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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일타 스님

by 혜명(해인)스님 2022. 4. 19.

복된 삶을 살기 위하여,-일타 스님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의 받은 삶이 그것이다.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는 선악이 그것이다.
윤회와 인과를 믿어라.
고해의 파도를 타고 출렁이는 중생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사바세계!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 잡된 인연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회잡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중생이기에,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당연한 바람을 이루지 못한 채 한평생을 고해 속에서 헤매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왜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일까?
고해를 벗어나 복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니다.
누구나 행복이 충만 된 삶을 누릴 수 있다.
행복만이 아니라,
영원과 자재로움과 맑은 삶을 얻는 비결도 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이 비결에 따라 가장 완벽한 해탈을 이루셨고, 한평생 동안 복된 삶을 이루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이제 그 많은 가르침 중 특별히 두 가지를 뽑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 내일은 오늘의 상속,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의 받은 삶이 그것이다.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는 선악이 그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장이요 내일은 오늘의 상속이다.
전생은 금생의 과거요 내생은 금생의 미래이다.

사람들은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전생을 생각하고 내생을 바라보며 금생을 살아가는 이는 흔치 않다.
왜 어제는 돌아볼 줄 알면서 전생은 묵살하고, 내일은 기약하면서도 내생은 잊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전생과 내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요,
지금 이 순간에 너무 집착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이상 전생, 금생, 내생의 삼세 윤회는 반드시 있다. 왜냐하면 삼세 윤세는 인, 연, 업, 과의 넷으로 구성된 필연적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은 씨앗이요 '연'은 연지,
곧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며, '업'은 밭에 뿌린 씨앗이 결실을 볼 때까지 가꾸는 행위이다. 이렇게 인과 연과 업이 모이면 결과는 자연 '성'일 수밖에. 씨가 좋고 밭이 좋고 농사를 잘 지었으면 복을 많이 받을 것이고, 나쁜 씨를 밭에 뿌리고 가꾸는 일을 게을리했다면 수확이 나쁜 것은 정한 이치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지은 대로 받는 것이니, 선인 선과 악인 악과, 이것이 사바세계의 생리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장수만세>라는 프로를 보았는데, 아나운서가 80이 넘은 한 노인에게 질문하였다.

"장수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누라 속을 썩이지 않는 것이 저의 장수 비결입니다."
이 대답에 관람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였다.
그냥 우스갯소리 같은 이 말속에 깊은 생활철학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데 있어 부부보다 더 가까운 사람은 없다.
부부는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며 살아간다.
부부는 한 몸이다.
가장 친하고 서로를 아껴주는 이가 부인이고 남편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몸이나 다를 바 없는 부인의 속을 썩이지 않는다면 남편의 마음도 그만큼 편안할 것이다. 또 남편 때문에 속상할 일이 없는 부인은 항상 즐겁고 평화롭고 따스한 마음을 갖추게 될 것이다. 자연히 음식도 정성껏 만들고 때때로 정성껏 달인 보약도 대령할 것이다.

어찌 남편이 건강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와는 반대로 부인의 속을 썩히면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음식도 아무렇게나 할 것이고, 설사를 하든 체하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남편의 마음마저 불편하여 하는 일까지 시원스럽게 풀리지 않게 되고 말 것이다. 진정 '마누라 속을 썩이지 않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한 그 노인의 말이 명답이 아닐 수 없다. 곧 마누라 속을 썩이지 않는 것은 인이요, 장수는 과인 것이다.

이와 같은 인과의 법칙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작용하고 있다.

창조론, 우연론, 숙명론이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인연과 인과의 법칙을 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반드시 어떤 원인에 의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 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밥을 먹다가 혀를 깨물게 되면 우연으로 돌려버리기 일쑤지만, 의학적으로 살펴보면 혀를 깨무는 것조차도 분명한 까닭이 있다고 한다.

우리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오장육부를 순환하다가 어떤 이상을 일으키면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불규칙한 맥박이 신경계통에 자극을 주면 이가 혀를 깨물게 되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 맥박이 이상이 생기고 신경이 잘못되는 것인가?
이 모두가 인과의 맥락에서 보면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유지와 변화, 인생의 모든 것을 인과관계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인과의 도리를 벗어난 우연론이나 전지전능한 창조주에 의한 창조론은 수용하지 않고 있다.

진정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면 인과의 원리에 따라 전개될 수가 없다.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이 우주만유와 생명계를 창조하였다면, 우리가 암흑과 죄악, 약육강식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만약 신이 잠깐의 실수로 세계를 잘못 창조하고 잘못 관리하여 이렇게 되었다면 그 전지전능한 힘으로 다시 개조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역사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 우리의 현실이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불교의 인과론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숙명론이나 운명론과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운명론이나 숙명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고 한다.

곧 사주팔자대로 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의 자율적인 의지와 창조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삶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은 불교의 인과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불교의 인과론은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있다.
나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의 삶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내가 받고 있는 이 결과는 어제의 행위가 원인이 되었고, 오늘 내가 짓는 행위는 내일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인과론은 내일을 창조하고 오늘의 과오와 고뇌를 근원적으로 개조하기 위한 인과론이다. 곧 보다 적극적인 삶, 보다 멋진 삶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 불교의 인과론인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인과응보와 윤회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물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나고 있고 모든 것은 모르는 사이에 무르익어가고 있다. 삼세의 인연 또한 시간과 공간의 파장으로서, 전생에 하던 일과 생각했던 일을 금생에도 하게 되고, 금생에 하는 일과 생각하는 일은 내생으로 연장 확대되어 간다.

실제로 전생에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은 현세에서도 어려움 없이 도를 닦아 이루고, 전생에 예술을 깊이 익혀 영감을 기른 사람은 현생에서 특별히 예능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이름난 예술가가 된 사례들이 허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종연생 종연멸의 법칙! 이는 만고불변의 철칙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