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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曉蜂) 선사 일대기-법정 스님

by 혜명(해인)스님 2020. 8. 6.


효봉(曉蜂) 선사 일대기-법정 스님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낙엽이 지고 있다.
      움이 트고 잎이 피어나고 곱게 물이 들더니, 이제는 또 한 잎 두 잎 가을바람에 실려 쓸쓸히 지고 있다. 빈 가지들은 허허로운 하늘 아래서 긴 겨울의 침묵을 맞으리라. 새봄이 올 때 까지는.

      이것은 조용한 우주 질서, 무량겁을 두고 되풀이될 하나의 생명현상이다.
      인간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서 자라다가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벗어 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불가(佛家)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生)이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요,
      사(死)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다.
      나고 죽음 또한 그러한 것일래. 한 물건 있어 항상 또렷하니, 그건 고요해서 생사에 따르지 않네.”

      그 ‘한 물건’은 육신의 사멸에도 상관없이 진아(眞我)라고 한다.
      그러기에 생명의 근원적인 입장에서 보면 생(生)도 없고 사(死)도 없다.
      육신의 죽음을 두고 그것을 낡은 옷을 갈아입는 일에 견주기도 한다.
      유기체인 이 육신은 인연에 의해서 한때 화합된 하나의 허구에 불과한 존재란 말이다.

      그러나 ‘있음’에 집착한 우리 마음은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다.
      있다가 없어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서성거리는 게 얽혀서 사는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필자(법정 스님)가 은사인 효봉(曉峰) 스님을 모시기를 입산한 뒤부터이므로 올해로 열두 해째가 된다. 스님의 만년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물론 열두 해를 줄곧 곁에서만 모신 것은 아니고 더러는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 한 해에 두어 차례씩 찾아가 뵈올 때도 있었다. 산은 저 들에서 바라볼 때가 더욱 분명하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쓰인 자료는 내가 스님을 모시고 있을 때 보고 들은 사실과 스님 손수 써놓은 안거록(安居錄), 그리고 같은 문도들에게서 얻어들은 말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신동(神童)의 환생(還生)

      효봉 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부 진향리 54번지에서 수안 이씨(遂安 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김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찬형(燦亨)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해서 이웃 간에는 신동으로 알려졌다.
      열두 살 때까지 선비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배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귀여워했던가는 다음 일을 미루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스님이 열세 살 되던 정월 보름날, 동무들과 밖에서 연을 날리다가 집에 돌아와 인절미 세 개를 먹은 것이 그만 갑작스럽게 체하여 빈사의 지경에 빠졌다. 의원들이 와서 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정수리에 쑥을 뜨고 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스님의 정수리에 그때 쑥으로 뜬 흉터가 남아있다.)

      집안에서는 울고불고 하던 끝에 아주 죽은 줄 알고, 이불에 말아 한쪽에 치워놓았다.
      귀염둥이 손자가 죽은 것을 보고 상심한 할아버지는 홧김에 폭음한 나머지 그 길로 돌아가셨다. 집안이 온통 뒤집혀 있는데, 그때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온 삼촌이 부득부득 조카의 시체를 보겠다고 이불을 헤졌다. 그러자 죽은 지 스무 시간이 넘은 몸에 맥이 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스님은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래도 그때 할아버지의 운명을 대신 받고 살아난 것 같다.’

      열네 살 때, 연례적으로 평양감사가 베푼 백일장이 있었다.
      사방에서 모인 수많은 재동(才童)들이 글재주를 겨루는 마당. 이때 스님은 어린 소년으로서 장원급제의 영광을 차지했다고 한다.

      ■ 출가(出家)

      스님은 평양고보를 나온 뒤, 개화의 흐름을 따라 청운의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다.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안팎 어려운 한말(韓末), 젊은이의 꿈은 인간사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한 법에 관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세속적인 출세의 첩경이라고 부모들은 인식했으리라.

      스물여섯 살에 와세다를 졸업하고 귀국, 이로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10년간(1913∼1923)을 법관 생활로 보낸다.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에서, 그리고 평양의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드문 판사직에 종사하였다.

      이때는 일제의 잔악한 식민지정책이 날로 그 이빨을 드러내던 시절. 중국 상하이에서는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뜻있는 인사들은 방방곡곡에서 일제에 항거, 민족 독립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자 일제는 사상범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 무렵 젊은 법관은 같은 겨레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상법을 다루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양심의 소리가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한 하루하루의 생활은 누구에게 입 벌려 말 수도 없는 잿빛 고뇌였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그 당시 법관의 자리는 실로 화려한 지옥이었다.

      1923년 나이 서른여섯 살 때, 법관 생활 10년째 되던 해. 스님은 하나의 절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법관으로서 최초로 내린 사형 선고! 어떤 사건의 결과, 그 자료와 증거에 의해서 직책상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한 인간의 눈에 대고 사형을 선고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처지를 회의하고 나아가 인간의 사회 구조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가 있는가? 범부인 내가 어떻게 같은 인간을 벌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인가.

      지난날 찬란하던 청운의 꿈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스님은 꼬박 사흘 동인 이 인간적인 자책 앞에 식음을 전폐하고 밤을 새워 고뇌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가장 깊은 내심에서 우러나왔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
      입은 옷에 맨주먹으로, 물론 직장에 사표를 내던질 여유도, 어린 세 자녀를 거느린 아내에게 작별을 알릴 마음이 여유도 없었다.

      대개 출가의 경우가 그렇듯이, 일단 마음이 작정되면 한시도 더 치제하기가 어렵다. 출가에 대한 생각뿐. 그 밖의 일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때의 사형 선고는 결국 자신에 대한 선고이기도 했다.

      ■ 참회(懺悔)의 길

      집을, 고뇌의 집을 벗어난 마음은 날 듯이 가벼웠다.
      이때부터 3년 동안 엿판 하나를 메고 명산대천 팔도강산을 북에서 남으로, 또 동에서 서로 종횡무진 방랑하는 생활을 시작한다. 이제의 영화와 신분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인간 재구성을 위해 고행의 길에 오른 것이다.

      입고 나선 옷을 팔아 엿판과 한복 두 벌을 서울 남대문 거리에서 바꾸었다.
      이 옷으로 3년을 지내는 동안 깁고 꿰매어 오색 누더기가 되었다고 한다.
      더러는 귀찮은 눈을 피해 바보짓을 해 보이고, 아무 목적도 없이 하루 170리 길을 환상을 쫓아간 일도 있었다. 장마철에는 서당에 들러 글을 가르쳐주는가 하면, 시집가는 색시의 농짝을 밤새워 져다 주고 푸짐한 대접을 받을 때도 있었다.

      누더기 엿장수의 뒤를 따르는 시골 아이들에게 엿을 거저 나눠줬다가 밑천이 떨어지기도 했다. 먼 길을 갈 때엔 굶기가 일쑤여서 한때는 엿판에 콩을 넣고 다니다가 시장하면 솔잎과 물에 불린 콩을 씹으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산길을 잘못 들어 비를 맞아가며 밤을 지샌 일도 있었고, 술에 취해 얼음 위에서 하룻밤을 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울산을 지나는 길이었는데 방어진 바닷가에 가니 깔끔한 바둑돌이 하도 좋아 그걸 줍기에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야 주위에 물이 들어온 걸 알고 허둥지둥 뛰어나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엿 장사를 않고 바둑돌 장사를 하오?”

      “엿을 팔 때는 엿장수요 바둑돌을 팔 때는 바둑돌 장수요.”이와 같이 응수했다. 이렇듯 겪기 어려운 갖은 고생을 달게 받으며 자신을 가누기에 전념했다. 스스로가 선택한 고행, 그것은 참회의 길인 동시에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서계를 찾아 헤맨 구도의 행각이기도 했다.

      ■ 만남-조우(遭遇)

      1925년 여름, 정처가 없던 나그네 길은 마침내 금강산에 이른다.
      유점사에 들러 모시고 공부할 만한 스님을 찾으니,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 ‘금강산 도인’ 이라는 석두(石頭) 스님이 계시다고 했다. 그 길로 하룻길이 창창한 신계사를 찾아갔다.

      큰방에 스님 세분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을 하면 말했다.
      “석두 스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그러자 풍채가 좋은 한 스님이 불쑥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그쳐 물었다.
      “몇 걸음에 왔는고?”
      스님을 벌떡 일어나 큰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으면서 대답했다.
      “이렇게 왔습니다.”
      석두 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곁에 앉은 노장은 껄껄 웃으면서 감탄하였다.
      “십 년 공부한 수좌(首座)보다 낫네.”

      이렇게 만난다.
      만날 사람끼리 만난 것이다.
      스승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와 제자를 기다리던 스승은 이때 서로가 말은 없어도 두 마음은 하나로 맺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본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결함은 이와 같은 만남(遭遇)으로 이루어진다. 만남에 의해서 인간은 비로소 ‘나’를 자각하게 된다. 스님은 내 갈 길이 여기 있구나 하고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날도 머리를 깎아 계(戒)를 받고 법명을 학눌(學訥)이라 불렀다.
      효봉(曉蜂)이란 이름은 뒷날에 지은 스님의 법호이다.
      음력 칠월 초여드레. 나이 서른여덟. 그 뒤 스님은 이날만 되면 옷을 갈아입었다.
      여느 때 같으면 갈아입을 때가 아니므로 그 까닭을 물으면 “오늘이 내 생일이야.”하였다. 그날 스님은 새로 탄생한 것이다.

      ■ 용맹정진(勇猛精進)

      서른여덟에 중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늦깍이’이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명심하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고 분발하여 정진 일로(一路)에만 애썼다.

      그해 여름과 겨울을 보운암에서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여러 곳의 선지식을 친견(親見)하기 위해 걸망 하나를 메고 행각의 길에 나섰다. 남과 북으로 두루 다녀보았지만 별다른 속득이 없었다.

      결국 출세간의 공부는 남의 말에 팔릴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실참(實參) 실오(實悟)해야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듬해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얽힌 세정을 뚫고 뛰쳐나온 스님에겐 생사의 고뇌에서 해탈하는 일만이 지상(地上)이 과제였다. 용맹심을 일으켜 화두를 타파해야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화두란 옛 조사(祖師)들의 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참선하는 이가 참구(參究)해야 할 과제를 말한다.

      스님은 조주무자(趙州無字)로써 평생 화두를 삼았다.
      그리고 남에게 화두를 일러줄 때도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이 무자(無子) 화두를 일러주곤 했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하여 이 무자 화두만큼 공부하는 이의 눈을 많이 틔어준 화두가 없다고 한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에서 안거에 들어갈 때 스님은 미리 대중에게 알렸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입방선(入放鮮)도 경행(徑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서 정진하겠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통고하고 나서 스님은 꼬박 한 철(석 달) 동안을 하판(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 시간의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엉덩이에 무언가 달라붙는 게 있어 들어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그 진물이 중의와 방석에 달라붙어 있었다.

      살이 허무는 줄도 모르고 화두 일념에 움쭉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목욕할 때면 그 흉터를 볼 수 있다.
      스님은 그 뒤부터 더운 방을 싫어하셨다.
      스님과 함께 방을 쓰면 우리는 늘 추워서 떨어야 했다.

      ■ 깨달음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禪院)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용맹스럽게 정진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엔 먹지도 않았다. 불가에서는 원칙적으로 하루 두 끼만 먹고 오후엔 불식(不食)이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 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생겼다.

      중이 된지 어느덧 다섯 해가 되었다.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의 두터운 숙세(宿歲)의 업장(業障)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 거처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스님은 생각던 끝에 토굴(土窟)을 짓기로 했다.

      곳은 금강산 법기암(法紀庵) 뒤, 구조는 단칸방, 한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를 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발라버리도록 했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네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에서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갔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그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 장뿐. 하루 한 끼씩 공양을 들여보내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스님에겐 기쁨도 슬픔도, 편하고 괴로움도, 먹고 입고 자는 일도 다 아랑곳없었다. 오로지 무(無)자 화두를 타파하기 위한 용맹정진이 있을 뿐, 일체의 인간의 풍속권 밖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암자(庵子)와 토굴과의 거래는 하루 한 끼씩 고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주는 일, 그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주는 일뿐이었다. 인기척 없는 토굴 안. 그 전날 밥그릇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살아 있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 밖에서는 토굴 안의 동정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갔다. 그리고 새봄.

      하루는 시자가 공양을 가지고 갔다가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

      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구(窓口)에 그대로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여름, 비가 갠 어느 날 아침.

      드디어 토굴 벽이 무너졌다. 1년 6개월 만에 토굴에 들었던 스님이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나온 것이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열린 바가 있었다. 더 의심할 것 없이 이만하면 나가도 되겠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스님은 발을 떼놓지 못했다.
      1년 반 만에 걷는 걸음이라 어린애처럼 비틀비틀 걸음마를 해서 왔다.
      머리와 수염은 텁수룩 하게 길었고, 손톱과 발톱은 1년 반을 자랐다.
      그새 세수 한 번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의 심경을 글로 읊었다.
      그것은 오도송(悟道頌)이었다.
      해저연소 록포난(海底燕巢 鹿抱卵)
      화중주실 어전다(火中蛛室 魚煎茶)
      차가소식 수능식(此家消息 誰能識)
      백운서비 월동주(白雲西飛 月東走)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판사 중 탄로

      스님은 출가한 뒤 자신의 전신(前身)을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조실부모하고 의지할 데 없어 엿장수로 떠돌다가 입산한 엿장수 중이라고 자처했다.

      집은 나온 지 7년째 되던 해 유점사에 있던 시절, 점심 공양을 마침고 뜰을 거닐고 있을 때 뜻밖에 평양 법원에서 함께 지내던 일본인 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깜짝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붙들고 늘어졌다.

      “아무리 그렇기로 사표도 내지 않고 떠날 수가 있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내가 대신 사표를 써냈소.”라고 했다.

      스님은 옛날의 그 동료에게 자기 일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절 주지 스님에게 발설을 하여, 그때부터 ‘판사 중’이란 별명이 하나 늘게 된 것이다.

      그 뒤 유점사에서 임야(林野)관계로 소송이 벌어지게 되었다.
      1심에서 절측이 지자 스님은 이미 본색이 드러난 터라 변호사를 불러 변론의 요령을 일러주어 결국 2심에 가서는 승소케 하였다.

      이처럼 자기의 전신이 드러났어도 가족들에게는 거처를 알리지 않았다.
      속명(俗名)을 대야 할 일이 있어도 감쪽같이 숨기고, 시봉하던 아이의 이름인 원명(元明)으로 통했다. 찬형이란 이름은 입적하기 사흘 전에야 친지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금강산 여여워(如如院)에 있을 때, 스님의 부동하던 좌정(坐定)에 돌연변이가 생겼다.
      정진 도중 갑자기 돌아앉은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므로 대중들은 그 사실을 두고 궁금히 여겼다. 뒤에 알려진 일로, 그때 스님이 마주 보이는 문 밖에 갓 결혼한 듯한 아가씨를 동반하고 그 절을 구경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아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는 것이다. 혈육의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 되었다. 도심(道心)이 인정을 등진 것이다.

      ■ 교화 중생

      판사 중이란 정체가 드러나자 스님은 금강산도 이제는 자신과 인연이 다한 것으로 알고, 행운유수(行雲流水)의 길을 남으로 돌렸다. 설악산의 봉정(峯頂), 오대산의 상원사(上院寺), 정선의 정암사(淨岩寺), 덕숭산 정혜사(定慧寺) 등 이름있는 선도량(禪道량)을 찾아 이산에서 한 철, 저 골짜기에서 한 철. 더러는 선지식를 만나 법을 이야기하고 혹은 후학들에게 납자(衲子)의 본분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 시절에도 줄곧 오후에는 먹지 않았다.

      1937년 스님의 나이 쉰 살이 되던 해 운수(雲水)의 발길은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이르게 되었다. 송광사는 고려시대 보조(普照) 스님이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벌인 도량으로, 스님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이기도 하지만 늘 좋아하던 곳이다. 처음 찾아간 절인데도 아주 익숙했다. 틀림없이 전생에 많이 살던 곳이었을 거라고 가끔 말하였다.

      선방인 삼일암(三日庵)의 조실(組室)로 10년을 머물면서 찾아온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띄워주고 길을 열어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혜(定慧) 쌍수(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이 설정되었다.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戒)를 받았다.

      ■ 가풍-수행 이념

      계정혜(戒定慧) 이 셋은 불교 수행의 근본이념이다.
      스님은 자신이 이를 갖추어 닦았고 후학들에게 이 삼학(三學)이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다.
      삼학으로 공부하는 것을 곧잘 집 짓는 일에 비유하였다.
      계는 집 지을 터와 같고, 정은 그 재료이고, 혜는 그 기술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터가 시원찮으면 집을 세울 수 없고, 또 기술이 없으면 터와 재료도 쓸모가 없게 된다고 하였다.

      세 가지를 두루 갖추어야 집을 지을 수 있듯이, 삼학을 함께 닦아야만 생사를 면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明)을 잇는다고 하였다.

      털끌만한 것도 부처님 계율에 어긋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시간관념은 너무도 엄격했다. 지리산 쌍계사 탑전(塔前)에서 안거할 때 동구에 찬거리를 구하러 나갔다가 공양 지를 시간 단 10분이 늦어 돌아와도,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마라. 단식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되겠니?”

      그날 준엄하게 시간에 대한 교훈을 받은 이래 시봉하던 나는 시간을 어기는 일이 별로 없게 되었다.

      스님은 또 시물(施物)에 대해서는 인색할 만큼 아꼈고 시은(施恩)을 무섭게 생각했다.
      우물가에서 어쩌다 밥알 하나만 흘려도 평소에 그토록 자비하신 분이 화를 내곤 하였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앉기 전에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생활은 지극히 검박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게 곧 부자 살림이라고 말씀하셨다.

      참선(參禪)은 스님이 닦아야 할 천생의 업(業)인양했다.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하는 일이라고는 한결같이 참선뿐이었다.

      따라서 안거(공부 기간)에 대한 관념은 철저했다.
      다른 절에 있다가 정초 같은 때 스님을 찾아뵈러 가면, 뭐 하러 살림 중(안거 중)에 왔느냐고 달갑지 않게 여겼다.

      “어딜 가 있든지 정진 잘하면 내 곁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늘 함께 있다.”

      몇 해 전 스님은 영양실조에다 심장이 약해져 대구 대학병원에 3주일 가까이 입원한 적이 있었다. 겨울 결제일을 하루 앞두고 공부하는 중이 어찌 병원에서 결제를 할까 보냐고 며칠만 더 있으라는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굳이 퇴원하고 말았다.

      ■ 생불생(生佛生) 사불사(死不死)

      1954년 종단의 정화운동으로 인해서 스님을 발 딛기를 그토록 꺼려하던 시정(市井)에 나와 머물렀다.(안국동 선학원에서) 어지러운 종단 일을 수습하기 위해 수도인의 신분에는 당치도 않은 감투를 쓰기로 했다. 종회의장과 총무원장, 그리고 종정의 자리를 메웠다. 1956년에는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었다.

      스님은 평소에 국가원수나 관리들에 대해 경원하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대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지도 않았다.

      서울에 머물러 있을 무렵,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 박사의 생일 초대를 받고 종교단체를 대표해서 경무대로 축하 인사를 가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즐비하게 옹위한 가운데서 고관대작들이 드리는 인사를 앉은 채 턱 끝으로 받고 있던 이 박사는 스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벌떡 일어나 손을 마주 잡고 앉을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노(老)대통령이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의 생일은 언제입니까?”
      이때 스님은 이 박사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이 어디 있겠소.”

      이 말을 들은 노대통령은 정색을 하고 입안으로 ‘생불생 사불사’를 거듭거듭 되었다.
      그리고는 스님이 나오는데 따라 나오면서 귓전에 대고 “우리나라에 도인이 많이 나오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 장엄한 낙조(落照)

      스님은 2년(1964년) 전부터 극도로 노쇄해 갔다.
      이때부터는 규칙적인 대중 생활을 하지 못했다. 치통으로 고생할 때는 전생의 업보일 거라고 하였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한 어린애처럼 풀려버려 시봉들과 장난도 곧잘 했다.
      육신의 노쇠는 어쩔 수 없는 것. 무상(무상)하다는 것은 육신의 노쇠를 두고 하는 말인가. 스님은 가끔 “파거불행(破車不行)이야”라고 독백을 하였다.

      1956년 5월 14일 스님은 거처를 대구 동화사에서 밀양 표충사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겼다. 한동안 건강이 좋아졌다가는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곁에서 보기에도 이 세상 인연이 다해가는 듯싶었다.

      누워 있으면서 가끔 입버릇처럼 “무(無)라... 무(無)라...‘고 외마디 소리를 하였다.
      무란 허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공부한 무자 화두이다.
      이와 같이 노환으로 누워 지내면서도 참구하는 일만은 쉬지 않았다.

      입적(入寂)하기 며칠 전 곁에서 시봉들이 청을 드렸다.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안 하시렵니까?”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할란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그리고는 어린애처럼 티 없이 웃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글을 읊었다.

      오설일체법(吾說一切法)이
      도시조병무(都是早騈拇)로다.
      약문금일사(若問今日事)인댄
      월인어천강(月印於千江)이니라.

      내가 말한 모든 법은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니라.

      이것이 효봉 스님 열반송(涅槃頌)이다.

      1966년 10월 15일 새벽 3시
      예불을 모실 시각에 스님은 말씀하셨다.
      “얘, 나 좀 일으켜다오”
      부축해 드리니, 평소에 공부하여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나 오른 갈란다.‘
      얼마 못 사실 것을 곁에서도 예견한 터라 태연하게 물었다.
      “언제쯤 가시렵니까?”
      “오전에 가지.”
      이 말을 마치자 눈을 감고 오른손에 호두알을 굴렸다.
      “무(無)라....무(無)라....”
      스님은 가끔 이런 소리를 하셨다.
      이렇게 잠잠히 앉아 있는 것을 지켜보고 물었다.
      “스님, 화두는 들립니까. 지금도 성성(惺惺)하십니까?”
      “응, 응, 응.......”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오전 10시. 맑게 갠 가을 날.
      손에 굴린 던 호두알이 문득 멈추었다.
      표정이 굳어졌다.
      마침내 조용히 입적(入寂)하시다.
      일흔아홉 해 한 수도인의 생애가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가?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은은히 열반종 소리가 메아리쳤다.
      물든 잎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하처래(何處來) 하처거(何處去). 1966

      출처 : 법정 스님 <영혼의 모음>

      글쓴이: 향상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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