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제목차를 존경하라,-일타 스님
모든 대덕과 우바새와 우바이들은 자세히 들어라.
부처님께서 멸도(滅度) 하신 후 저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항상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존경하라 하셨으니, 바라제목차라 함은 곧 이러한 계법(戒法)을 말함이니라.
이 계를 가지는 자는 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만남과 같으며, 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음과 같으며, 갇혔던 이가 감옥을 벗어남과 같으며, 멀리 갔던 이가 집에 돌아옴과 같느니라. 마땅히 알라. 이 계는 곧 대중들의 큰 스승이니라.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더 계실지라도 이와 다름이 없느니라.
諸大德 優婆塞 優婆夷等諦聽 佛滅度後 於像法中
應當尊敬波羅提木叉 波羅提木叉者 卽是此戒 持此戒者
如暗遇明 如貧得寶 如病者得? 如囚繫出獄
如遠行者得歸 當知此戒 則是衆等大師 若佛住世 無異此也
이 부분은 해탈을 보호하는 법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존경할 것을 강조한 부분입니다. 파라(para,波羅), 곧 ‘이상향의 세계로 나아가는 발을 보호하는 법’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달리 계족(戒足)이라고 번역합니다.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발이 튼튼해야 합니다.
팔은 하나가 완전히 없어져도 걸어갈 수 있지만 발은 다릅니다.
새끼발가락 하나만 다쳐도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계율은 해탈의 이상향으로 직접 걸어서 나아가는 그 발을 보호하는 것이요,
계율 그 자체가 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법을 존경하고 잘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계를 잘 가지면 어떤 공덕이 있는가?
이 송계서에서는 다섯 가지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①어두운 곳에서 밝음을 만남과 같다.
이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중생의 삶은 깜깜한 밤에 산길을 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발길 가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나기까지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에 산길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한 발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데 길은 어떻게 뻗었는지 보이지 않고, 반 발자국씩 내딛으며 전진은 하지만 결코 그 발끝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번갯불이 번쩍하는데 오른쪽에 곧게 뻗은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옳거니! 길이 바로 저쪽에 있었구나.”
이와 같이 계를 가지면 어두운 인생길에서 밝음을 얻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비유하면, 수십 년 어두웠던 방이라 하더라도 촛불 하나를 밝히면 수십 년 동안의 어두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수십 년 동안 번뇌 망상과 죄업 속에서 살았을지라도 보살계를 받은 바로 그 순간부터 밝은 삶은 보장되는 것입니다.
②가난한 이가 보배를 얻음과 같다.
가난은 무엇입니까? 가난은 바로 우리들 마음속의 탐욕심(貪慾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하기 때문에 탐욕을 부린다고 하지만, 그와 같이 생각하는 이는 부자가 되어도 탐욕을 버리지 못합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가난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가난은 마음이 넉넉할 때만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맛이 있는 산해진미라도 위장이 나쁜 사람에게는 소용이 있지 않습니다. 비록 꽁보리밥에 생된장이라도 위장이 좋은 사람한테는 나무랄 데 없는 요기가 됩니다. 위장이 좋은 것이 보배요, 몸이 건강한 것이 보배요, 속이 상하는 일을 만났을 때 웃을 수 있는 마음자세를 가질 수 있으면 그것이 보배입니다.
보살계는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올바른 신심으로 이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 줍니다. 보살계를 지닐 때 탐욕으로 인한 가난은 저절로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정법(正法)의 보배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③병든 이가 쾌차해짐을 얻음과 같다.
결론부터 말하면 보살계는 어떤 마음의 병이라도 능히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의학은 “병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요, 약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病不能殺人 藥不能活人)”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곧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은 업(業)이 좌우합니다. 중생의 업력(業力)이 바로 천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업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불현듯이 일어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에 의해 더욱 깊게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를 받아 지니면 불현듯이 일어나는 삼독심이 저절로 고개를 숙이면서 청정한 계행과 선정과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명업력(無明業力)이 아닌 해탈력(解脫力)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몸이 맑아지고 몸이 맑으면 병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어찌 보살계를 지니는 힘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④갇혔던 이가 감옥을 벗어남과 같다.
중생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바로 감옥입니다.
처자 권속의 인간관계로 얽혀 있고, 시간과 공간과 물질 속에서 얽매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장소와 어느 시간도 실지로 우리를 얽어매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나 자신의 업력이 그 모든 것과의 관계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를 받아 지니면 이와 같은 부자유는 저절로 사라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감옥이 아니라 자유의 세계로 바뀝니다. 삼독을 벗어난 맑은 삶, 당당한 삶, 자유로운 삶을 보살계가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⑤멀리 갔던 이가 집에 돌아옴과 같다.
이 비유 속에는 ‘멀리 갔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느 곳으로 멀리 갔으며,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까?
이 비유를 천리만리 떨어진 타향으로 객관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현실 속의 우리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중생들은 고향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일심(一心)의 원천을 등지고 무명의 바람에 휩싸여 끝없이 흘러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보살계를 받아 몸과 말과 뜻을 거두어 잡음으로써 우리는 그 오랜 방황을 끝내고 일심의 원천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마음의 고향! 이것을 이 비유에서는 ‘집에서 돌아오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비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살계는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고 마음의 풍요를 줄 뿐만 아니라 참된 해탈의 세계, 참된 고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송계서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더 계실지라도 이와 다름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정 보살계를 부처님과 같이 받들고 지니고 존경하는 불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보살계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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