 않고 계속 존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태조는 즉위하자 무학을 왕사로 삼았으며 대 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 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라는 벼슬을 제수 했다.

    태조는 그 뿐만 아니라 궁중에 200명의 승려를 초대하여 재를 베풀고 무학은 높은 자리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이 설법의 내용은 선에 관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는 고승 뿐 아니라 왕비도 동참했다. 고 하니 이태조가 무학을 얼마나 신뢰 하며 존경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태조가 개국한 다음 천도를 하기 위해 개국공신인 정도전, 남은과 함께 남쪽 땅을 두루 살필 때에도 무학과 같이 다니지 않는 때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정도전 등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를 계룡산으로 정하기로 하고 수 도 건설의 토목공사를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중단하고 한양으로 옮기기로 한 것도 무학의 건의에 의한 것이라 한다.

    토목공사까지 벌이고 있다가 무학의 건의로 이를 변경할 정도이니 태조가 무학을 얼마나 믿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무학은 태조에게 한양을 도읍지로 천거하면서 <한양의 인왕산으로 진을 삼고 북악 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고 했다.> 한다.

    태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3년 8월부터 전국에서 장정들을 징벌하여 새 수도 건설공사를 추진하였던 것이다.

    태조는 여덟 왕자를 두었다. 위로부터 여섯 왕자는 한씨 소생이고 밑의 둘은 강씨 소생이었다. 태조가 여덟째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자 왕위 계승을 위한 분쟁이 발생 했다.

    다섯째 아들 방원이 강씨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비롯하여 정도전등을 죽이게 되자 태조는 방원의 난폭한 살생에 크게 노하여 왕위를 둘째 왕자인 방과에게 양위하고 함흥으로 퇴거 했다.

    이에 태조를 상왕이라 하였는데 상왕은 서울을 떠나 함흥에 있었으므로 왕은 상왕 의 환궁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사신이오며 오면 오는 대로 죽였다.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초기에는 불교를 신봉하고 불사도 많이 하였으나 조선시대 유생들의 권한이 세여지자 이씨조선은 불교탄압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중불교를 계속하면서도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는 유생들보다 앞서 그 위기를 극복하는데 전심전력을 하여 국민들의 안위를 도모했던 것이다.

    또한 뼈를 깎는 수행정진으로 오늘의 불교가 있게 되였음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내가 말하는 요지는 우리 조사, 선사, 큰스님께서는 개인적으로는 생명을 걸고 진리에 도전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의 생활에서는 자기 일신의 생명과 옹색한 절집 살림을 쪼개서 국민들의 안위를 위하여 묵묵히 실천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보산 법광 두 손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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