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참선수행의 방법-4)화두참구
화두란 말머리 즉, 말 나오기 이전자리 개념과 관념이 붙지 않은 진리의 당체를 찾아가는 관문으로써 불립 문자. 언어도단의 선의 진수를 그대로 간직한 언어 아닌 언어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수행자의 面前에 들이대어 바로 볼 것을 촉구하는 이 수행의 과제 '佛祖의 言句'를 화두(話頭) 또는 공안(公案)이라 한다. 공안이란 본래 관청의 공문서란 의미를 갖는 말인데, 범치 못할 확실한 법칙이라는 뜻이 있다. 그 법칙을 바로 아는데서 살아있는 진리가 들어나는 것이다. 화두는 그 본질이 불조(佛祖)의 깨달음 자체이므로 이러한 성격의 언구는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써 어림될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자신의 眞面目을 밝혀 낼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불조관문(佛祖關門)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대개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나 언동으로 구성된다. 다음에 몇 개의 공안을 들어본다. 혜능대사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밝기로는 태양보다 밝고 어둡기로는 칠흑보다 더하니 대중은 이것을 알겠는가"하였다. "이것이 무엇인가." 시심마(是心磨)로 불리우는 화두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묻기를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없느니라[無]"하였다. 이것이 바로 무자(無字)화두이다. 조사공안이 1천7백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공안들이 자신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때는 결코 화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화두참구에는 사구와 활구가 있다. 죽은 말이 아닌 살아있는 말, 즉,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자기 문제로 다가 왔을 때 화두가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무언가에 콱 막힌 듯하고 더 뚫고 나가지 못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격외도리(格外道理)를 거량하여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어 미망을 한 순간에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바로 화두(話頭)이다. 이러한 과정을 병아리가 부화될 때 어미가 껍질을 한번 쪼아 주어 병아리가 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에 비유하여 '졸탁치기'라고 한다. 공안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천목중봉스님의 말씀은 너무도 정확하게 공안의 의미와 기능을 밝히고 있다. 공안이라고 한 곳은 관청에 있는 문서에다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국가에는 법령이 있어야만 왕도정치가 제대로 실현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이란 훌륭한 도를 깨달아 세상 사람들에게 그 길을 모두 함께 가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이란 성현들께서 그 도를 수행하는 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지 관청을 설립하지 않을 수가 없고, 관청이 설치되면 자연히 그것을 운영하는 법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른 이치를 받아들여 법령을 만들고, 바르지 못한 것들을 박멸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공안이 시행되면 바른 법령이 통용되고, 바른 법령이 통용되면 천하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기강이 바로잡히면 왕도정치가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깨우치게 된 계기를 공안이라 이름 붙인 이유도 역시 위와 같은 뜻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사람의 억지주장이 아니라 신령스런 근원에 딱 들어맞고, 묘지에 계합하여, 생사의 굴레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안은 언어나 문자로 따지는 것을 초월하며, 이것은 시방삼세의 수많은 보살과 함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아주 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생각이나 이치로 알 수도 없으며, 언어로 전할 수도 없으며, 문자로써 설명할 수도 없으며, 알음알이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야지 만 알 수 있는 도리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량 분별이나 증진시키고 그저 이야깃거리의 밑천이나 삼으려고 공안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공(公)이란 뜻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주장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안(案)이란 뜻은 기필코 불조의 깨달음과 동일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안이 풀리면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고, 번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면 생사의 굴레가 공(空)해지면 불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공안인란 바로 번뇌 망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의 횃불이며, 보고 듣는 것에 얽매인 결박을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칼날입니다. 그런가하면 공안이란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도끼이며, 성인과 범부를 가려내는 신령스러운 거울입니다. 조사들의 본뜻이 공안 때문에 분명하게 밝아지고, 부처님의 마음이 공안 때문에 드러납니다. 번뇌를 말끔히 털어버리고 불조의 혜명을 드러내는 데에 이 공안보다 더 좋은 길잡이는 없습니다. 이른바 공안이란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 할 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어른거리지도 못합니다. ②話頭참구의 세 가지 마음 화두참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다음의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大信心)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더라도, 본성은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이와 같으며 이것은 영겁으로 변치 않고 어떠한 동요에도 상관이 없는 불멸의 법으로써 있으며 어떠한 강한 압력에도 흔들리거나 빼앗기거나 나위거나 때 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비록 지혜가 없어 어리석음에 빠져 세간에서 낙인찍히는 악행을 했거나 다시 지옥에까지 떨어졌더라도 자기본성은 일찍이 때 묻지 아니하고, 죄짓지 아니하고 그늘지지 않은 원래로 원만 구족한 진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진리의 주체일진대 그에게는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원래로 충만하다.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뜻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원래로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상생활이 그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행이 될 수 밖에 없다. 밝음과 긍정과 너그러움과 용기는 선자의 기본표정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을 모르고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을 불태우는 불굴의 용진이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제불보살과 일체중생과 함께 함을 믿는 것이므로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한다. 원래로 자신과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애를 걸고 다시 세세생생을 던져서라도 이룩하고자 하는 큰 원과 정진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고 불국토 실현에 두는 것이다. 선자에 있어 이기적 타산은 금물이다.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 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은 무엇인가. 불조가 제시한 화두는 불조가 어려운 수수깨끼 처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앞에 드러내 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에 비해 무엇이 부족하기에 그 뜻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면서도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가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닌가. 제불보살의 영원한 생명이 내 자신에게 있어 조금도 덜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생생하게 지금 내 생명에 뛰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나는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여 보는 것, 듣는 것,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것에 탐착하고 좋고 나쁜 것에 휘둘려 살고 있다. 일찍이 중생이 아니건만 스스로 중생을 환작하여 그것을 달게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전생도 이와 같았고 그 전생도 이와 같았는데 지금 이 생도 또 이와 같다.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 무지와 고뇌의 과거생, 무능과 비소의 과거 무수생을 종말 짓는 결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 긴 생사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당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그리고 큰 분심은 화두에 대한 의정을 일으킨다. 셋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큰 의심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화두에 대한 철두철미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그렇게 하셨나, 왜? 왜?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져 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덮는다. 없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 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조는 화두로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 것이다. 불조께서는 내게 있는 나의 물건을 내 앞에 들이댄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냐. 분명히 내게 있는 이 도리, 명백히 화두에서 밝혀 주었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렇게 큰 의정이 솟아나는 것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 데서 화두는 순숙하게 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 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필경 본분을 밝혀낸다. ③좋은 화두가 있는가?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을 뿐 화두에는 없다. 다만 더 잘 들리는 것이 있을 수는 있다. 수억겁 동안 살아온 업이 달라 수행법 중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고 잘 안 되는 것이 있다. 화두 중에서도 의심이 확 들어 화두참구에 빠지게 하는 것이 있고 좀처럼 의심이 생기지도 앉고 잡히지도 않는 것이 있다. 그러니 스승은 화두를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주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심을 돌발시켜 주는 화두를 줄 것이다. 그러나 혹 스승에게 받은 화두라도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자주 찾아가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편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의정이 생기면 활구요 그렇지 않으면 사구이다.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화두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디 자심의 솟구치는 의정에 따라 활구를 참구해야 할 것이다. ④화두 참구하는 모양 화두란 격외도리로써 불조의 지혜안목을 연 사람만이 알아듣는다. 그 밖의 범부들은 알아들을 리가 없다. 오직 절벽에 맞부딪힌 것처럼 꽉 막힐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하는 의정(疑情)의 벽에 맞서게 된다. 이것이 수행자가 공안에 대한 대응자세이며 그 표정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옛 조사들은 말하기를 공안을 가져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은산철벽(銀山鐵壁)같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는 접근하면 얼굴이 타버리는 큰 불무더기(大火聚)라고도 하고 또한 금강으로 된 밤송이가 목구멍에 걸린 것과 같다 했다. 이 때 의심하는 모양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귀중한 보배를 몸에 깊이 간수하여 애지중지하다가 홀연히 잃어버렸다. 그 사람은 모르고 있다가 손으로 보배 둔 곳을 만져보니 보배가 간데없으므로 의심이 나서 보배를 어디에 두었는가? 하고 찾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또 어두운데서 이상한 물건을 주었는데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으므로 그 사람이 의심이 바싹 난 것과 같이 화두 참구하는 모양도 이와 같다. 혹 화두를 들 때 어떤 때에는 나귀를 끌고 우물에 들어가는 것도 같고, 어떤 때에는 뜨거운 불과 같이 번뇌가 끓고, 어떤 때에는 찬 어름과 같이 마음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어떤 때에는 순풍에 돛단배와 같아서 술술 잘 된다. 그러나 공부가 잘되든지 못되든지 좋고 언짢은 마음을 두지 말고 다만 화두만 참구한다. 또 고요히 앉아 맑고 맑은 것을 취하여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운동하고 말하며, 움직이고 고요히 하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지 말며, 또 생각을 허공과 같이 하든지, 또 마음을 담벼락과 같이 하여 공부를 하지 말지니 이는 공망(空亡)에 떨어진 외도(外道)며, 혼이 흩어지지 않아도 죽은 사람이다. 오직, 왜? 라는 의문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공부를 일심으로 해가면 보고 듣는 경계가 자연히 고요하고 물건과 나를 함께 잊어 산하대지가 없어지고 허공이 녹아지나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자연히 칠통을 타파할 것이다. 또 망상이 일어나면 그 망상을 어떻게 제거할까? 망상이 일어나든지 안 일어나든지 가만히 두고 망상을 없애려 하지 말라. 망상을 없애려고 하면 망상이 더 일어나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소가 달아날 때 소 고삐를 단단히 잡아당기면 소가 스스로 사람을 쫓아오는 것과 같아서 망상이 일어나든지 아니 일어나든지 상관 말고 화두만 들어 의심하면 망상은 스스로 없어진다. 다만 화두를 들어도 망상을 걷잡지 못하겠거든 화두를 즉시 놓아 버리고, 마음도 쉬어 전과 같이 한 뒤에 화두를 들면 새롭게 다시 깨끗해진다. 또 화두를 들어 의심할 때에 몸과 마음을 다 놓아 항상 편안히 하고, 화두를 뚜렷이 의심하라. 화두를 너무 급하게 들면 심장이 움직여 가슴도 답답하며, 머리도 아프고 코에서 피도 나는데 이 병은 마음을 너무 조급하게 한 탓이다. 또 마음을 너무 방심하면 화두를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이니 부디 화두를 너무 극도로 하지 말고 방심으로도 하지 말라. 거문고 줄은 늦추어도 소리가 나지 아니하고, 너무 팽팽하여도 소리가 나지 않나니 공부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첩첩 산중에 들어가다가 홀연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물러나거나 나아갈 곳이 없는지라 이런 때를 당하여 용단력을 다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꽃이 불긋불긋하고 버들이 푸릇푸릇한 곳에 별천지가 있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공부는 다 마음으로 헤아려 궁구하거니와 참선공부는 단지 알지 못하는 이 한 물건을 일심으로 의심하여 참구하는 것이다. 헤아려 알고자 하면 만년을 궁구하여도 알지 못한다. 화두를 참구할 적에 무슨 재미를 찾지 말고, 모기가 쇠로 만든 소위에 앉아 부리를 내리지 못할 곳을 향하여 신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한 번 뚫고 들어가면 몸조차 쑥 들어가리라. 화두만 일심으로 의심하여 궁구하고 추호라도 아는 마음과 구하는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봄이 돌아오면 꽃 피고 잎 피듯이 공부가 익으면 자연히 이같이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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