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최상의 가치,-청화스님
그 자리를 우리 중생은 보지 못하지만 성자는 그 자리하고 항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최상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자리를 느끼고 그 자리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핵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인류가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체이다.' 라고 하는 부처님 지혜로 가야만 핵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끼리 단체끼리 화합도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지혜로 해야 만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나와 남이 둘로 보는 서구적인 사상, 서구식의 분열로 보는, 이것저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그런 사고방식 이런 걸로 해서는 절대로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이 없습니다.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 이런 것이 절로 안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반야바라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나그네 길이 팍팍한 길 아닙니까. 갈등하고 질투하고 헤어지고 생이별 사이별 이러한 길인데, 이런 길에서 그래도 좀 편하게 살아야 할 것인데, 편하게 살려면 바른 지혜의 등불, 앞서 말씀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등불로 해야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자기 몸뚱이 내 것이라고 아무리 지고 가도 변하고 맙니다. 죽을 때 우리가 운다고 안 죽습니까. 우리는 보다 똑 바로 봐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허망 무상하다고 확실히 느끼면 그 무겁던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인생은 가뿐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몸뚱이 이것이 언제 가도 무방하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모두 다 이것은 허망하다. 원래 공이다. 이렇게 확실히 생각할 때는 그렇게 귀찮은 몸이 귀한 몸이 그때는 아무런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범 세끼한데 이 몸뚱이를 주나 개한데 주나 그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몸도 제일 편하고 마음도 제일 편합니다. 부처님 법은 몸도 마음도 제일 편하게 하는 최상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방법 화두(話頭)면, 화두 염불(念佛)이면 염불, 주문(呪文)이면 주문 모두가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차별도 없고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자리, 우리 본래 면목자리, 어떤 수행법이나 본래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 자리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당장에 그 자리를 가지고 깨달으면 좋은데, 업장 때문에 습기 때문에 바로 안 돼는 것입니다. 나뿐 습관성 때문에 옳다고 이치로는 믿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행동은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생각생각에 그 부처님 생각, 화두 하는 사람들은 화두, 염불하는 사람들은 염불로 해서 실상 자리를 놓치지 않고 습을 녹여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그럽니다. 부처님이 생명인지라 생명으로 구하면 좋을 것인데 바싹 마르게 화석화시켜서 구한단 말입니다. 내 생명이고 만중생의 생이 바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도 화두를 하는 것은 보다 고도의 참선인 것이고, 염불은 그냥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적어도 달마스님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우리 몸 밖의 어디에 존재한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 부처님이 우리 몸밖의 어디에 계시다가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 추구하고 염불을 하면 나한테 와서 나를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그것은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 자체가 바로 내 생명의 근본 자리이고 근본 성품이고, 우주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에 참다운 염불은 바로 우주의 근본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본래면목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것이 염불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방편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과 참선 공부가 아닌 것과 차별은 무엇인가? 이 구분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부분을 하셔야지 그렇지 못하면 공연히 부처님 법을 비방을 합니다. 참선 이것은 이름이나 상에 걸리지 않고, 명상에 걸리지 않고서 본 성품 자리 본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헛된 가상(假相)이나 가명(假名)이나 그런 것에 걸리지 않고서 근본 성품을 안 여의는 공부는 다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나 '무자'를 하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나 다 참선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원래 문이 없이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인데 부처님법 가운데서도 꼭 자기들 하는 식이 옳다고 합니다. 그 외는 옳지 않다고 그럽니다. 그럴수가 어디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집(我執) 법집(法執)입니다. 그 아만심(我慢心), 법성(法性)을 미처 못 보아 놓으면 법집을 합니다. 그러나 법성을 본 사람은 법집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가 하나의 법이거니 어떻게 부처님 법 가운데서 어느 것만 옳고 어느 것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설사 하나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 그것이 우리 부처님 같이 천지우주의 근본 성품을 의미하면 됩니다. 의미가 문제인 것이지 그냥 형식상 그런 가상가명(假相假名)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나 또는 ‘똥마른 막대기'라 부르나 다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자리를 안 여의면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잘 모르니까 극락세계도 저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이지 서쪽이나 동쪽이나 아래나 위나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어두워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스스로 극락을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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