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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과 동행을/💕법문의도량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

by 이初心 2023. 1. 1.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탄허 스님

    10조 9만 5천 48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화엄경》에 관한 연구와 번역을 17년을 두고 지속해 오다가 지난 1974년에 완간(完刊)을 보았다.

    이런 나를 두고 혹시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평소에 어떻게 섭생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섭생은 하지 않는다.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길이라곤 딱 한 가지뿐이다.
    즉 생명의 본처(本處) 자리로 항상 나를 귀경(歸竟)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이때 노력이란 사방에 신경을 안 쓰는 것이다.
    즉 신경을 쓰면서도 안 쓰는 도리가 있을 뿐이다.

    생명의 본체는 무형(無形) 즉 시공이 끊긴 자리다.
    생명의 본체는 무형이지만 그 본질인 씨가 4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이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구체적 표상은 곧 이 육체를 집으로 하여 아(我: 소아)로 나타나는 것일 텐데, 이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운행해야 할까?

    답은 한 가지 무아(無我)가 되는 것뿐이다.
    무아가 되지 못하고 유아(有我)일 때 본명(本命)의 본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고(苦)가 생기고 아픔이 일어난다. 도(道)란 무아를 이루어 나가는 길이다. 따라서 무아가 될 때만이 연을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가 있다.

    어떤 생명이나 일이 되었든 착수했다면 한 번은 끝나게 되어 있다.
    조그만 세사(世事)조차도 착수한 일은 끝을 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대사(一大事)인 무아가 되는 일에 착수해 놓고 끝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온 생명이 무수할 텐데 과연 이 수많은 생명 가운데 무아를 이루어 본처(本處)로 귀환한 개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고작 성인 몇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모두 유아(有我)로 머무르다 끝나기 때문이다.
    유아는 집착해서 꿈속에 빠져 지내므로 범부로 떠돈다.
    그러다 보니 윤회에 떨어지고 업을 지어 본체를 잃어버리고 헤매게 된다.

    우리는 ‘중생(衆生)’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을 알아야 한다.
    유아(有我)로서는 인연을 만나야 조금이라도 운행할 수 있지만 무아가 되면 인연 자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인 까닭에 무아의 길에서 항상 이탈하고 만다.

    그렇다면 중생의 일생은 항상 헛되이 그치고 마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무아(無我)이고자 하는 노력은 비록 이번 생에 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내생을 위한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임종 연습이라거나 열반 연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되는 대로 살아 버린 인생 즉 자아의 확충이나 출세 혹은 물질의 축적에 매료되어 살고 있는 인생은 허무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대신 우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 분명히 밝히지만,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연습이 아니다. 당대에 무아가 되자는 발심을 해야 한다. 무아의 경지를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고 혹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공부를 한다는 것은 결코 불필요한 연습이 아니다. 공부는 분명히 내생에 훨씬 뛰어난 씨앗을 만드는 인(因)이 될 테니 말이다.

    이때 도(道)의 자리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모습은 아니다.
    도의 자리만큼 계급이 세밀한 것도 없다.
    무아의 경지를 보았다고 해서 행동이 투철해지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무아를 보았다고 해도 힘에 있어서는 현인을 당하지 못하다.
    때때로 현인이나 성인도 시운(時運)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이 있다.
    현실적인 시류에 영합해 간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현인이나 성인은 어느 때나 무아다.
    오늘날 그 풀이가 잘못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아는 시공의 본처인데 가당치 않은 말이다.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내세를 부정하면 현실도 없어야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오늘이 있으니 어제가 있었고 내일이 있고 금년이 있으니 거년(去年)이 있었고 내년이 있다. 현재가 있으니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있다는 삼세, 즉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을 철두철미하게 말한 것이 불교다.

    그래서 언제나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인과법칙은 추호도 어김이 없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인과법칙을 현실만 갖고 본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불선지가(積不善之家)에 필유여앙(必有餘殃)이다.”

    이 말은 현실만 가지고 교법을 세우기 때문에 현재에 받는 과가 조상이 쌓은 인으로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반면 불교의 인과법칙은 누가 주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다.

    불교 경전 중 《인과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받는 것이 전생 일이고, 내생의 일을 알려면 금생에 짓는 것이 내생 일이라.

    이 구절에서처럼 내생의 문제는 금생에 지은 선이나 악을 생각해 보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전생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 또는 조상들 중에 누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생에 이렇게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좀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하겠다.

    출처 : 탄허 닷컴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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