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에 마음을 두고,-청화스님
우리가 불교를 믿는 본뜻은 인생고를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중생계가 고통의 세계이기 때문에, 인생고를 떠나는 데에 불교의 대강령(大綱領)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인간 세상은 고생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더러는 재미도 있고, 무엇을 성취하거나 또 가족을 구성하여 부부가 함께 살며 자식을 낳고 사는 것이 다 재미있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 저런 것도 좀 더 갚아 들어가 생각해 보면, 모두가 또 고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유하거나 고정적인 안락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생로병사 아닙니까.
인간의 목숨이란 것은 그야말로 소수어(少水語)라, 적은 물에 담겨 사는 고기, 나날이 줄어가는 물에서 사는 물고기나 똑같은 것이 우리 목숨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생은 무상한 길입니다. 그래서 사바세계는 고생뿐입니다. 사실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우리가 속아서 안락스럽다, 행복스럽다, 이렇게 느끼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사바세계는 인생고 뿐이지 안락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도 이런 인생고를 떠나는데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사제법문(四諦法門) 같은 것도 온전히 인생고를 떠나는 법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비롭고 부사의 한 것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부사의한 것은 역시 마음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마저도 금방 좋아했다가, 또 조건이 바꿔지면 금방 싫어합니다. 내외간도 처음 만날 때는 서로 좋아하니까 당연히 만났지 않았겠습니까 마는, 또 다른 여건이 생겨서 싫어지면 그때는 헤어지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 마음은 참 요물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불여의(不如意) 하고 복잡한 일이 많은 것도, 모두 다 요망스러운 마음의 짓입니다. 마음의 탓입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범부(凡夫)입니다.
범부가 사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모른다는 사실은, 영원한 진리 차원에서 생각할 때는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참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사람은 성인입니다. 참사람 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마십시오, 참사람 되는 것이 인간의 가장 바른 길입니다. 정도입니다. 마음의 근원 자리는 바로 참사람 자리입니다. 마음의 근원 자리는 성자의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은 얼마나 넓을 것인가. 마음은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은 바로 허공입니다.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한 생명, 이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가 부처님이요. 하느님이요. 그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것이 어디 별도로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도 끝도 없는 생명 자리가 바로 하느님입니다. 또 다른 복음서를 보나, 그렇게 하느님 말씀이 되어 있어요, 하늘에 계시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잘못 알아먹기 때문입니다.
중생들더러 "그대 마음이 하느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하면 중생들이 알아먹겠습니까? 못 알아먹을 테니까 이래저래 방편을 써서 "이뭣고" "무무" 그러는 것이지, 그분들의 본뜻은 한도 끝도 없는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님이요 참다운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하고 경을 보더라도, 암중모색으로 덮어놓고 "이뭣고" "무무" 할 것이 아니라, 도인들이나 부처님의 본뜻은, 마음자리 그대로 바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달마스님께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신 것은, 절대로 문자를 배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자의 뜻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근본 마음자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 하신 법문이 이입행입(理入行入)이라 하셨습니다. 이입행입이라는 말씀이 달마 스님 법문의 요체(要諦)입니다.
이입(理入)은 이치로 해서 먼저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달마 스님이 덮어놓고 우리들에게 믿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즉, 문자는 다 덮어놓고, 참선만 하면서 벽만 바라보고 믿으란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이치로 들어가 이론적 체계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사조도신(四祖道信)스님도 말씀하시기를, 공부하려면 먼저 여실하게 반야바라밀을 공부하고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입니다.
철학과 종교라는 문제를 여러분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철학은 인생과 우주의 근본 도리를 이론적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지 않겠습니까? 종교는 철학과 달리 우주의 도리, 그 자리를 바로 생명으로, 그 자리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론과 실천의 총화를 위하여, 철학과 종교는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론적인 면은 철학, 실천적인 면은 종교,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그러면, 이론적으로는 불성, 자성, 진여, 도 등등 다 뭐다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되겠지요. 그러나 자성이다, 불성이다, 진여다, 그런 것은 이론인데, 거기에 그쳐 버리면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이론은 생명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것은 생생한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아닙니까.
아무리 우리가 교학을 많이 배워서 불교학자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불교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참다운 공부가 되고 성인이 됩니다. 가령 우리가 나무아미타불을 왼다 하더라도, 그냥 이론으로 나무아미타불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내 마음의 본성이다고, 이렇게 말은 쉽지요,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해서는 그것이 참 맛이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은 자성미타(自性彌陀)라, 내 생명의 본체가 아미타불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간절히 믿고, 아미타불에 의지해서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차근차근 부처가 되어갑니다.
우리 마음은, 보통 내 마음이라 할 때의 그 마음은 좁지만, 마음의 본바탕은 부처님과 더불어 둘이 아닙니다. 마음의 넓이도 천지 우주를 다 그 마음속에 담고 있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모양이 있으면 한계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모양이 없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제약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도 끝도 없습니다.
깊이도 한도 끝도 없고, 넓이도 한도 끝도 없고, 허공과 더불어서 같고 허공과 더불어서 우리 마음이 하나입니다.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 스님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내가 내 마음이 있어서 살아 있듯이,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끝도 가도 없이 깊고 넓으면서, 만덕(萬德)을 갖춘 그 자리가 바로 마음자리입니다.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은 모두 다 마음자리를 풀이한 말씀입니다.
마음은 얼마나 훌륭하고 얼마나 공덕이 많은 것인가?
그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한 법문이 팔만사천 법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문 가운데서도 직통으로, 방편가설(方便假說)은 쉬어 놓고서 그냥 마음만 오로지 공부해서 깨닫는 공부가 이른바 참선 공부입니다.
우주 전체 모두가 다 한 마음이라. 그것이 이른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그 우주 모두가 다 한 마음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마음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유심론(唯心論)입니다. 물질이 명명백백히 있는데, 어째서 모두가 다 마음뿐인가?
영가현각(永嘉玄覺)대사가 한 말씀이 있어요.
꿈속에서 보니까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다 있지만 (몽리명명유육취 夢裡明明有六趣), 깨달은 뒤에 볼 때는 천지 우주가 다 비어 있다(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는 말입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물질이라는 찌꺼기가 본래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다만 나쁜 버릇 때문에, 욕심을 부리는 버릇, 또 성내는 버릇 때문에 무게를 느끼고, 한계 내에서 스스로 구속당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참선을 하더라도 암중모색으로 덮어놓고 화두로써만 애쓰고 의심하면, 얼마 못 가서 상기(上氣)가 됩니다. 기가 올라서면 그때는 잘못 고칩니다. 화두를 놔버려야지, 안 놓으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두를 드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에, 화두를 통해서 의심이 없는 자리를 빨리 느껴야 합니다.
화두를 빨리 타파해야 됩니다.
화두라는 것은 백날 의심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타파해서 우리 자성, 불성 자리를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달마 스님이나 육조혜능스님이나 마조도일스님이나 임제 스님이나, 쟁쟁한 조사에게는 화두란 것이 없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사람들 근기가 약하니까, 임시로 사람들에게 진여불성 자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화두가 생긴 것이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든다 하더라도, 그 청정무구한 본래 진여불성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그 진여불성이 무엇인가. 그 근원을 의심 참구 해야 합니다. 상대적인 상을 가지고 시야비야(是也非也)의심하면, 한도 끝도 없이 마음만 괴롭고 상기가 됩니다. 이와 같이 그런저런 도리를 모르고서 닦는 것이 이른바 암증선(暗證禪)입니다. 암중모색하는 것입니다.
문자선(文字禪)은 경을 좀 배워서 알기는 제법 압니다.
그런데 아는 것을 백날 따져 봐도, 우리 자성, 우리 불성(佛性)이 밝아지지 않습니다. 갈등만 생깁니다. 니체의 철학, 스피노자의 철학, 칸트의 철학, 헤켈의 철학 등 철학도 얼마나 많습니까? 위대한 한 철학자의 이론 체계만 터득하려 해도 몇십년 걸립니다. 알아본다 해도 그걸로 해서 인생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의 본 성품은 무엇인가?
인생과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문자 속에서는 도저히 안 나옵니다.
그래서 팔만 사천경을 그야말로 통달해 버린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참선(參禪) 공부가 깊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자만 배우고 문자만 따지는 것을 문자선(文字禪)이라 합니다.
야호선(野狐禪)입니다. 야호는 들여우란 뜻입니다.
여우란 동물은 꾀가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 보고 봤다 하고, 공부가 제대로 안 돼 있어도 공부를 했다 하고, 자기 스스로 어느 경계에 이르지 목하고도 경계에 이르렀다 하고, 즉 말하자면 미증을 증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未證)을 증명(證)했다 하고, 깨닫지 못한 것(未悟)을 깨달았다(悟)고 하는 그런 식의 거짓선이 야호선입니다. 여우란 동물이 꾀가 많아서 거짓부리 한단 말입니다.
암중모색하는 것과 문자로만 따지는 문자선과 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야호선, 이 세 가지가 참선 공부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병폐입니다.
삼매(三昧)에 든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이 하나의 처소에 딱 모아져서 흔들리지 않아야 삼매입니다. 그렇게 들어가야 참다운 진여불성을 스스로 깨달아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에 들어 있는 무량공덕, 상주부동(常住不動)하고 영생불멸(永生不滅)하고 또는 만덕(萬德)을 갖추고 있는 그런 공덕을 스스로 수용해 쓴단 말입니다. 삼명육통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신통묘지를 부릴 수 있는 도인이 잘 안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깊은 삼매에 못 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하도 소란스럽고 근기가 약해서, 잘 참지 못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공부하실 때 꼭 일상삼매(一相三昧)라는 것을 기억해 두십시오.
일상삼매는 모두가 다 하나의 실상입니다.
둘이 있고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생명의 실상(實相)입니다. 그것이 일상삼매라고 어느 도인들이나 철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주의 실상을 안 놓치고서, 우주가 우리 중생이 보듯이 천차만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상이기 때문에, 실상에다가 마음을 두고서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것이 일상삼매고, 그다음에는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일행삼매는,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그 자리를 생각 생각에 간단이 없이 그대로 지속시킨단 말입니다.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六祖檀經)에도 일상삼매 일행삼매라는 말씀이 여섯 군데나 있습니다. 그리고 육조단경의 부촉품(咐囑品)에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종종무량(種種無量)의 법을 통달하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證)할지니라"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일상삼매는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거기다가 마음을 두어야 하는데, 거기다가 잠시간 마음을 둬도 다른 것 생각하면 흩어져 버리겠지요.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염념상속(念念相續)이 일행삼매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꼭 명심하셔서, 참선 선방에서 공부하시든지 또는 세속에 계시든지, 될수록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많이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위 법문은 2000년 11월 성륜사 동안거 결제 법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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