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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대각교단세불법륜

용성 스님 행장

by 혜명(해인)스님 2019. 5. 30.

용성(龍城, 1864~1940) 선사는 1864(고종 1) 전라북도 장수(長水)에서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법명은 진종(震鍾), 호는 용성(龍城), 속명은 상규(相奎).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혀 오던 중,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며 마정수기(摩頂搜記,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세상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것을 한 말씀)와 부촉(付囑, 부처님이 불법의 유통을 촉탁하는 일)을 받고는 곧바로 출가를 결심, 남원 덕밀암(德密庵)에서 출가하였다.

 

런데 덕밀암과 그곳의 부처님이 바로 꿈속에서 만난 절과 부처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뒤 곧바로 부모에 의해 강제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가 1879년에 해인사 극락암에 다시 출가하여 이곳에서 득도하였다.

 

그 뒤 경상남도 의성 고운사(孤雲寺)의 수월(水月) 장로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무융(無融) 선사에게 불법을 익혀 나가 1885년 해인사에서 두 번째 득도를 하였다.

이듬해 경상북도 구미 아도모례원(阿道毛禮院)에서 세 번째 득도하였다. 이후로 전국 각지의 명산대찰을 순례하면서 수도 정진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때 선회(禪會)를 개설하며 선() 포교를 하기 시작한다.

1910년 꿈에서 다시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불교의 교리를 일반사람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지름길임을 인식, 불교경전 번역과 저술에 큰 뜻을 두었다. 

또한 이때 다른 종교가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을 논박하는 내용의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짓기도 했다

 

1911년에는 대각사를 세웠고, 이듬해에는 조선시대 불교배척정책에 의해 쇠잔된 불교를 부흥시키고자 부산 범어사(梵魚寺)와 양산 통도사(通度寺)를 연합하여 서울에 선종교당(禪宗敎堂)을 세우고 교화에 전력하였다. 또한 1913년에는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정기가 크게 억눌린 시대였는데, 용성 스님은 만해 한용운(韓龍雲) 스님과 더불어 불교부흥과 민족의 장래를 함께 논의하기도 하여 만해 스님과 함께 1919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불교대표로 서명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이고 활발한 불경번역사업에 들어간다.

또한 전통불교가 퇴색하고 일본화 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운동이 필요함을 절감, 대각교를 창업하였다. 본부를 대각사에 두었고 한편으로는 만주 간도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여 이곳으로 유랑온 동포를 상대로 한 포교사업에 열중하였다. 

 

1926년 용성 스님은 한국전통불교를 지키기 위해 승려들의 엄격한 계율생활을 촉구한 건백서(建白書)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 당시는 일제가 발표한 사찰령에 의해 비구승의 가정생활이 허용되어 많은 승려들이 처자와 가정을 거느리게 되는 등 승려들의 계율생활이 형편없이 문란해지던 무렵이었다.

 

따라서 각 사찰마다 대처와 육식이 공공연한 사실로 묵인되었으며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는 주지자격에 비구 조항을 없애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등 한국불교가 매우 어지러워지는 때였다.

 

이때 용성 스님이 건백서를 통해 과감히 승려의 파계를 강력한 반대하는 내용을 발표한 것인데, 이 일로 인해 용성 스님은 조계종 정화의 초조(初祖)로 숭앙되기도 한다.

 

1927년 경상남도 함양에 화과원(華果園)을 세우며 수행과 일을 다 함께 힘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삼장역회의 기관지로 무아(無我)를 발행함으로써 대중포교에 더욱 힘을 쏟았는데, 이 잡지는 아직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다.

 

동년 64세 때에는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창작찬불가를 최초로 작시, 작곡하여 이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 제사 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꾸준히 불경을 번역하고 선회를 개설하며 대각교를 발전시켰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4년 대각교 재산이 신탁되어 사실상 몰수되었다가 1938년에는 결국 대각교가 해산 당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계속 포교사업에 힘을 쓰다 194077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용성 스님의 일생은 조선시대의 불교배척으로 인하여 쇠퇴한 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을 핵으로 하여, 외세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시련기 속에서 외래종교의 범람과 그로 인해 주체성을 잃어 가는 국민들에게 민족주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호국의 법을 설하고, 호법의 불교운동을 쉼 없이 이끌었던 생애였던 것이다.

 

스님이 평생의 과업으로 여긴 불경번역사업의 결과, 한글로 번역된 많은 경전을 남겼고, 한글학회에 의해 스님의 그 같은 한글번역사업이 높이 기려지기도 하였다.

용성스님 행장.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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